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충해도 완벽한 예술 천재-6화 (6/202)

제6화 예술가의 흔적

늦은 밤. 삼각지 화랑거리 상점 불들이 하나둘씩 꺼져 가고 골목에 묵직한 어둠이 찾아왔다. 늦게까지 일한 홍철수 사장도 장사를 마무리하고 아트화랑 간판을 끄려고 하는데, 갑자기 가게 문이 벌컥 열리더니 얼굴이 벌게진 남자가 들어왔다.

당황한 홍철수 사장이 손에 들린 화구를 내려놓았다.

“김 사장 아닌가?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혹시……. 술 마셨나?”

김일중이 휘청거리며 들어왔다.

“형님. 밤늦게 죄송합니다. 조금 마셨습니다.”

미간에 잔뜩 주름잡은 홍철수가 말했다.

“음, 일단 들어와 앉게나.”

김일중이 테이블에 털썩 주저앉자, 홍미숙이 다가와 물었다.

“어머, 오빠. 무슨 일 있어요?”

김일중이 마른세수를 하고 대답했다.

“형님하고 얘기 좀 할까 해서 왔는데. 내가 민폐를 끼친 것 같군.”

물건 정리를 마친 홍철수가 김일중 앞에 앉고는 그를 빤히 쳐다봤다.

“대체 무슨 일인데, 이렇게 늦은 시간에 불쑥 찾아온 건가? 벽화 작업 때문에 그런 건가?”

김일중이 헤벌레 웃으며 대답했다.

“역시, 형님은 눈치가 엄청 빠르셔. 이번에 파주시에서 문화산업 예산이 편성됐는데, 벽화 제작 항목이 생기면서 자그마치 3억이나 추가됐어요. 단기 사업으로 그 정도면 꽤 큰 금액이죠.”

홍철수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왜 표정이 어두운 거지? 김 사장한테는 기회 아닌가?”

“아시다시피, 화신벽화는 소규모 벽화 작업만 해왔잖아요. 대충 사진 보고 비슷하게 그리면 됐는데, 이번엔 달라요. 그들은 진짜 예술 작품을 원한다고요. 그래서…….”

머뭇거리는 김일중 대신 홍철수가 말했다.

“그럼 실력 있는 작가가 필요하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자네가 그 벽화 작업을 한결 학생에게 부탁한 건가?”

“맞아요. 형님! 그들이 원하는 진짜 예술을 누가 할 수 있겠어요. 오직 오한결밖에 없죠.”

홍미숙이 김일중 옆에 앉고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서 한결 학생이 하겠대요?”

김일중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해준대. 근데…….”

홍미숙이 미소지었다.

“조건이 붙었군요.”

김일중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9대 1로 하자고 하네. 한결 작가가 9로 하고 싶다고…….”

“……하하하. 한결 학생 제법인데.”

갑작스레 홍철수가 웃음을 터트리자, 홍미숙도 따라서 웃었다.

어안이벙벙한 김일중이 물었다.

“왜 웃으시죠? 나는 심각한데…….”

홍철수가 단호하게 말했다.

“욕심을 버리게. 그럼 다 해결될 걸세.”

“…….”

“솔직히, 한결 학생이 무슨 제안을 하든, 자네가 거절할 수가 있나?”

“……없죠. 한결 작가님은 워낙 뛰어난 실력자니까요.”

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져 휴대폰을 꺼낸 김일중이 뭔가를 열심히 찾는다.

“이것 보세요. 오한결 작가가 또 해냈어요.”

휴대폰 화면에 오한결이 완성한 ‘사자의 서’가 보였다.

김일중이 손가락을 움직여 이미지를 확대하며 말했다.

“굉장하지 않나요? 어떻게 이런 작품을 그릴 수 있죠?”

홍철수가 사진을 자세히 보더니 혼자 중얼거렸다.

“정말 내가 알던 한결 학생이 맞는 걸까. 그동안 왜 이런 엄청난 능력을 숨겼던 거지?”

홍미숙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보탰다.

“분명히 달라졌어요. 언제나 풀이 죽은 채 안쓰럽게 다니던 학생이었는데. 고생 끝에 미국에 취업했다고 수줍게 말을 건네던 학생이 갑자기 이런 대단한 실력자가 되어 나타났잖아요.”

홍철수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우리가 한결 학생의 작품을 본 적은 없었잖아. 원래 뛰어난 실력자였을 수도 있어. 단지 우리에게 말을 하지 않은 것일 수도……. 그리고 미국에 가지 않은 건 분명한 이유가 있을 거야. 갈 필요가 없었겠지. 그런 실력자가 왜 미국에 취업하겠어.”

“그래도 석연치 않은 점이 너무 많아요…….”

김일중은 오로지 자신의 문제에만 관심 있을 뿐, 홍철수와 홍미숙의 대화에 집중하지 않다가 말했다.

“한결 작가님의 제안에 문제가 있지 않나요? 전 겨우 3천만 원 밖에 못 챙긴다고요.”

굳은 표정의 홍철수가 김일중을 빤히 쳐다봤다.

“아직도 욕심을 못 버렸군, 겨우 3천만 원? 평소 월 2백도 힘들지 않았나?”

“……그건, 그런데. 정말 모르시겠어요? 이래 봬도 전 회사 대표예요. 3억짜리 프로젝트에서 대표에게 떨어지는 돈이 겨우 3천만 원이라는 게 말이 됩니까?”

홍미숙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일중 오빠! 한결 학생이 없으면, 그 3천만 원도 못 벌잖아. 욕심을 버려요.”

“…….”

홍철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정리하며 말했다.

“자네도 미술을 전공하지 않았나? 오한결 학생은 명작에 준하는, 아니 그 이상의 압도적 수준의 작품을 해내고 있어.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겠지?”

“…….”

김일중은 홍철수의 말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말이 모두 옳으니까. 오한결은 천재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을 만큼, 위대한 예술성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런 진짜 예술가를 우리가 어떻게 대접해야 하는지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한결 학생의 가치를 인정해주게. 그렇다면 그 3억도 한참 부족할지도 모르지.”

생각에 빠진 김일중을 지그시 바라보던 홍철수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아쉽나? 그럼 자네가 직접 그린다고 말하게. 간단하지?”

“그건…….”

“3천만 원도 꽤 큰 금액이야, 김 사장.”

김일중이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더니, 잠시 뒤 달라진 눈빛으로 나지막이 대답했다.

“……형님,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돈을 벌고 싶은 욕심에 오한결 작가에게 무례를 범할 뻔했네요. 작가님이 원하는 대로 할게요. 그게 맞는 것 같아요.”

홍철수가 김일중의 어깨에 손을 살포시 올렸다.

“그래, 잘 생각했네. 이제 집에 가서 좀 쉬게나.”

“여기서 맥주 한 잔 더해도 될까요? 이대로 가긴 아쉽네요.”

“그, 그럴래?……. 맥주가 있나 모르겠네……. 없을 거 같은데…….”

* * *

이른 아침, 조깅을 하기 위해 한강공원에 나온 오한결.

가벼운 운동복 차림의 사람들이 공원 곳곳에서 몸을 풀고 있다.

스트레칭을 마친 오한결이 뛸 준비를 하는데,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

띠링, 띠링.

‘김진영 선배!’

오한결의 대학교 선배인 김진영.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작은 식당을 열고 오한결을 불러들였다. 아메리칸 드림을 거론하면서……. 취업난을 겪던 오한결은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미국으로 건너간 오한결은 갖은 고생 끝에 천재 예술가가 되었다.

진영 선배는 오한결에게 약속과 다르게 비위생적인 주거지를 제공했고 임금도 떼어먹기 일쑤였다. 따지고 보면, 진영 선배가 오한결을 천재 예술가로 만들어 준 게 아니기에 빚진 마음도 별로 없었다.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오한결이 전화를 받았다.

“선배, 안녕하세요.”

김진영 선배가 친근하게 대답했다.

[안녕, 한결. 짐은 다 쌌고? 다음 주면 미국에서 보겠네.」

“마침 잘됐네요. 연락드리려고 했는데, 이번에 미국은 힘들 것 같아요. 죄송해요.”

잠시 머뭇거린 김진영이 언짢은 말투로 말했다.

[……뭐야. 취업하기 힘들다고 해서 기회를 준 건데. 대체 왜 그래?」

오한결이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다.

“숙소가 깨끗하고 조용하지 않으면 제가 예민해서 잠을 못 자거든요.”

[내가 걱정하지 말라고 했잖아. 식당 근처에 좋은 숙소를 이미 구했단 말이야. 워낙 좋은 곳이라 내가 방 구하는데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선배의 고생을 이렇게 무시해도 되는 거야?」

오한결은 그가 머물렀던 숙소를 떠올려 봤다.

좁아터진 원룸에 곰팡내가 풀풀 풍겨 매콤한 냄새가 진동했던 곳.

밤낮없이 들려오는 생활 소음과 힙합 음악 때문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던 그곳.

오한결이 인상을 구기며 대꾸했다.

“그래요? 인터넷 찾아보니까, 선배가 말한 숙소는 무척 더럽고 시끄럽다고 하던데. 이상하다……. 인터넷이 잘 못 됐나.”

[……그, 그건 오해야. 한결아, 여긴 뉴욕이야. 너도 알잖아. 전 세계에서 가장 멋지고 핫한 도시 아니냐. 이곳에서 나랑 같이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하자니까.」

오한결이 노골적으로 말했다.

“선배 가게에서 아메리칸 드림? 왠지 월급도 제때 못 받고 죽도록 고생만 할 것 같은데요. 차라리 노예를 구한다고 하세요.”

김진영이 말을 더듬거리며 말했다.

[……한, 한결이가 오해를 하고 있구나. 물론 식당이 어렵긴 한데, 그렇다고 돈을 안 주고 그러진 않아.」

“이상하다, 못 받을 것 같은 이 강한 느낌은 뭘까요?”

김진영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만약 미국에 안 오면 넌 반드시 후회할 거야!」

“글쎄요. 어쨌든, 약속 못 지켜 미안하게 됐어요. 난 한국에서 예술가로 살아 보려고요.”

[한결아, 우리 같은 지방대 출신들이 무슨 예술이냐. 그러지 말고 지금이라도 미국에 와라. 내가 부탁한다.」

“선배, 제가 뉴욕에서 깨달은 게 하나 있다면 진정한 예술가는 조건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거예요.”

[뭐래, ……너 뉴욕에 왔었어?」

“……아니, ……뭐, 가야죠. 나중에…….”

[야!! 장난해? 갑자기 무슨 예술 타령인데? 취업 안 된다며. 미국으로 오라니까! 이렇게 사람 성의를 무시해도 되는 거냐!」

“미안해요, 선배. 대신 형에게 소개해줄 사람이 있어요. 타임스퀘어에 가면 황금색으로 온몸을 칠한 행위 예술가가 있을 거예요. 그 사람을 찾아가 보세요.”

[갑자기 뚱딴지같은 소리야?」

“형도 미대 나왔잖아요. 또 모르죠, 예술적 영감을 받고 인생이 달라질지.”

[됐다, 오한결. 마음 바뀌면 바로 전화 줘. 그리고 비행기 표는 내가 취소할게.」

“아, 잊을 뻔했네요. 눈썹에 피어싱 잔뜩 한 진상 손님 좀 받지 마세요. 그리고 손님들한테 너무 굽신대지도 마시고요.”

[어라, 그 손님을 네가 어떻게 알아? 진짜로 너 우리 가게 와 봤냐?」

“그럼, 행운을 빌게요.”

전화를 끊은 오한결이 밝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제 진짜 새로운 시작이다.’

오한결이 사람들을 따라 한강공원을 달리기 시작했다.

* * *

어느 화창한 오후, ‘파주 카페 거리’ 광장에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다. 그들은 분수대 앞에서 탄성을 지르며 열심히 기념사진을 찍어대고 있었다.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가 힘겹게 허리를 굽히고는 골똘히 벽화를 살핀다.

‘굉장하군. 마치 수백 년 전 유물처럼 세월의 흔적까지 그대로 재연했어. 이게 가능한가?’

긴 머리 여학생이 헐레벌떡 뛰어와 할아버지께 인사를 건넸다.

“교수님, 늦었습니다.”

교수는 시선을 벽화에 고정한 채 여학생에게 말했다.

“이것 좀 보게나, 소문이 사실이었어.”

여학생은 교수 근처로 다가가 오한결의 ‘사자의 서’ 작품을 바라봤다. SNS에 올라온 사진도 대단해 보였지만, 막상 실물로 보니 엄청난 작품이란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여학생의 눈에는 이집트인들의 영혼이 깃든 유물 그 자체로 보였다.

“와! 쩐다. 이건 뭐죠. 진짜 이집트 문명이 이곳에 있었나요?”

교수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싱거운 농담은 사절일세.”

“죄송합니다…….”

교수가 휴대폰으로 벽화를 촬영하며 말했다.

“그나저나, 보면 볼수록 신기하네.”

“학계에 보고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학계는 무슨. 이게 진짜 이집트 작품은 아니지 않은가. 누군가가 상당한 그림 솜씨를 뽐낸 것뿐. 문제는 너무 정교하게 잘 그려서 이 자체만으로도 상당한 예술적 가치가 있어 보인다는 점이야. 그 말은 단순한 모조품이 아니라 독자적 작품이라는 거지.”

“맞아요. 누가 장난으로 시카고 대학교 연구팀에 이 벽화 사진을 보냈거든요. 거기서 실제 이집트 미술이라고 확인해줬는데, 나중에 대한민국 파주 분수대에 그려진 벽화라는 사실이 알려지고 엄청 망신을 당했잖아요. 완전 개그 아닌가요? 하하.”

“그 얘기는 나도 들었네. 충분히 오해할 수 있어. 그 사람들 잘못이 아니야.”

“뭐, 재밌는 해프닝이죠. 근데 교수님은 역사적 가치가 없는 이 그림에 관심이 많으시네요.”

“호기심이지. 오랜만에 무척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다고 할까.”

“소문에 의하면 그림을 그린 건 젊은 남자였다고 하더라고요. 상당히 훈남이었다고 하던데…….”

“오호! 젊은이라고?”

여학생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제가 수소문해볼까요?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이 정도 능력자라면, 예술계가 곧 주목할 거야.”

“설마, 은둔형 고수는 아니겠죠?”

“만약 그렇다면, 이렇게 공공장소에 실력을 뽐내지 않았겠지. 이것은 일종의 신호 같아.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오, 엄청 기대돼요.”

“일단, 사람들이 계속 몰려오니까, 자리를 비켜주자고.”

“오다가 보니까, 예쁜 카페들이 많던데요. 커피 드시러 가시죠, 교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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