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푸른 밤
커다란 원형 테이블에 오한결과 김일중 그리고 카페 사장들이 어색한 침묵을 지키며 앉아 있다. 카페 사장들의 시선은 모두 오한결을 향했다.
베레모를 쓴 남자가 말했다.
“이야, 생각보다 더 젊은 청년이구먼. 20대 중반 됐을까? 아들뻘 되겠어.”
옆에 앉은 남자가 대답했다.
“이 사람아, 여기서 나이 얘기를 왜 하나? 실례일세.”
“오해하지 말게. 부러워서 그래. 아들놈도 저렇게 멋지게 살면 얼마나 좋아. 그놈의 자식은 맨날 놀러 다니기 바빠. 무슨 ‘소확행’인가 한다지. 돈은 부모가 벌고 아들은 그 돈으로 행복을 찾겠다는데. 씁쓸하네.”
“음……. 용돈을 끊어봐.”
“오호, 그래 볼까?”
때마침 문이 열리고 붉은 앞치마를 입은 여자가 양손에 커피를 잔뜩 들고 들어왔다.
“어머나, 다들 모였네요. 이거 우리 가게 신제품인데. 한 잔씩 마시면서 회의하죠.”
베레모를 쓴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이번 프로젝트는 정부 보조금이 투입되기에 파주시청 문화정책과에서 사업 전반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원래는 공개입찰이 원칙이나, 카페 사장들은 일단 김일중 사장에게 작품을 부탁하기로 했습니다.”
김일중 사장이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네? 처음 듣는 얘긴데요. 그러다가, 문제가 생기면요? 사업비 안 나오면 어떻게 합니까? 원칙대로 공개입찰하세요. 화신벽화는 자신 있습니다.”
오한결이 사장들의 얼굴을 살폈더니, 공개입찰을 꺼리고 있는 표정이 역력해 보였다. 공무원에 대한 불신인 건가……. 아니면 투명하지 않은 입찰 시스템 때문인가?
오한결이 카페 사장들에게 말했다.
“우린 그림만 그려라? 어쨌든 사장님들은 자신 있다는 말이죠?”
붉은 앞치마를 두른 여자가 말했다.
“청년이 말을 시원하게 잘하네. 돈 문제는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가 알아서 합니다. 화신벽화는 작품만 잘 만들어주시면 돼요. 꼭 그래야만 합니다. 김일중 사장님이 약속했거든요. 우리 중 누구라도 작품을 싫어하면 돈을 안 받겠다고요. 그렇죠? 김일중 사장님?”
김일중이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 그렇게 대답하긴 했는데. 근데…….”
궁지에 몰린 김일중을 씁쓸하게 바라보던 오한결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렇다면 화신벽화도 요청할 게 하나 있습니다만.”
오한결의 당찬 모습에 카페 사장들이 내심 불안감을 느끼며 눈치를 살폈다. 붉은 앞치마를 두른 여자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음, 일단 말해보세요.”
“벽화 제작비로 4억을 요구합니다.”
“!!”
베레모를 쓴 남자가 언짢게 말했다.
“무슨 소립니까! 우린 이미 3억을 제시했고 김일중 사장도 수락했습니다. 그리고 3억도 상당히 많다고 생각하는데요.”
“정말 그럴까요? 생각이 곧 바뀔 것 같습니다만.”
오한결이 눈짓하자 김일중 사장이 밖에서 작품 두 점을 들고 들어왔다.
포장을 풀고 회의실 한쪽 벽에 작품을 전시하자, 카페 사장들이 탄성을 질렀다.
“와! 저 그림들은 뭡니까?”
김일중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하나는 추상작품으로 <균형과 기울기 그리고 색채>. 다른 하나는 빛의 그림인 <홍철수, 홍미숙>입니다. 모두 오한결 작가님이 그렸어요.”
구석에 앉은 노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이, 이럴 수가……. 몬드리안과 렘브란트의 작품이잖아. 아이고, 내가 헛것을 보고 있는 건가? 정말 직접 그렸다고?”
노인의 말에 카페 사장들이 웅성거리며 혼란에 빠진 듯 보였다.
잠시 뒤 오한결이 말했다.
“사장님들 모두 제가 그린 이집트 미술을 봤을 겁니다. 소문을 들으니, 작품을 보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 덕에 매출이 많이 올랐다고 하던데요. 하나 묻죠. 여러분이 생각하는 예술은 뭔가요?”
“…….”
“단순히 관광객을 끌어들이기 위한 것인가요? 그래서 벽화를 제작하려고 했습니까? 진짜 예술품은 그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 가야 하는 법입니다. 정부 예산을 투입해서 멋진 작품을 제작하고자 마음은 이해하나, 사장님들이 기대하는 작품은 딱 그 정도 수준입니까?”
카페 사장들이 서로의 눈치를 살피자 오한결이 말을 이었다.
“제가 그린 두 점의 그림을 봐 주세요. ‘파주 카페 거리’를 빛낼 벽화 작품도 저렇게 그려 드릴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진정한 예술 작품으로요.”
갑자기 웅성거리기 시작하는 회의장. 카페 사장들이 짧은 토론을 마친 뒤 말했다.
“우리는 화신벽화가 1억 원을 더 요청하는 이유를 납득할 수 없습니다. 돈을 더 받고 싶어서 그런 거라면 진정한 예술에 대해 떠드는 자신이 부끄럽지 않습니까? 모순된 행동에 몹시 실망스럽군요.”
오한결이 카페 사장들의 시선을 모두 받아내며 대답했다.
“그 1억 원, 기부할 겁니다. 여러분들이 제작하는 예술 작품이 세상을 밝히는데, 조금이나마 일조할 수 있도록 말이죠.”
“!!”
깜짝 놀란 김일중이 낮게 읊조렸다.
“뭐 하는 거야!! 사장인 나와 먼저 상의했어야지!”
“사장님께 드리는 선물이에요. 화신벽화 이름으로 기부할 겁니다. 잊지 마세요. <균형과 기울기 그리고 색채>에서 표현한 그 어떤 ‘본질’을요. 제가 생각하는 예술의 본질은 ‘인간성 회복’입니다.”
“…….”
잠시 밖에서 열띤 토론을 마친 카페 사장들이 회의실로 들어왔다.
“좋습니다. 어떻게든 1억을 마련해보도록 하지요. 우리는 젊은 작가님의 패기가 무척 마음에 드는군요. 기대가 아주 큽니다.”
* * *
며칠 뒤, ‘파주 카페 거리’ 입구.
어둠이 오기 전, 붉은 해가 마지막 강렬한 빛으로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팔짱을 낀 오한결이 심오한 표정으로 벽면을 바라보고 있고, 노을과 최무열은 분주하게 벽화 재료를 세팅 중이다.
노을이 땀을 닦으며 물었다.
“사장님은 왜 안 오시지?”
오한결이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내가 오지 말라고 했어. 지금 너무 흥분하고 계시거든. 그림 그리는 과정을 보면 더 흥분해서 기절할지도 몰라. 사장님을 보호해야지.”
“대박……. 넘 멋진데…….”
최무열이 슬쩍 물었다.
“정말로 1억을 기부하는 거예요?”
“기부하자고 사장님께 요청은 했어. 이제 사장님 스스로 양심의 무게에 따라 행동하겠지.”
“와우. 양심의 무게라……. ‘사자의 서’에서 심장의 무게를 저울에 달았던 것처럼요? 사장님의 양심의 무게가 과연 저울을 통과할 수 있을까요. 하하.”
“두고 봐야지. 하지만 난 김일중 사장님을 믿기로 했어.”
“과연 사장님이 통과할 수 있을까…….”
“우리 사장님 머리 터지겠다…….”
어느덧, 노을과 최무열 덕분에 벽화 그리기 준비가 모두 끝났다. 이제 해는 완전히 저물어 어둠이 찾아왔고, 가로등 불빛만이 카페 거리를 포근히 감싸고 있다.
붓은 든 오한결이 눈을 지그시 감고는 생각에 잠겼다.
빈센트 반고흐의 시선에서 ‘파주 카페거리’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고흐는 19세기 말에 작품활동을 했다. 그 당시 화가들은 보이는 그대로가 아닌 대상을 보고 느낀 주관적 감정을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개인의 주관적 감정을 개성 있는 형태와 독자적인 색채로 표현해야 한다.
서서히 눈을 뜨는 오한결.
때마침 최무열이 설치한 조명에서 번쩍하고 불이 들어왔다.
최무열이 물었다.
“왜 저녁에 그림을 그려요? 낮에 그리면 편할 텐데.”
“반고흐는 어둠이 짙게 깔린 밤에 작업하기를 즐겼어. 그가 그리는 야외 밤 풍경은 무척이나 아름답잖아. 반고흐처럼 나도 밤의 카페 풍경을 그리고 싶거든.”
‘파주 카페 거리’를 눈에 담기 시작하는 오한결.
고도의 집중력이 발휘되는데. 그 모습을 본 노을과 최무열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카페거리 양옆으로 가로등 빛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고 노천카페에 삼삼오오 앉은 사람들이 즐겁게 웃고 있다.
반고흐라면 ‘파주 카페 거리’를 어떻게 보았을까?
오한결이 고개를 들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반짝반짝 별이 빛나는 파주의 밤이라…….
반고흐에게 밤하늘이란, 단순히 검은색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자.
오한결이 어두운 밤하늘을 오랫동안 응시하자 색이 변하기 시작한다.
점점 깊은 어둠 사이로 격렬하게 울렁이는 파란색과 보라색 그리고 초록색.
그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다채로운 푸른 밤하늘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래! 반고흐의 눈에 비친 ‘밤하늘’은 이랬을 거야.’
잠시 뒤, 저 멀리 노란 별들이 보석처럼 반짝였다.
이제 보이는구나.
‘별이 빛나는 푸른 밤하늘’
너무 멋진데!
오한결은 파주의 밤하늘을 반고흐의 시선에서 그리기 시작한다.
노을과 최무열은 그의 모습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마치 딴 사람 같잖아. 무서울 정도인데!”
오한결은 조명으로 밝게 빛나는 카페 차양을 바라봤다.
그의 눈에는 온통 레몬 빛깔의 노란색이 카페를 집어삼키듯 빛나 보였다.
‘테라스 조명에서 빛나는 황금색 빛.’
밤하늘의 파란색과 차양의 노란색이 강렬하게 대조를 이룬다.
오한결은 잠시 숨을 고른 뒤 생각했다.
‘반고흐 당신의 눈에 비친 세상은 이렇게 아름다웠군요. 당신이 표현하고자 했던 형태와 색을 온전히 내가 재현해볼게요.’
‘사진처럼 정교하게 그린 그림은 진정한 회화가 아니다!’
‘반고흐처럼 원근법을 지킬 필요는 없다. 대충 그은 형태의 외곽선은 2차원 회화의 맛을 살려준다.’
오한결이 중얼거렸다.
‘보이는 색채나 형태에 종속되지 않고, 내가 대상에 느끼는 감정을 솔직하게 그려내야 해.’
노을이 어리둥절하며 말했다.
“와, 물감을 엄청 두껍게 바르네. 마치 그 모습이 일렁이는 불꽃 같다고 할까.”
안경을 살짝 고쳐 쓴 최무열이 대답했다.
“임패스토 기법이라는 건데, 물감을 두껍게 칠해서 입체적인 질감을 표현하는 거지. 반 고흐의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어. 그의 그림이 강렬한 느낌을 주는 이유이기도 해.”
신중하게 작업을 이어가는 오한결.
벽화 작업 주위로 구경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오한결의 우아한 손동작에 그려지는 벽화를 넋 놓고 바라보고 있다.
사람들이 주변에서 웅성거려도, 오한결은 어떤 소음도 듣지 못한다. 오로지 그림에 자신의 영혼을 깊게 파묻고 있을 뿐이다.
오한결이 엄청난 양의 물감을 사용하자, 노을과 최무열이 분주하게 물감을 나르고 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세 시간이 지났다.
오한결은 지친 기색 없이 여전히 그림 그리기에 푹 빠져 있다.
노을이 말했다.
“너무 아름답다. 그림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아. 어떻게 같은 색이 모두 다른 느낌을 주고 있지? 비슷한 색의 물감을 덧칠해서 그런 건가?”
이제, 밤 11시를 넘어서고 있다.
카페들이 하나둘 문을 닫자, 사람들도 일제히 떠나기 시작한다.
오한결도 막바지에 돌입했다. 상당한 집중력을 발휘하여 정교한 붓질을 끝내자 자신도 모르게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드디어 <파주 카페 거리> 벽화를 완성했다!”
노을과 최무열이 기다렸다는 듯 달려와 그림 앞에 섰다.
“대박!!! 저 질감과 색감을 봐. 반고흐 원작과 비교해도 손색없겠는걸.”
최무열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형 정말 정체가 뭐야? 이거 말이 돼? 나 너무 감동했어…….”
오한결이 손을 배에 올리고 피식 웃었다.
“그나저나 먹을 거 없어? 배고파 죽을 거 같아.”
“빵 남은 게 어딨더라…….”
“무열아, 미안한데, 먹을 것 좀 사다 줄래. 배고파서 쓰러지겠어.”
고개를 끄덕인 최무열이 근처 편의점으로 달려갔다.
노을이 오한결에게 다가왔다.
“믿을 수가 없어. 어떻게 이렇게 그리지?. 혹시 초능력 있어요?”
“그게 무슨…….”
손가락으로 벽화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게 말이 돼? 어떻게 저렇게 그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