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사자의 서
오한결이 소매를 걷으며 살짝 미소지었다.
“사후세계 안내서를 보여줄게요!”
한껏 들뜬 노을과 최무열.
오한결이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와우……. 사후세계라니, 등골이 오싹해지네.”
오한결이 벽에 붓을 대고 나지막이 말했다.
“자, 봐요. 딱 한 번만 보여줄 테니까!”
천천히 그러나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붓을 놀리는 오한결. 최무열의 눈에는 그 모습이 마치 고대 이집트인이 자신의 역사를 벽에 새기는 것처럼 자연스러워 보였다.
‘이 사람, 정체가 뭐지…….’
오한결이 두 사람을 등지고 말했다.
“제가 지금부터 그릴 그림은 ‘사자의 서’예요. 이집트인들이 미라와 함께 묻은 지하 세계의 안내서죠. 죽은 자들이 안전하게 다음 세계에 도착하길 바라는 기도문이자 마법 주문, 신들에 대한 서약이라고 알려져 있죠.”
이집트 미술의 법칙에 따라 인물들을 하나씩 그려가는 오한결.
얼굴은 옆으로, 상체는 정면으로, 발은 측면을 그린다.
최무열이 오한결의 그림 솜씨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물었다.
“흰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죽은 자들인가요? 어딘가로 끌려가는 것처럼 보여요.”
“네, 맞아요. 죽은 자들은 심판을 받게 되죠. 그림을 보면 당시 이집트인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내세관을 고스란히 알 수 있어요. 잠시만요.”
오한결이 재빨리 몇몇 인물을 그려냈다.
“잘 보세요. 재판관 오시리스가 배심원을 이끌고 재판을 하는 과정입니다. 검사인 호루스 신, 서기관 토트 신, 안내자이자 저울을 다는 아누비스 신 그리고 죽은 자가 죄를 저질렀다고 판명될 경우 벌을 주는 아뮤트 신들이 모여 재판을 진행하고 있죠.”
노을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저울 앞에 동물처럼 생긴 게 아뮤트 신인가요?”
“맞아요. 악어 머리에 사자의 갈기, 하마의 다리를 갖고 있죠.”
노을이 손가락으로 저울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기 저울 위에 올려진 건 뭐죠……? 설마…….”
“죽은 자의 심장!”
“!!”
“심판과정은 단순합니다. 죽은 자의 심장이 깃털보다 무거우면 죄가 많다고 판정했어요.”
“……그러면 어떻게 되는데요?”
“아뮤트 신이 죽은 자의 심장을 먹어버리죠.”
“!!”
“착한 사람은 아시리스 왕국에서 영원한 삶을 약속받고 부활의 자격도 얻게 되죠. 근데, 영혼이 부활하기 위해선 조건이 있어요. 부패하지 않은 온전한 육체가 필요했거든요. 그래서 이집트인들이 미라를 제작한 거예요.”
홀린 듯 최무열이 중얼거렸다.
“맞아요, 이제야 기억나요. 그들은 영혼과 육체가 분리된다고 믿었다고…….”
그림을 마무리한 오한결이 기지개를 켜며 대답했다.
“죽은 자들의 길잡이 역할과 그들이 만날 신들을 달래는 것이 ‘사자의 서’의 목적이었죠. 어때요? 이집트 미술에 대해 개념이 좀 생겼나요?”
한동안 노을과 최무열은 말없이 ‘사자의 서’만 바라봤다.
분수대 하단에 방금 그린 이집트 기록물은 오한결의 손에서 부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꿈을 꾼 듯 황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노을이 겨우 말문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통성명도 안 했네요. 저는 노을이고 이 친구는 최무열이에요.”
오한결이 장난스레 대답했다.
“알바하러 온 오한결입니다.”
노을이 빙긋 웃어 보였다.
“평범한 알바생은 절대 아닌 것 같은데요. 한결 씨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사람 같아요. 뭐랄까, 마법사?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이렇게 정교하게 그림을 그리죠? 전 완전 팬이 됐어요.”
최무열이 슬쩍 끼어들었다.
“나도 완전 팬 됐음. 근데 아까 누나가 한결 형 무시하지 않았어?”
“야!! 무시라니. 그냥 알아가는 과정이지……. 호호.”
민망해진 노을이 오한결을 쳐다봤다.
“제가 커피 쏠게요!”
* * *
오한결과 두 알바생이 그늘에서 시원하게 커피를 들이켜고 있을 때, 얼굴이 벌게진 김일중 사장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다.
“늦어서 미안해요, 회의가 길어졌네.”
김일중 사장이 혼잣말하듯 중얼거린 뒤 분수대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좀처럼 안정을 못 찾고 있는 듯 보였다.
오한결이 슬쩍 다가가 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
오한결을 쳐다보지 않고 멍을 때리는 김일중 사장에게 노을이 소리쳤다.
“사장님!! 정신 좀 차리세요! 무슨 일 있으세요?”
그제야 김일중이 눈을 크게 뜨고 오한결을 쳐다봤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오한결 작가님 왔구나!!”
노을이 그 말을 듣고는 놀라서 소리쳤다.
“역시! 한결 씨는 작가였어. 어쩐지 굉장한 실력이더라! 이제부터 나도 작가님이라고 불러야겠다. 호호.”
최무열이 오한결을 멍하니 바라봤다.
“오, 오, 오한결 작가님!”
어리둥절한 김일중이 노을에게 물었다.
“뭐야? 무슨 일 있었어?”
“사장님!! 제발 정신 좀 차리시고, 여길 보시라고요.”
노을이 손가락으로 ‘사자의 서’를 가리키자 김일중이 경악하며 소리쳤다.
고대 이집트 벽화의 한 장면이 그대로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게 아닌가. 원작이 갖는 아우라를 품은 채 그 존재감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세상에!! 한결 작가님이 또 해냈구나!!”
덩달아 신이 난 노을과 최무열이 그림 앞에 쭈그려 앉은 김일중에게 작품 설명을 해주었다. 사자의 영혼 재판과 부활 그리고 미라에 관해…….
집중해서 설명을 듣던 김일중이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렸다.
노을이 놀라서 물었다.
“사장님 괜찮으세요? 엄청, 감동하셨나 보다…….”
“살았다…….”
“네?”
“한결 작가님 덕분에 나는 살았다고!!! 역시, 신은 나를 버리지 않았어.”
불길한 예감에 오한결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죠?”
김일중이 간절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한결 학생. 나 좀 도와주면 안 될까?”
“네?”
“이번에 작업 못 하면 완전 적자야. 임대료도 못 낸다고……. 나는 완전히 파산할지도 몰라.”
“……갑자기 무슨…….”
“사실은 말이야. 좀 전에 카페 사장들과 회의를 했는데, 글쎄, 이번에 ‘파주 카페 거리’를 대표하는 예술품을 제작한다지 뭐야.”
김일중이 오한결의 눈치를 살살 보며 말을 이었다.
“문제는, 카페 사장들이 수준 높은 벽화를 원하고 있어. 복사한 듯 허접스러운 작품이 아니라, 예술가의 묵직한 아우라가 느껴지는 예술품 말이야.”
반 고흐의 <밤의 카페 테라스>를 흉내 낸 게 아니라 정말 ‘오마주’한 작품을 원한다는 것이다. ‘파주 카페 거리’의 상징이 될 수 있도록.
김일중의 말에서 진심을 느낀 오한결이 조심스레 말했다.
“……설마, 그걸 나보고 하라는 건 아니죠?”
김일중이 어색하게 목을 벅벅 긁었다.
“이런, 벌써 눈치챘나? 하하하……하.”
“…….”
김일중이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바닥을 보며 읊조리듯 말했다.
“사실은……. 내가 벽화 제작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고 나왔거든. 이번에 약속 못 지키면 나는 벽화 사업에서 완전 아웃이야. 신뢰가 바닥인데 누가 나랑 일하겠냐고.”
“이런, 왜 호언장담을 하셨어요? 뒷일을 어떻게 감당하시려고…….”
“그게……. 어쩌다 보니.”
김일중이 오한결의 팔을 붙잡고 소리쳤다.
“3억!! 자그마치 사업비가 3억이라고!”
오한결은 사업비를 말하면서 흥분과 기대 그리고 두려움이 서린 김일중 사장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역시! 그거였군요.’
지역을 대표하는 작품을 만드는 데 상당한 예산이 책정됐을 거라고 생각은 들었다. 3억이면 꽤 큰 사업이 되겠네. 김일중 사장님이 욕심부릴만해 보였다.
생각에 빠진 오한결을 보며 김일중이 쭈뼛거리며 말을 이었다.
“……바로 얘기하려고 했어. 당연히 작가님께 후하게 드려야지. 5대 5는 어때?”
작가의 비율이 더 높아야 한다고 오한결이 생각하고 있는데 노을이 먼저 소리쳤다.
“우와! 1억 5천. 대박!! 오한결 작가님 꼭 하세요!!”
최무열이 손가락을 꼽으며 중얼거렸다.
“1억 5천이면……. 헉. 돈이 너무 많아서 할 수 있는 게 무한대야. 책도 여러 권 살 수 있고, 컴퓨터도 사고…….”
김일중이 자신 없는 말투로 말했다.
“근데, 호언장담하면서 실수한 게 있어. 카페 사장들에게 작품에 만족하지 못하면 돈을 안 받겠다고 했어……. 내가 미친놈이야. 경쟁업체가 워낙 많아서 말이지. 너무 하고 싶어서 잠깐 정신이 나갔었나 봐. 이 일을 어쩌지……. 아냐, 한결 작가님 실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해. 아니 넘치지. 그렇고말고. 그, 그렇지……? 도와줄 거지……?”
오한결은 진심으로 김일중 사장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눈앞에 보이는 커다란 이익을 모른 체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하지만 한국에서 진정한 예술을 보여주고 싶은 오한결에게 그의 제안은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다.
“저는 돈 때문에 예술을 하진 않습니다만…….”
“오! 그렇지. 역시, 그럴 줄 알았어. 그래서 내가 돈 이야기를 먼저 안 꺼낸 거라니까. 그러니까 생각을 다시 해 주면 안 될까?”
때마침 아버지에게 문자가 왔다.
「아들, 먹고 싶은 거 있어? 아버지가 밀린 일당을 받았거든. 그림 열심히 그리라고 한턱 쏘는 거니까. 말만 해!」
아버지의 문자에서 ‘일당’이라는 단어에 오한결의 몸이 얼어버렸다. 잊고 있었다. 사업이 부도난 후 아버지는 새벽부터 공사장 일용직으로 일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현실의 벽에 세게 부딪힌 오한결이 재빨리 말했다.
“근데, 예술을 하려면 돈이 필요하긴 하죠.”
“……그, 그렇지. 역시 현명해……. 그래서 내가 나중에 제대로 돈 이야기하려고 했어…….”
“9대 1로 할게요. 물론 제가 9입니다. 대신, 그 호언장담 꼭 지킬 수 있게 하겠습니다.”
“……고마워.”
오한결이 자리를 뜨자, 두 알바생은 환호성을 질렀고 김일중 사장은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 * *
지글지글.
가족들과 거실에 둘러앉아 삼겹살을 굽고 있는 오한결.
불판에서 고기가 익어가자 고소한 기름 냄새가 집안 가득 진동한다.
노릇하게 익힌 삼겹살을 좋아하는 동생 오한수는 집게를 손에 쥐고 고기가 익을 때까지 노려보고 있다.
“빨리 익어라~, 노릇노릇 익어라~”
오한결에게 그런 동생의 모습은 그저 귀여워 보였다.
“그만 좀 태워라. 탄 거 먹으면 몸에 안 좋아.”
어머니 박선희가 생삼겹살을 접시 가득 담고는 불판 앞에 앉았다.
“요즘 한결이가 웃고 다니니까, 너무 좋다. 그래서 아버지가 엄마한테 부탁했나 보다. 고기 많이 사 오라고.”
오한수가 입안 가득 삼겹살을 욱여넣으며 웅얼거렸다.
“엄마, 그렇다고 그렇게 많이 사 오면 어떻게 해? 딱 봐도 십 인분도 넘네.”
“남으면 다음에 먹으면 되지. 얘는 걱정도 많다.”
아버지 오준근이 양손 가득 맥주를 가져와 식구들에게 각자 하나씩 나눠줬다.
“자자, 오늘은 기분 좋게 한 잔씩 하자고!”
박선희가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도 건배사 한 번 할까. 우리 막내 한수가 한번 해봐라.”
“아! 왜 그래. 부끄럽게. 그런 거 하지 맙시다,“
오준근이 거들었다.
“그러지 말고, 막내야, 큰 결심한 형의 성공을 위해 무슨 말이라도 해봐. 이때 아니면 언제 하겠니?”
오한수가 쭈뼛쭈뼛 몸을 꼬더니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자칭 천재 오한결 작가의 성공을 위하여!! 미국은 가족들과 여행으로 갑시다~!”
모두 오한수의 말에 빵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곧이어 다 같이 소리쳤다.
“성공을 위하여!!”
오한결은 게걸스럽게 고기를 먹는 오한수를 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공부는 잘 하고 있지? 학점 관리 잘 해야 한다.”
“이런 꼰대! 밥 먹는데!! 갑자기 전쟁을 선포해?”
“……꼰대라니.”
“근데 요즘 말투가 완전히 꼰대 같고……. 변했어. 수상하단 말이야.”
박선희가 끼어들었다.
“네 형이 널 생각해서 그러는 거 아니냐. 철없는 녀석아. 막내는 이제 알바 그만두고 공부에만 집중해야지. 엄마도 학습지 교사로 일하니까 학비 걱정은 하지 말고.”
오한결은 고개를 떨구는 오한수를 안쓰럽게 쳐다봤다.
‘이 자식, 남몰래 마음고생이 많았구나. 형으로서 정말 미안하네…….’
오한결이 박선희에게 말했다.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동생 공부는 제가 책임질게요.”
“괜찮다. 엄마가 알아서 해. 너는 그림에만 열중해라.”
오한결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림 그려서 돈 벌면 되죠! 벽화작품 제안이 하나 들어왔어요. 꽤 짭짤해 보여요.”
오한수가 꿀꺽 고기를 모두 삼키고 말했다.
“와우. 무조건 해. 그림도 그리고 돈도 벌고. 캬~, 기가 막히는구먼.”
오준근이 오한결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네 표정을 보니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 게로구나. 그게 뭔지 물어봐도 될까?”
“음, 벽화 제안 금액이 꽤 커요.”
오한수가 물었다.
“얼만데? 이삼백 정도 준데?”
오한결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삼백이 큰돈이긴 하지. 넌 그 정도면 돼?”
“나야, 학생이니까. 학비 정도 낼 수 있으면 엄청 크게 느껴지는데…….”
잠시 뜸을 들인 오한결이 말했다.
“3억이요!”
오한결의 말에 모두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눈만 껌뻑였다. 잠시 뒤 오준근이 맥주를 따라주며 말했다.
“내가 이런 말 할 자격은 없다만, 그래도 아들이니까 한마디 하마. 내키지 않으면 안 해도 돼. 나는 그렇게 생각해.”
박선희가 익은 고기를 접시에 담으며 말했다.
“어떤 결정이든 나는 찬성. 하지만 오로지 한결이 너를 위해 결정해야 한다.”
맥주를 벌컥 들이켠 오한결이 말했다.
“3억을 다 받는 건 아니고요. 벽화 사장님하고 나눌 거예요. 그래도 그 돈이면 충분히 우리 집 빚을 다 갚을 수 있어요. 내가 알기론 빚이 대략 2억 정도인데……. 맞죠? 그리고 전 벽화 작업 좋아해요. 걱정하지 마세요.”
오준근이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미안하다, 한결아.”
멋쩍은 오한결이 살짝 눈시울을 붉히며 대답했다.
“아빠, 너무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요. 이제부터 즐거운 일만 있을 거예요. 그건 제가 장담할 수 있어요.”
오한결이 미소짓자 그제야 부모님 얼굴에 웃음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오한수가 고기 몇 점을 오한결 접시에 올려놓고 속삭였다.
“나는 처음부터 찬성이었음. 무조건 해야지. 돈이 얼마인데. 그리고 내 맘 알지 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