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옛날 영화
오한결이 준비한 야외 영화관을 본 가족들은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세상에, 너무 멋진데.”
박선희가 두 손을 모으고 감탄의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TV에서나 봤는데, 실제로 보니 더 예쁘구나.”
오한결이 앉으라고 손짓하자, 가족들은 한껏 기대에 찬 얼굴로 스크린 앞에 놓인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오한결이 가족들의 뒤통수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귀엽네, 다들.’
오준근이 뒤돌아 물었다.
“그나저나, 오늘 상영할 영화는 뭐지?”
박선희가 어깨에 담요를 걸치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라면, 뭘 봐도 재미있을 거 같아요. 한결이가 고른 영화라면 난 무조건 오케이!”
오한수가 휴대폰에 눈을 고정한 채 중얼거렸다.
“솔직히 호러 영화가 딱인데……. 흐흐.”
“겁쟁이가 무슨 호러 영화냐. 또 오줌 싸려고?”
“형! 내가 언제 오줌 쌌다고 그래?”
“초등학교 때 세계지도는 다 그렸지.”
“형!! 과거를 들추다니……. 유치하게. 나도 형의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볼까?”
한바탕 웃고 떠드는 사이, 어느새 스크린에 영화가 상영되기 시작했다. 스피커에서 익숙한 OST가 흘러나오자 박선희가 몹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건……. 설마!”
오준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야, 이건 생각지도 못했는데.”
오한수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뭔데 그래? 왜 나만 몰라?”
잠시 뒤, 무척 젊고 사랑스러운 ‘산드라 블록’의 모습이 화면에 나오자, 박선희가 탄성을 질렀다.
“어머~ 옛날 생각난다.”
오준근이 촉촉해진 눈으로 박선희의 손을 꼬옥 잡았다.
“아빠랑 엄마랑 막 사귀기 시작했을 때 이 영화를 봤거든. 그때 아빠가 엄마한테 푹 빠져 있을 때였어. 그날 영화를 보고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엄마한테 프로포즈했었지.”
오한수가 몹시 놀랐다.
“사귀기 시작했을 때?”
오준근의 귀가 붉어졌다.
“아니……. 뭐, 운명적인 사랑이란 게……. 그런 거란다. 에헴.”
떨떠름한 표정의 오한수를 귀엽게 바라보던 박선희가 웃으며 말했다.
“막내는 절대로 흉내 내선 안 된다. 아주 위험한 사랑법이야. 호호.”
오준근과 박선희가 고개를 돌려 오한결에게 엄지를 세워 보였다.
오한결이 어렸을 때, 할머니는 그에게 부모님의 결혼 이야기를 해주곤 했다. 그들의 운명적 만남과 저돌적인 아버지의 프로포즈에 대해. 가끔 TV에서 <당신이 잠든 사이에> 영화가 나오면 오묘한 표정을 짓는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결혼 생활이 항상 행복한 것은 아니었을 테니까…….
부모님에게 그날의 특별함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최고의 선물은 행복했던 추억이니까.
한참 영화에 몰입하던 중에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화신벽화 김일중 사장입니다. 방금 신훈은행으로 2억 원 입금했습니다.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작가님!」
오한결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 * *
“이걸 어찌합니까. 벽화라도 훼손되면 큰일입니다.”
베레모를 쓴 카페 사장이 황망한 표정으로 벽화를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다.
이미 SNS에 소문이 쫙 퍼지면서 인증샷을 찍기 위해 전국에서 사람들이 우후죽순 파주로 모여들고 있다.
“우리가 그림을 지켜야 합니다.”
붉은 앞치마를 두른 카페 사장이 마치 시위대를 막는 경찰 기동대처럼 두 팔을 벌려 벽화 앞에 서성이는 사람들을 막아섰다.
“자자, 물러들 가세요. 손으로 만지지 마시고요. 저기 학생!! 만지지 말랬잖아. 이게 얼마짜린지 알아!!”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뭐야, 저 아줌마. 이게 모나리자라도 되나. 웃기네.”
“완전 개짜증. 뭐래. 아줌마나 비켜요!! 난 멀리서 왔단 말이야!”
찰칵, 찰칵.
휴대폰 카메라 촬영 소리와 고성이 끊임없이 뒤섞였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썰물처럼 카페거리를 빠져나갔다.
짙은 뿔테 안경을 쓴 카페 사장이 한껏 웃으며 벽화 앞에 서성이는 다른 카페 사장들에게 다가왔다.
“이야~ 카페 매출이 장난이 아니에요. 두세 배는 오른 거 같은데요.”
“화신벽화가 해냈어요. 파주 벽화 프로젝트는 완전한 성공을 거둔 겁니다.”
뿔테 안경을 쓴 카페 사장이 단호하게 말했다.
“전 처음부터 화신벽화를 믿었습니다!”
“그러셨겠지요……. 음…….”
“이곳은 앞으로 유명 예술 관광지가 될 겁니다. 화신벽화 만세!”
* * *
그날 밤, 자정을 넘긴 시각.
카페 거리 등불이 하나둘씩 꺼지고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왔던 그때. 두 남자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또각, 또각.
지팡이 소리와 함께 등장한 백발의 노인. 그 뒤를 그림자처럼 따르는 정장 차림의 남자.
노인이 천천히 벽화 앞에 다다르자, 그의 옅은 탄성이 밤의 적막을 깨웠다.
“이런……. 이럴 수가.”
노인이 살짝 휘청이자 남자가 잽싸게 다가와 부축했다.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소문이 사실이었군. 보고도 믿기지 않는구먼…….”
“실제로 보니까, 어마어마하네요. 왜 SNS에서 난리가 났는지 알 것 같아요.”
“수많은 명화를 소장하고 있지만, 그것들이 이 벽화보다 예술적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안 드는 건 왜일까?”
“……벽화 크기가 커서 그런 게 아닐까요?”
신태진 회장이 자신의 비서를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아니야,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야…….’
대한민국 재계 1위 명일그룹 회장 신태진. 재벌답게 엄청난 재력으로 수많은 명화를 수집하고 재능있는 예술가들을 아낌없이 후원하고 있다. 사람들은 경제적 이득 때문에 예술을 이용한다고 수군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신태진 회장은 진정으로 예술을 사랑하고 그 가치를 인정하는 사람이다.
그런 신태진 회장이 우연히 인터넷에 떠도는 두 장의 사진을 보게 됐다. 바로 오한결의 ‘이집트 미술’과 ‘반고흐 작품’이었다. 자정이 넘긴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급히 비서를 호출해 당장 파주로 달려온 것이다.
오랫동안 말없이 벽화를 감상하던 신태진 회장이 나직이 말했다.
“빈센트 반고흐가 살아온 것 같구나. 아니, 오히려 더 뛰어난 작품이야.”
신태진이 벽화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양 비서, 자네는 이 그림에서 뭘 느끼는가?”
양승호가 고개를 돌리자 벽화에 몰입한 신태진의 옆모습이 보였다.
“저는 잘 모르지만……. 이 벽화에서 가슴 찌릿한 묘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갑자기 웃음을 터트린 신태진 회장.
“하하하하!”
“…….”
“정답이야. 그림 감상은 말이지. 미술 이론이 어쩌고, 미술사적으로 어쩌고 하면서 보는 게 아니야. 자네처럼 마음으로 느껴야지. 그렇다면 이 그림은 자네한텐 명작임이 틀림없네.”
양승호 비서는 미술에 대해 잘 모른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처럼 미술은 어려운 것이고 부자들의 돈놀이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무런 의미 없이 흩뿌린 물감 자국에 수억의 돈을 쏟아붓는 사람들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본 파주 벽화처럼 가슴을 저리게 하는 작품이라면 충분히 돈을 지불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을 이론이 아닌 마음으로 볼 수만 있다면…….
“또 한 수 배워갑니다. 회장님.”
신태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이 그림의 작가가 누구지?”
“작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확실한 것은 파주시 지원으로 벽화가 제작됐다고 합니다.”
“오호, 잘 됐군. 내가 박민용 파주시장을 잘 알거든. 자리 한 번 마련해보게.”
“네! 알겠습니다.”
* * *
궁중음악이 은은하게 흐르는 고급 한정식당.
정갈하고 다채로운 음식 앞에서 머리가 벗겨진 박민용 파주시장이 연신 땀을 닦으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그 모습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던 신태진 회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런, 더운가 봅니다.”
“아닙니다. 회장님. 저…… 전 괜찮습니다.”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물을 한 모금 마시는 신태진 회장.
“박 시장과의 인연은 오래됐지요. 그때가 언제였더라…….”
박민용이 부랴부랴 손수건을 주머니에 넣고는 반듯하게 허리를 곧추세웠다.
“20년 전 대학생 때 제가 명일그룹 장학생이었습니다. 그때 베풀어 주신 은혜는 정말 하늘과 같았습니다.”
“옳거니. 그랬지요. 똑똑하고 총명한 학생이었어요. 하하하.”
“하……하……하, 감사합니다. 회장님.”
때마침 종업원이 문을 열고 들어와 음식을 상에 내려놓았다.
“여긴 불고기가 맛있어요. 박 시장도 허기질 테니, 어여 들어요.”
몹시 무거운 침묵 속에 음식 씹는 소리만 쩝쩝 들리고 있다.
박민용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신태진 회장을 바라봤다. 몹시 인자한 얼굴, 몸에 밴 정중한 태도. 하지만 국내를 넘어 세계적인 기업을 대표하는 사람 아닌가. 결코 긴장을 늦춰선 안 된다. 무엇보다 신태진 회장의 한 마디에 박민용의 정치 생명이 끝날 수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박민용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회장님께서 카페 거리 벽화에 관심이 많다고 들었습니다만.”
능청스럽게 눈을 동그랗게 뜬 신태진 회장.
“아이고, 깜빡했네요. 오늘 그걸 물어보려고 했는데 말이죠.”
“……어제 양 비서한테 연락받고 무척 기뻤습니다.”
“그래요?”
“이번 벽화 프로젝트는 제가 처음부터 책임지고 진행한 거라서요. 이렇게 회장님께서 좋아해 주시니 몹시 영광입니다.”
“오호, 파주시민들은 좋겠어요. 시장이 이렇게 예술에 관심이 많으니까요.”
“과찬이십니다……. 회장님.”
입이 바싹 마른 박민용이 찬물을 벌컥 들이켰다.
이틀 전, ‘파주 벽화 사업’을 파주 카페 사장들이 마음대로 진행한 사실에 박민용 시장은 크게 분노했다.
“자기들 멋대로 작품 제작 비용을 올리고 업체도 선정했다고? 이런 미친 것들.”
박민용은 문화정책과 과장에게 절대로 시에서 예산을 집행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본때를 보여줄 테다!
사실, 박민용은 벽화사업을 사촌 동생이 운영하는 업체에 맡기려고 했다. 그림이라는 게 거기서 거기 아닌가. 엉뚱하게 생긴 조형물부터 어설픈 지방 홍보물까지. 다 이런 식으로 해처 먹으니까, 문제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일개 카페 사장들이 자신의 계획을 망쳐놓은 것이다.
박민용이 정치적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스스로 이런 말 하긴 부끄럽지만, 흔히 지방자치 단체 사업은 비리가 많네, 내정자가 있네 하지만 제가 시장으로 있는 한, 파주시만큼은 무조건 공정하게 업체를 선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벽화처럼 훌륭한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던 거죠.”
신태진 회장이 피식 웃었다. 이미 벽화 제작 뒷이야기를 양 비서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박민용은 자신의 이득을 위해 호떡 뒤집듯 태도를 바꾸는 정치인의 전형이었다. 하지만 속이 훤히 들여다 보여 오히려 다루기 더 쉬운 사람이었다.
“역시 박 시장님은 대단하십니다.”
“아이고, 칭찬받으려고 한 건 아닙니다.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양심을 지킨 것뿐이죠.”
스르륵, 문이 열리자 종업원이 들어와 술과 잔을 내려놓았다.
“여기서 직접 빚은 술이라고 하더이다. 박 시장, 한잔 받으세요.”
박민용이 재빨리 무릎을 꿇고는 술잔을 내밀었다.
신태진이 술을 따르며 물었다.
“그래서 벽화를 그린 작가는 누군가요? 제가 아는 사람인가요?”
“…….”
“……설마 모르세요?”
“그게……. 저기……. 죄송합니다!! 회장님! 제가 지금 당장 작가가 누군지 알아보겠습니다!”
신태진이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하하, 급한 건 아닙니다. 지금은 편하게 식사하시고요. 내일까지 양 비서에게 정보를 좀 주시구려.”
“……감사합니다.”
“박 시장, 예술가에게도 관심을 좀 가져주세요. 앞으론 한국의 미래는 우리같이 사업하는 사람이나 정치인보다 예술가들이 이끌어갈 거로 믿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네. 명심하겠습니다.”
“어여 드세요, 술이 달군요.”
박민용이 주먹을 불끈 쥐고 생각했다.
‘회장님 앞에서 무슨 망신이야! 도대체 그 작가라는 놈이 누군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