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충해도 완벽한 예술 천재-12화 (12/202)

제12화 당근 케이크

홍미숙이 부엌에서 머리를 질끈 묶고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데, 때마침 홍철수가 밀가루를 들고 나타났다.

“케이크를 만든다고? 다들 좋아하겠네.”

“네. 당근 케이크요. 처음 시도하는 건데 좀 떨리네요.”

“떨리긴. 미숙이 요리 솜씨는 알아주잖아.”

홍미숙이 분주하게 당근, 코코넛, 시나몬, 달걀, 밀가루 등 각종 재료를 식탁에 한가득 나열했다.

“다 챙긴 거 같은데. 양이 너무 많나…….”

“남더라도 많이 해야지. 배부르게 먹여보자고.”

홍미숙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러고 싶어요.”

홍미숙이 능숙한 솜씨로 달걀 세 개를 푼 뒤 설탕, 오일 등 여러 재료를 첨가했다. 체에 거른 밀가루를 섞어 준 뒤 미리 다진 당근을 한가득 부어 케이크 반죽을 뚝딱 만들어냈다.

“오빠, 오븐에 반죽 넣을게요. 시간 되면 꺼내주세요.”

띵!

홍철수가 오븐 뚜껑을 열자 구수한 빵 냄새가 부엌을 가득 채웠다. 그가 조심스레 익은 반죽을 꺼내 식탁에 올려놓자, 홍미숙이 미리 준비한 휘핑크림을 아낌없이 케이크 위에 바르기 시작했다.

홍철수가 침을 꼴깍 삼켰다.

“이야, 맛있겠는데.”

“다행히, 예쁘게 됐어요.”

홍철수가 케이크를 상자에 담았다.

“어서 가자고. 손님들보다 먼저 도착해야지.”

* * *

아트화랑에 모인 오한결과 벽화 알바생들.

오한결, 노을, 최무열이 군침을 흘리며 당근 케이크를 바라보고 있다.

홍미숙이 케이크를 자를 플라스틱 칼을 손에 들고 말했다.

“잠시만, 내가 잘라줄게.”

노을이 입술을 뾰족 내밀었다.

“힝, 그러기엔 너무 예쁜데.”

최무열이 홀쭉한 배를 보란 듯이 두드렸다.

“빨리요,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그의 농담에 모두 한바탕 웃고 떠드는 사이, 홍미숙이 케이크 조각을 여러 접시에 차례로 옮겨 담고 있었다.

노을이 홍미숙을 거들며 말했다.

“언니,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찾아와 줘서 내가 고맙지. 자, 여기 케이크. 많이 먹어요.”

달콤한 케이크와 커피가 모두 세팅되자, 모두 정신없이 먹기 시작했다.

입안에서 솜사탕처럼 녹는 달콤한 케이크와 산미가 풍부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자 모두 이 순간만큼은 천국에 있는 듯 황홀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홍철수와 홍미숙이 그런 청년들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다.

“‘삼각지 거리’에 파주 그림에 대한 소문이 자자하더구나.”

최무열이 입에 묻은 케이크를 티슈로 닦으며 말했다.

“맞아요. H대 학생들도 작가가 누구냐고 난리에요. 으……. 입이 간질간질.”

홍미숙이 오한결을 바라봤다.

“왜 소문을 안내? 나 같으면 엄청 자랑하고 다닐 거 같은데.”

오한결이 무심하게 대답했다.

“화신벽화 작품이니까요. 나중에 제대로 개인작품 활동하면 그때 홍보할 테니까, 다들 도와주세요. 하하.”

“……제대로? 어머, 기대된다.”

홍철수가 오한결의 어깨에 손을 지그시 올렸다.

“한결 학생 덕분에 김일중 사장도 한고비 넘겼단다. 고맙고 미안하네.”

“별말씀을요.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네요.”

“그리고 한결 학생의 뜻에 따라, 김일중 사장이 아동구호 단체 ‘세이브아이들’에 1억 원을 기부했어. 김 사장이 한결 학생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전해달래.”

노을이 말했다.

“어머, 김일중 사장님이 테스트를 통과했네요.”

“테스트?”

“‘사자의 서’ 테스트요. 심장이 깃털보다 무거우면 죄가 많다. 결국, 김일중 사장님의 깃털이었던 양심의 무게는 심장보다 가벼웠네요. 양심적인 김일중 사장님은 천국행 확정!”

오한결이 웃으며 대답했다.

“난 김일중 사장님이 그렇게 할 줄 알았어. 여러모로 좋은 분이잖아.”

홍철수가 대화를 이해하지 못해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홍미숙이 케이크 한 조각을 오한결 앞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한결 학생 계획은 뭐야? 벽화를 계속 그릴 거야?”

모두 오한결의 입만 바라봤지만, 그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글쎄요. 당분간은 생각이 없네요.”

노을이 몹시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그럼 이제 뭐 할 건데?”

“공모전을 준비할까 해. 그래도 예술계로 들어가려면 공모전만 한 게 없거든.”

노을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굳이 예술계에 속할 필요가 있을까. 먹물들끼리 똘똘 뭉쳐서 예술을 정의하는 곳 아닌가? 세상엔 수많은 예술가가 있어. 그들이 만든 범주에 속하지 않으면 예술가가 아닌 거야? 나처럼 독자적으로 활동해. 한결 작가님 정도면 사람들이 금세 알아볼 거야.”

오한결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을 네 말이 맞아. 하지만 현실적으로 ‘예술계’에 들어가야, 활동 반경이 넓어질 거야. 내 계획은 일단 들어가서 전부 뒤집어 버리려고. 다양한 활동을 하는 수많은 예술가가 인정받을 수 있도록 그 안에서 노력해 볼게.”

노을도 고개를 끄덕였다.

“한결 작가님 생각 존중할게. 그래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네.”

오한결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정답은 없어. 어쩌면 내가 틀렸을 수도 있고. 분명히 약속할 수 있는 것은 앞으로 노을 같은 스트리트 아티스트들이 마음껏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도록 노력할 거야.”

붉어진 노을의 얼굴을 보고는 최무열이 키득키득 웃었다.

“한결 형님의 의견에 공감. 현실적인 것도 고려해야지. 그나저나 으악! 공모전 짜증 나겠다.”

홍철수가 슬쩍 끼어들고는 조심스레 말했다.

“한결 학생 정도면 어떤 공모전에 나가도 당선은 확실한 거 아닌가?”

“맞아요. 한결 형님이 참가하면 무조건 1등이죠.”

오한결이 케이크를 먹으며 대답했다.

“모르죠. 사람 일은. 하하.”

최무열이 오한결을 보고 입을 쭈욱 내밀었다.

“뭐지, 평소에 보지 못한 겸손인데…….”

“……무열이가 오해가 많구나. 하하.”

휴대폰으로 뭔가를 검색하던 최무열이 오한결 얼굴에 화면을 들이댔다.

“뜨끈한 공모전 소식임당! 이번에 처음 열리는데, 당선 혜택이 엄청 빵빵해요.”

「명일문화재단 제1회 아티스트 공모전」

「공모부문: 자유창작, 평면/입체 부문」

「공모주제: 자유주제」

「출품자격: 19세 이상」

「시상내역: 대상 1명」

「당선혜택: 창작지원금 1억 원. 단독 개인전 개최, 해외 레지던시 연수 및 국내 아틀리에 입주」

“명일문화재단이면 명일그룹이 설립한 재단이겠네?”

“맞아요. 하단에 보면, 명일그룹의 이윤을 문화산업에 환원하기 위해 설립한 재단이래요. 사회공헌활동의 일환으로 재능있는 문화 예술인들의 국내외 활동을 돕고 있다고 적혀 있네요.”

“명일그룹이라…….”

회귀 전 뉴욕에 거주했을 때, 유명 신인 예술가들이 한국의 명일그룹과 손을 잡았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오한결은 워낙 늦은 나이에 데뷔했고 갑자기 대작가 반열에 오른 탓에 신인 작가를 선호했던 명일그룹과는 인연을 맺지 못했다.

꾸준히 문화예술에 투자해 한국의 예술 수준을 세계적으로 끌어올렸다는 평을 듣는 명일그룹. 그 중심에 신태진 회장이 있을 것이다.

“딱 1명 뽑는 건가?”

“네. 이것이야말로, 오한결 작가님을 위한 맞춤형 공모전인 거죠.”

오한결이 최무열에게 미소지었다.

“고마워. 참고할게.”

오한결은 공모전 혜택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추후 국내외 예술활동을 이어가기 위해선 세계적인 기업이 설립한 문화재단의 후원이 상당히 도움이 될 것이다. 그들의 가진 재력과 사회적 영향력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거니까. 하지만 찜찜한 게 하나 있었다.

신태진 회장.

예측 불가능한 괴짜 할아버지.

순간, 노래방에서 전인건의 ‘그것만이 우리 세상’을 열창하는 신태진 회장의 모습이 떠올랐다. 애써 고개를 가로저으며 열창하는 그를 잊어보려고 했지만, 워낙 강렬하게 뇌리에 박혀 있어 그건 불가능해 보였다.

‘노래방을 데리고 간 내 잘못이지……. 솔직히 진짜 같이 갈 줄 몰랐거든.’

무턱대고 사람을 찾아오는 과한 열정을 가진 대기업 회장. 말이 좋아 열정이지 어쩌면 집착일 수 있고 작가의 창작 행위를 방해하는 최악의 성격일 수도 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누군가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최무열이 반갑게 외쳤다.

“김일중 사장님! 역시 먹을 복이 있으신 분.”

김일중은 오직 오한결만 노려볼 뿐, 주변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오한결!!”

홍철수가 깜짝 놀랐다.

“김 사장! 이게 무슨 무례한 행동인가?”

“형님,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오늘 오한결 작가님이 명일그룹 신태진 회장님을 만나기로 했단 말이에요. 어제 분명 회장님을 만나겠다고 나와 약속도 했는데 결국 그 약속을 어겼어요! 여기서 수다가 웬 말입니까!”

“……신태진 회장? 우리가 아는 그 명일그룹?”

놀란 최무열이 어벙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명일문화재단 공모전……. 명일그룹……. 신태진 회장? 이게 우연이야, 운명이야……?”

홍철수가 오한결에게 물었다.

“김 사장 말이 사실이야?”

오한결이 말없이 울상을 짓고 있는 김일중 사장을 바라봤다. 전날 새벽에 전화할 정도로 김일중 사장이 신경 썼던 일인데, 오한결은 자신의 무심한 태도에 미안한 마음이 들어, 슬슬 눈치 보며 입을 열었다.

“아이고, 깜빡했네. 오늘이었구나……. 휴대폰 알람이 고장 났나…….”

사람들이 오한결의 어설픈 연기력에 잠시 할 말을 잃고 넋을 놓았다.

어색한 침묵을 돌파하고자 오한결이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지금이라도 회장님을 만나러 가야겠네…….”

김일중이 오한결 곁으로 얼른 다가와 그의 손을 꼬옥 잡았다.

“내가 태워줄게. 바로 가자고!”

오한결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슬금슬금 손을 뺐다.

“아……. 네. 고마워요.”

“회장님께 감사하다고 전해줘. 그분께서 파주 그림이 마음에 들었는지, 화신벽화와 MOU를 맺겠다지 뭐야!”

오한결이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

“오호, 축하합니다. 좋아요! 지금 명일그룹으로 출발!”

* * *

명일그룹 본사 앞에 도착한 오한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국을 넘어 세계 경제를 움직이는 공룡 회사답게 현대식 통유리 사옥이 눈부시도록 돋보였다.

오한결이 로비에 들어서자 말끔한 정장 차림의 남자가 허겁지겁 다가와 허리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작가님. 회장님을 모시고 있는 양승호 비서입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회장실에 도착하자, 문 앞에 대기 중인 아름다운 비서가 살짝 웃으며 문을 열어주었다. 오한결도 가볍게 인사를 건넨 뒤 회장실 안으로 당당히 걸어 들어갔다.

신태진 회장이 억지스럽게 소리를 질렀다.

“이야, 어서 오시지요. 오한결 작가님. 우린 구면입니다.”

“늦었습니다. 회장님.”

“아닙니다. 원래 주인공은 늦는 법이지요.”

신태진 회장의 날카로운 말에 웃으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대우해 주셔서. 영광이네요.”

“…….”

오한결이 회장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떡이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역시 재벌답게 고가의 명화들이 벽에 걸려있었다. 마치 유명 갤러리의 전시실과 다르지 않아 보였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네요.”

“그렇게 봐준다니. 무척 기쁘군요. 과할 정도로 돈을 쓰긴 했죠.”

“죄송하지만, 좀 과하긴 하네요.”

“…….”

오한결의 시선이 한 곳에 멈췄다.

“저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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