제13화 키스
신태진 회장이 한쪽 입꼬리를 슬그머니 올렸다.
“어떤가요? 상당한 돈과 시간을 투자해 만든 작품입니다.”
인정 욕구가 가득 찬 신태진 회장과 눈이 마주친 오한결이 고개를 돌렸다.
거대한 스크린에 선명하게 보이는 것은 분명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였다. 두 남녀가 부드럽게 움직이며 달콤한 키스를 하는 중이다……. 황금빛 옷에 둘러싸인 그들은 서로를 향한 사랑의 열망을 강렬하게 내뿜고 있었다.
“보고도 믿을 수가 없군요. 어떻게 하신 겁니까?”
신태진 회장이 오한결 곁으로 자연스레 다가왔다.
“이 작품을 위해서 화가 100명을 고용했어요. 그리곤 유명한 감독에게 <키스> 작품 속 두 주인공이 움직일 수 있도록 영상 제작을 의뢰했었죠. 살아 움직이는 황금빛 남녀가 환상적인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꼭 보고 싶었거든요.”
오한결이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대단한 시도긴 하나, 영상화는 원본 이미지의 상상을 제한할 수 있어요.”
“하하. 이건 어디까지나 제 상상력을 실현한 겁니다. 남녀의 우아한 움직임과 달콤한 키스 장면을요.”
오한결은 스크린을 보며 회장의 말에 공감했다. 여자를 포근히 감싸는 남자의 섬세한 손짓과 그의 품에서 행복한 표정을 짓는 여자는 보는 이로 하여금 현실에서 잠시 잊힌 사랑의 설렘을 다시금 느끼게 하고 있다.
오한결이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하자, 신태진 회장이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오한결 작가님께서 이렇게 관심을 보이니, 무척 기쁘군요.”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와 다른 점이 많지만, 이런 시도를 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신태진 회장의 표정이 심하게 굳어졌다.
“<키스>와 다르다고? 무슨 소리!! 이건 <키스> 작품 그 자체라고요!! 클림트 화풍에 정통한 화가들이 그린 100점의 작품을 현대 기술로 영상화한 겁니다. 현대판 <키스>라고 불러도 모자람이 없다고요!”
오한결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비슷해 보일 뿐이죠. 클림트 작품을 해석할 줄 안다면 많은 부분이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신태진 회장이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럴 수…… 없어요. 처…… 처음 듣는 얘깁니다.”
“누가 회장님 열정에 반기를 들 수 있었을까요?”
“…….”
“회장님의 의중을 반영하다 보니, 원작과 달라질 수밖에 없었겠죠.”
“…….”
“실망하지 마세요. 저 작품도 나름 예술적 가치가 있어 보입니다.”
“…….”
실망과 분노로 표정이 일그러진 신태진 회장이 입을 닫아 버렸다. 하지만 오한결은 그의 눈치를 보지 않고 주변 고가의 장식품과 그림들을 흥미롭게 구경하고 있다. 잠시 뒤 오한결이 여유롭게 물었다.
“오늘 저를 부른 이유가 뭔가요, 회장님?”
신태진 회장은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스크린을 여전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설명해줄래요? 왜 이 그림이 <키스>가 될 수 없는지?”
오한결이 부드러운 미소로 답했다.
“클림트의 <키스>에 대한 마음이 진심이군요.”
신태진 회장이 말했다.
“사업이란 말이죠. 인간의 거친 양면성과 깊은 어둠을 정면으로 대면하게 하는 잔인한 일이랍니다. 클림트의 <키스>는 일에 치여 존재의 소멸을 느낀 내게 관능적인 감각을 일깨워준 작품입니다. 이 그림은 예술의 위대함을 느끼게 해준 첫 번째 작품이에요. 그래서 소유하고 싶었습니다. 무척 갖고 싶었죠.”
신태진 회장이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제가 욕심을 부렸죠. 어리석은 짓으로 보일 수도 있고요.”
“예술을 감상하는 방법은 정해진 게 없어요. 원작자가 그림에 어떤 상징을 심어 놓았든, 보는 사람이 자신의 감정을 투영해 작품에서 색다른 면을 본다면 그 자체도 훌륭한 감상법이라고 생각합니다. 회장님은 <키스>에서 받은 느낌 그대로 스크린에 옮겨 재현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의미가 있는 작품이라고 말씀드린 겁니다.”
신태진 회장이 단호하게 말했다.
“전 클림트의 <키스>를 가질 겁니다. 제가 무엇을 놓쳤는지 말해주세요. 진짜 클림트의 작품처럼 만들려면 어떤 특성이 있어야 하죠?”
“……글쎄요. 우선 오늘 용건부터 해결할까요?”
신태진 회장이 뒤돌아 고급 가죽 소파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자리를 옮기시죠. <키스>의 비밀을 알려주기 전까지 이 방에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을 겁니다.”
“협박처럼 들리는군요. 회장님.”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 * *
신태진 회장이 직접 차를 따르며 온화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좀 흥분했던 것 같군요. 기분 상하지 않았을까 걱정입니다.”
오한결이 눈을 감고 차향을 맡자, 상큼한 과일 향이 코끝을 자극했다.
“명작을 소유하고 싶은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예술만큼 좋은 투자도 없으니까요.”
신태진 회장이 차분히 대답했다.
“재벌이 예술을 좋아하면 모두 돈 때문인 줄 알죠. 솔직히 부정할 수 없는 부분이긴 합니다만, 적어도 제가 명작을 좋아하는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소유욕 비슷한 건가요?”
신태진 회장이 체념한 듯 대답했다.
“예술에 대한 사랑을 그렇게 불러도 할 말은 없습니다. 허허.”
오한결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몸 안에 따스하게 번지는 차 기운이 평온하게 느껴졌다.
잠시 뒤 오한결이 고개를 돌려 스크린을 바라봤다. 찬란한 황금빛으로 둘러싸인 남녀가 몹시 관능적으로 빛나고 있었다.
“클림트의 <키스>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이 누구인지는 아직도 논쟁거립니다. 추측만 가능할 뿐, 아무도 알 수 없게 됐어요. 작가는 그 어떤 단서도 남기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더 아름다운 건지 모르겠습니다.”
신태진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호기심은 언제나 우리를 흥분시키죠. 그래도 저 여인을 ‘플뢰게’로 해석하는 사람이 많잖아요.”
“플뢰게가 클림트의 연인으로 알려졌으니까요. 그렇다면 하나 물을게요. 회장님은 클림트의 <키스>에서 두 남녀가 진한 사랑을 하고 있다고 느껴지나요?”
신태진이 회장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당연하죠. <키스>라는 제목처럼 남녀의 황금빛 사랑이 느껴집니다. 그들의 화려한 옷 무늬부터 하단에 꽃장식까지 모든 게 아름답고 황홀해요. 진정한 사랑의 이상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남녀의 황금빛 입맞춤. 남자 옷에 네모, 여자 옷에 동그란 무늬에 숨겨진 어떤 상징. 가려진 몸에 은밀히 보이는 일그러진 얼굴. 이런 미스터리한 그림에서 우리는 무슨 감정을 느껴야만 하는 걸까?
“화려한 모습에 가려진 진짜 감정은 ‘슬픔’입니다.”
신태진 회장이 흥분했다.
“<키스>에서 슬픔을 느낀다고요?”
오한결이 손을 번쩍 들고는 그림 속 여인을 가리켰다.
“왜 저 여인은 행복에 겨운 눈과 입 모양을 하고 있죠?”
“……그것은, 사랑이 빠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지요.”
“회장님, 휴대폰으로 클림트의 <키스> 원본을 검색해보세요.”
신태진 회장이 급하게 휴대폰을 집어 들고는 한참을 말없이 화면만 들여다봤다. 잠시 뒤 그가 겨우 입을 열었다.
“이럴 수가……. 행복한 표정이라고 생각했는데, 여인의 얼굴에서 슬픈 감정이 진하게 느껴집니다.”
“적극적인 남자와 반대로 여자는 수동적인 모습 아닌가요?”
“……남자의 손길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네요. 지그시 눈을 감고 빨리 이 순간이 지나가길 바라는 얼굴이에요. 세상에…….”
오한결이 물었다.
“여전히 ‘키스’로 보이나요?”
“슬픔에 잠긴 여인의 뺨에 하는 입맞춤이라…….”
말을 잇지 못하는 신태진 회장을 보고는 오한결이 피식 웃었다.
“그림 하단에 뭐가 보이나요?”
신태진 회장이 안경을 벗고 휴대폰 화면을 유심히 살폈다.
“꽃밭이죠. 이것도 사랑의 상징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한결이 단호하게 말했다.
“유심히 보셔야 할 것은 꽃밭이 아니라, 낭떠러지입니다. 저 둘은 낭떠러지 부근에서 위태로운 존재가 되어 있어요. 만약 그들의 균형이 무너진다면…….”
“……죽음이라는 파멸을 맞겠죠.”
한참 동안 신태진 회장은 말없이 스크린만 바라봤다. 사랑에 대한 환상이 남긴 스크린 속 작품. 그것은 여전히 황금빛으로 반짝였다.
“저기, 회장님.”
신태진 회장이 애써 미소지어 보였다.
“어이쿠, 내 정신 좀 봐. 민망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여서.”
“많이 놀라신 것 같군요.”
“네. 맞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는 사업을 하면서 가장 힘들 때 나를 위로해준 작품입니다. 인간에 대한 혐오와 증오가 가득 찼을 때 그림을 보면서 사람에 대한 희망을 품을 수 있었죠. 제가 본 건 오로지 ‘사랑’이었습니다. 근데 모두 오해였다니, 충격이네요. 좀 더 살폈어야 했는데…….”
“예술을 이해하는데 정답은 없어요. 그래서 회장님의 해석이 틀렸다고 말할 수도 없고요. 다만 원본에 대한 집착이 심하셔서 몇 가지 알려드린 것뿐입니다.”
오한결이 식어버린 차를 단번에 들이켰다.
“이제 저를 부른 이유를 알려주시죠.”
“이런, 제가 이기적이었군요. 제 생각만 했어요. 하하.”
신태진 회장의 표정이 단호하게 바뀌었다.
“이제 더 욕심나는군요. 작가님께 정식으로 작품을 의뢰할까 합니다.”
“…….”
신태진 회장이 말을 이었다.
“파주 카페 거리에 직접 가서 작품을 봤습니다. 하나는 이집트 미술이고 하나는 반 고흐의 작품을 오마주로 해서 그렸더군요. 제 눈을 의심했을 정도로 작품이 너무 훌륭했습니다.”
예술을 사랑하는 재벌. 하지만 그가 보여준 그림에 대한 집착과 소유욕에 반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무엇보다, 오한결은 신태진 회장을 신뢰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굳이 재벌의 후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직 작품을 의뢰받을 입장은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작품 해석 능력까지 갖췄으니 더 욕심나는군요. 작가님은 순탄한 작품 활동을 원하지 않습니까?”
오한결이 신태진 회장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피식 웃어 버렸다.
“이번에도 협박처럼 들리는군요, 회장님.”
“그런가요? 하하. 좋은 쪽으로 해석해 주시죠.”
오한결이 자리에서 일어나 신태진 회장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스크린 속 작품을 수정하실 건가요?”
“물론이죠. 바로 시작할 겁니다.”
“저로 인해 새로운 작품을 얻게 됐으니, 그걸로 만족하시죠. 회장님.”
“……저런, 단호하시군요.”
오한결이 문을 열려고 나가려고 하는데 신태진 회장이 소리쳤다.
“왜 묻지 않는 겁니까? 얼마를 줄 건지. 무슨 혜택이 있는지.”
오한결이 등을 보인 채 대답했다.
“저는 재벌을 위해 그림을 그리지 않습니다. 회장님 돈도 필요 없고요.”
신태진 회장의 웃음소리가 거칠게 들렸다.
“알겠습니다. 조만간 다시 뵙죠.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