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충해도 완벽한 예술 천재-9화 (9/202)

제9화 럭셔리 캠핑

자정을 넘긴 시각.

최무열의 전화를 받은 김일중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파주 카페 거리에 도착했다. 조용히 작업하고 싶다는 오한결의 요청에 따라 김일중은 집에서 초조하게 그림이 완성되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늦은 시각에 걸려온 최무열의 전화에 부랴부랴 뛰쳐나왔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카페 거리 입구로 향하는 김일중.

저 멀리 최무열로 추정되는 남자가 벽화 앞에 앉아 있었다.

“거기, 무열 학생 아니냐?”

“사장님! 드디어 오셨군요.”

최무열이 김일중을 몹시 반기며 말을 이었다.

“한결이 형하고 노을 누나는 먼저 집에 갔어요.”

드디어 벽화 앞에 선 김일중. 그는 멍하니 그림을 바라보다가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

그림에 압도되어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그 모습을 본 최무열이 김일중 곁으로 다가왔다.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진정한 예술가는 따로 있나 봐요. 좋은 대학만 나오면 멋진 예술가의 길이 열릴 줄 알았는데.”

최무열이 한탄하듯이 중얼거렸다.

“그래서 미대 입시만 죽어라 팠죠. 그런데 이걸 보세요. 이런 작품이 과연 노력만으로 그릴 수 있는 건가요? 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울컥하는데……. 작품 앞에 서니 삶이 너무 허무하게 느껴지네요. 도저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압도적인 작품이에요.”

김일중은 최무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결국, 해냈구나, 오한결!’

예상은 했지만, 실제 그림은 더 위대해 보였다. 잠시나마 벽화 사업을 같이 해보고 싶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오한결은 김일중이 다가갈 수 없는 위대한 예술가임을 스스로 증명했다.

이 벽화 하나만으로도 오한결은 최고의 예술가 자리에 오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그는 처음부터 그곳에 올라가 있는 사람이었다. 보통 사람이 닿을 수 없는 곳에…….

김일중과 최무열이 동시에 눈물을 흘렸다.

분명, 각자 흘리는 눈물의 이유는 다른 것이었다.

* * *

이른 아침, 거실에서 쿵쾅쿵쾅 들리는 소음에 오한결이 눈을 떴다. 피곤이 덜 풀린 몸을 겨우 일으켜 거실로 나와보니 부모님과 동생이 분주하게 뭔가를 나르고 있었다.

“엄마, 이 많은 짐은 뭐예요?”

박선희가 이마에 땀을 닦으며 대답했다.

“뭘 챙겨야 할지 몰라, 이것저것 꺼내봤다.”

휴대용 가스버너, 접이식 테이블, 의자 등 창고에서 먼지 잔뜩 쌓였던 물건들을 꺼내 거실에 잔뜩 쌓아 놓았다.

오한수가 거대한 구식 텐트를 짊어지고 나타나자, 참고 있던 오한결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말 안 했어요? ‘카라반 글램핑’이라고?”

가족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게 뭐니?”

오한결이 답답해하며 물었다.

“야, 오한수. 너도 모르니?”

“형,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 우리 가족은 캠핑이 처음인데.”

오준근이 구식 텐트를 뻘쭘하게 만졌다.

“밖에서 먹고 자야 하니까, 당연히 텐트를 챙긴 건데…….”

거실에 널브러져 있는 물건들을 오한결이 한쪽으로 치우며 말했다.

“카라반 글램핑은요. 일반 캠핑과 다르게 차에서 잠을 자는 거예요. 일명, 차박이라고 하죠. 럭셔리 캠핑이라고 알고 있으면 돼요. 거기 가면 필요한 캠핑용품은 다 있으니까, 우린 몸만 가면 되고요.”

오준근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렇구나. 캠핑 가는 사람들이 짐을 많이 싸 가지고 가더라고. 그래서 이것저것 챙긴 건데. 글램핑이라는 것도 있구나. 무척 흥미로운데.”

박선희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한결아, 그런 곳은 비싸지 않니? 우린 아무 데서나 자도 괜찮아. 너도 돈 쓸 곳 많을 텐데, 무리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오한결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엄마, 돈 걱정은 마세요. 오늘은 그냥 즐기기만 해요.”

오한수가 찡긋 윙크하며 오한결을 거들었다.

“엄마. 형이 요즘 자신감을 탑재한 것 같은데, 믿어보자고요.”

오한결이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아직 세 시간 정도 여유 있으니까, 저는 좀 더 잘게요. 모두 저녁에 입을 두꺼운 옷 정도만 챙기면 돼요. 가볍게 떠납시다. 하하. 그럼 이따 뵐게요.”

오한결이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방으로 들어가 버리자, 모두 멍하니 서 있다가 분주하게 거실을 치우기 시작했다.

* * *

오랜만의 외출에 들뜬 기분으로 가평 캠핑장에 도착한 오한결 가족.

차에서 내린 오한수가 상쾌한 공기를 들이켜며 기지개를 켰다.

“이야, 한결 형 덕분에 캠핑도 다 와보고. 대박!”

박선희가 주변 경치에 감탄하며 환하게 웃었다.

“공기부터 다르구나. 오랜만에 야외에 나오니까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네. 한결아 고맙다.”

오한결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다행이네요. 예약 엄청 힘들게 했거든요.”

사실, 예약은 불가능했었다. 오한결이 일주일 동안 취소 건이 없냐고 매일 전화해서 겨우 얻은 기회였다. 처음에 시큰둥했던 예약 담당자도 오한결의 끈질긴 노력에 마음이 움직였는지 예약 취소자가 나타나자마자 오히려 본인이 더 흥분해서 오한결에게 전화를 했다.

[오한결 님! 드디어 가족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됐어요. 축하드려요!]

오준근이 근사한 카라반이 보이자 성큼성큼 다가갔다.

“우와! 이게 한결이가 말한 거구나!!”

오한수가 냅다 달려와 오준근 곁에 섰다.

“아버지, 완전 대박. 검색해보니까, 럭셔리 캠핑 맞아요.”

오한수가 조심스레 카라반 문을 열고 놀란 표정으로 소리를 질렀다.

“대박!! 내부는 완전 호텔이잖아!”

오준근과 오한수가 카라반에 냅다 올라 구석구석을 살폈다.

널찍한 침대와 모던한 부엌이 먼저 눈에 띄었다. 냉장고, 온수기, 넓은 수납장과 현대식 화장실까지 두루 갖춘 모습에 두 사람 모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지만 박선희는 다소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많이 비쌀 텐데. 괜찮은 거야?”

오한결이 박선희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엄마, 제발 돈 걱정은 마세요. 이번 캠핑은 무조건 즐기기만 하세요. 네?”

촉촉해진 눈으로 박선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 모두 아늑한 카라반에서 잠시 쉰다고 생각했는데, 피곤했는지 잠이 들어버렸다. 깨어나 보니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모두 침대와 바닥에 편하게 누운 채로 황홀한 창밖 붉은 하늘과 풍경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오한수가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정말 평화로운 하루네. 사람은 이렇게 자연 속에 있어야 한다니까.”

오한결이 오한수의 머리를 흐트러트렸다.

“이 자식아! 애늙은이 같은 말 좀 그만해라.”

“으악, 내 머리! 진짜로! 요즘 들어 꼰대가 된 사람이 누군데!”

두 아들의 재롱에 흐뭇하게 웃던 오준근이 부엌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 네 잔을 가지고 왔다.

“캠핑하면 굉장히 번거로울 줄 알았는데, 너무 편해서 이상할 정도야.”

박선희가 방긋 웃으며 말을 보탰다.

“그러게요. 연예인들이 멋진 차에서 캠핑하던데. 우리가 그걸 해보네요.”

오한결이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뭐, 그 정도까지는 아닌데. 민망하네. 하하.”

그들은 따스한 시선으로 강렬하게 불타는 저녁노을을 바라봤다. 이렇게 지금이 행복한 이유는 가족이 곁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오한결은 생각했다.

‘이제 시작이다.’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자연의 향기를 품고 오한결 가족이 있는 카라반으로 스며들어왔다. 오한결은 기분좋게 배를 문지르며 말했다.

“이제 슬슬 저녁 먹을까요?”

오한수가 소리쳤다.

“앗싸! 고기 파티!!”

* * *

숯불에 지글지글 익어가는 고기를 넋 놓고 바라보던 오한수가 침을 꿀꺽 삼켰다.

“오호~ 냄새 봐라. 기가 막히네.”

주위에 아무도 없자 슬쩍 고기 한 점을 입에 넣고는 오물오물 씹는다.

‘육즙 대박!’

박선희는 카라반 부엌에서 김치찌개를 보글보글 끓이고 있고 오준근은 그 옆에서 실력발휘를 해보겠다며, 삼겹살에 고추장 양념을 듬뿍 바르는 중이다.

“여보, 양념 삼겹살은 겉에만 탈 수 있어서 구울 때 조심해야 해요.”

“……그런가. 오늘 같은 날에는 탄 음식도 괜찮아!”

박선희가 오준근의 등짝을 찰싹 때렸다.

“어머! 얘들 먹일 건데. 못하는 소리가 없어.”

“……그렇지. 신경 쓸게. 미안해, 여보.”

“그나저나 한결이가 안 보이네요?”

오준근이 삼겹살에 고추장을 더 추가하고는 조물조물 주무르며 대답했다.

“아까 보니까 뭔가를 잔뜩 들고 차 뒤편으로 가더라고.”

박선희가 눈을 크게 뜨고 소리쳤다.

“여보!! 고추장 범벅으로 만들면 어떡해요! 내가 미쳐!”

카라반 뒤편 공터에 야외용 스크린을 설치하는 오한결. 큰마음 먹고 최신형 빔프로젝터를 거금을 들여 구매했다. 이젠 가족들하고 자주 캠핑 올 거니까. 이참에 캠핑 마니아 좀 돼 볼까, 하는 욕심도 있었다.

입체 사운드 스피커까지 블루투스로 연결하고 나니 꽤 그럴듯한 야외 영화관 느낌이 났다.

‘이 정도면 훌륭하지.’

영화를 찾는 오한결. 국내외 영화 플랫폼을 다 뒤져도 딱히 끌리는 영화를 발견하지 못했다. 감동적이고 특별한 영화면 좋겠는데…….

오한결이 고민 끝에 단체 대화방에 접속했다.

「오한결: 안녕! 친구들」

「노을: 어머! 오한결 작가님~~ 웬일이야 먼저 연락도 다 주고!」

「최무열: 작가 형님!! 존경! 아니, 무조건 충성!」

「오한결: 뭐야, 부담스럽게…….」

「노을: 무열이가 벽화보고 잠을 못 잤대. 진짜 예술이 뭔지 이제 깨달았다고. 호호.」

「최무열: 예술적 충격이라고 할까. 미술관에서도 느껴본 적 없는데.」

「노을: 사실, 나도 감동해서 잠이 안 왔어. 호호.」

피식 웃음을 짓는 오한결.

‘귀엽네, 다들.’

「오한결: 똑. 똑. 내 얘기 좀 들어줄래요?」

「노을: 이런, 용건이 있는 거 같은데. 우리가 눈치 없이 굴었네.」

「오한결: 하하. 다름이 아니라, 오늘 가족하고 캠핑왔는데.」

「노을: 대박!! 좋겠다. 부럽당.」

「최무열: 끼약! 나도 캠핑 가고 싶다. 캠핑! 캠핑!」

오한결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채팅창에 텍스트를 마저 입력했다.

「오한결: 아……. 아무튼, 저녁에 영화를 보려고 하는데, 마땅한 게 없네. 추천 좀 받을까 해서.」

「노을: 음, 가족끼리 갔다면 잔잔한 영화는 어때?」

「최무열: 무슨 소리. 액션 아니면 코미디지.」

「오한결: 그런가? 특별한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말이야.」

「노을: 부모님의 추억을 상기시키는 영화는 어떨까?」

오한결이 환하게 웃었다.

부모님의 추억이라니. 특별하고도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 같았다. 그들의 만남도 남녀의 아름다운 사랑의 결실 아닌가. 부모님의 로맨틱한 삶의 흔적을 진지하게 추적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한결: 너무 좋은데. 고맙다.」

「노을: 좋겠다. 가족끼리 캠핑도 가고.」

「최무열: 우리도 한 번 가자고. 난 언제든 오케이.」

「노을: 난 무조건 찬성!」

「오한결: 그래, ……그러자.」

단체 채팅을 마친 오한결이 진지한 고민의 시간을 가진 뒤 휴대폰을 켜고 영화 플랫폼을 뒤지기 시작했다.

‘아, 찾았다!’

때마침 근처에서 오한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 어딨어. 밥 먹어!! 아니, 고기 먹어!!”

“알았어. 바로 갈게!!”

오한결이 흐뭇한 미소로 영화를 선택하고는 상단에 ‘찜’ 버튼을 꾹 눌렀다.

* * *

“한수야, 천천히 먹어라.”

“엄마, 오늘은 잔소리 사절이야. 배고파서 아사 직전이었다고.”

오한수가 입속에 소고기를 가득 욱여넣자 오한결이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안 뺏어 먹을 테니까. 고기 좀 씹고 삼켜라.”

완전한 어둠이 찾아오자 싸늘한 밤공기가 캠핑장을 스쳐 갔다. 박선희가 추운지 몸을 움츠리자 오한결이 담요를 가져와 박선희 어깨에 살포시 얹어주었다.

“추워요, 엄마. 이거 덮으세요.”

“고맙다, 아들.”

오한수가 입안 가득 고기를 씹으며 말했다.

“뭐지, 안 하던 효자 코스프레하네.”

“그래, 코스프레다. 너도 흉내라도 내봐라.”

미소를 잔뜩 머금고 오한결이 불판 위 고기를 뒤집자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연기가 피어올랐다. 민망해진 오한수가 사레가 들렸는지 연달아 기침하자 박선희가 급히 물컵을 오한수에게 건넸다.

“천천히 먹으라고 했잖아!”

끊이지 않는 웃음소리와 함께 소고기를 다 먹고 나자, 오준근이 팔을 걷어붙였다.

“이제 내 솜씨를 보여줄 차례군.”

몹시 오랜만에 보는 아버지의 발랄한 모습에 가족 모두 환한 미소를 지었다.

오한결이 맥주를 나눠주며 말했다.

“식사 마치고 영화 볼 거예요.”

“오, 기대되는구나. 무슨 영화지?”

“일단 비밀! 깜짝 놀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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