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충해도 완벽한 예술 천재-4화 (4/202)

제4화 정면성의 원리

“벽화를 그리라고요?”

뜬금없는 요청에 오한결이 되물었다.

“학생! 솔직히 말해봐! 정말 이 그림 학생이 그렸어?”

김일중이 스케치북을 들고 취조하듯 말하자, 오한결이 여유롭게 대답했다.

“사장님은 의심이 많으시군요.”

홍철수가 대뜸 김일중에게 소리쳤다.

“김 사장, 무례하게 그러지 말게. 한결 학생이 눈앞에서 직접 그렸다고 하지 않았나.”

홍철수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건네며 말을 이었다.

“한결 학생 미안해요. 김 사장이 성격이 급해서. 내가 한결 학생 작품을 자랑했거든. 김 사장도 그림 그리는 사람이라 너무 놀라서 그래요.”

김일중이 불쑥 끼어들었다.

“혹시……. 다른 그림도 볼 수 있을까……요? 작가님?”

오한결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김일중 사장을 쳐다봤다.

내 그림에 꽤 흥미를 보이는 것 같네. 도대체 무슨 꿍꿍일까?

“글쎄요, 그 전에 벽화 얘기를 마저 듣고 싶어요.”

불안한 김일중이 구원을 바라는 눈빛으로 홍철수를 응시하자, 그가 잠시 머뭇거린 뒤 입을 열었다.

“여기 김일중 사장이 벽화 사업하는 건 알고 있지? 작업하기로 한 알바생이 연락이 안 돼서 급하게 도움이 필요한가 봐. 그림도 그리고 돈도 벌 수 있어서 내가 한결 학생을 추천했어. 알바비가 한결 학생에게 도움이 될까 해서. 하지만 부담 주고 싶지 않아. 거절해도 괜찮아.”

초조한 표정의 김일중이 슬쩍 끼어들었다.

“아이구 형님. 그게 아니죠. 한결 작가님 오해하지 말아줘. 작가님은 알바가 아니라 아티스트로 모실 거야. 최고 인재로 대접해 준다니까.”

오한결이 뚱한 표정을 짓자 김일중 사장이 더 초조해졌다.

“내가 그림 보는 눈이 있거든. 얘기 들었나? 나도 미대 졸업한 거? 한때는 유망주로 이름이 잠깐……. 거론되기도 했지……. 암튼, 한결 작가님 작품은 정말 엄청났어. 그림을 보자마자 숨이 턱하고 막혔다니까. 뭐랄까……. 화신벽화 스타일에 딱이라고 할까.”

오한결은 김일중이 홍철수의 사촌 동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가끔 찾아와 투덜거리는 철없는 털보 동생. 사업적 능력이 부족한 그의 벽화 사업은 적자를 면치 못한다고 들었다.

말을 아끼는 오한결을 보고는 홍철수가 무척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런 부담을 줘서 어떡하지. 한결 학생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서 제안한 건데…….”

김일중이 거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한결 작가님이 여기서 미술 재료 받아 가고 있다며? 그 정도는 내가 얼마든지 지원해 줄 수 있지. 최고급으로 빵빵하게 말이야! 어때, 구미가 당기지 않아?”

오한결이 피식 웃어 보였다. 너무 유치한 거 아닌가.

생각해 보니까, 오한결 수중에 여유 자금이 없는 것도 사실이긴 하다. 회귀했다고 재산을 갖고 온 건 아니니까.

현실적으로 벽화를 하는 게 맞을 수도 있겠다. 돈도 벌고 홍철수 사장님을 도와줄 수 있으니까. 화신벽화 자체가 홍철수 사장님의 돈으로 세운 회사 아닌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한쪽 눈썹을 추켜세운 오한결이 말했다.

“사장님, 벽화 할게요.”

“!!”

홍철수와 김일중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오한결을 쳐다봤다. 오한결은 두 사람의 눈빛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알아챘다.

경제적 도움을 주고 싶은 홍철수의 눈빛과 오한결의 능력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싶은 김일중의 눈빛.

“단, 벽화 알바생으로 참여할게요. 괜찮겠죠?”

김일중이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아티스트로 모시고 싶은데. 그럼 돈도 더 벌 수 있고. 아니면 팀장 시켜줄까? 파격적인 대우야. 알고 있지?”

“음, 화신벽화에 직원이 몇 명이죠?”

“한 명…….”

“그 한 명이 사장님이죠?”

“……응.”

“전 그냥 알바가 낫겠네요. 제안 주셔서 감사합니다.”

“…….”

홍철수가 끼어들었다.

“김 사장, 너무 그러지 말게나. 아무튼, 한결 학생 고마워. 많은 도움이 될 거야.”

잠시 뒤, 홍철수 사장이 자리를 비우자 오한결이 휴대폰 화면을 김일중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다른 작품 보고 싶다고 하셨죠? 최근에 그린 건데, <균형과 기울기 그리고 색채>라는 작품이고요. 단순함의 미학을 표현해봤죠. 어때요? 마음에 드시나요?”

“!!!”

“그럼 내일 알바 장소로 나갈게요! 전 바빠서 이만. 안녕히 계세요~!”

급히 밖으로 나가는 오한결.

김일중이 멍하니 그의 뒷모습만 바라볼 뿐이었다.

* * *

다음 날, 오한결은 가벼운 마음으로 파주행 버스에 오르자, 창밖으로 도시 전경이 빠르게 스쳐 갔다. 외벽 유리로 반짝이는 고층 빌딩과 그 사이를 개미처럼 줄지어 이동하는 무표정한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현대사회 시스템은 사람들의 감정을 거세한다.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고 왜 가는지를 알지 못한 채 거짓 운명에 이끌려 간다. 한 인간의 운명은 사회를 위해 희생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예술가의 역할은 무엇일까?

예술가가 작품을 통해 숨겨진 인간의 본성을 표현할 수 있다면 오랫동안 사회화라는 폭력으로 억압된 개인이 그 작품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진짜 본성을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예술가는 표면적 현상 뒤에 숨겨진 진실을 폭로해야 한다.’

오한결은 생각했다.

‘때가 되면 세상에 나의 진짜 모습을 드러내리라.’

대략 한 시간 후 버스가 파주 카페 거리에 도착했다.

* * *

넓은 길을 따라 양쪽으로 유럽식 노천카페들이 줄지어 있다. 야외 테이블에 앉아 있는 연인들의 밝은 표정과 정장을 입은 직장인들의 여유로운 모습 덕분에 카페 거리는 유럽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약속 장소인 원형광장을 찾기 위해 오한결이 두리번거렸다. 주변에 온통 카페만 보일 뿐 광장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표지판을 발견하고 우측 골목으로 들어가니 그제야 넓은 원형광장이 눈앞에 펼쳐졌다.

광장 중앙에 거대한 분수대에서 시원하게 물줄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분수대 주변의 탁 트인 시야는 팍팍한 도시에서 볼 수 없는 공간의 웅장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분수대 앞에 두 사람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데, 아마도 분수대 하단에 벽화 작업을 하는 듯 보였다. 김일중 사장에게 알바생이 더 있다는 얘기를 들은 오한결은 그들의 작업이 궁금해 가까이 다가갔다. 비율이 맞지 않은 캐릭터와 구도를 전혀 생각하지 않은 풍경이 꼴사납게 그려져 있었다.

잔뜩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오한결에게 빨간 머리 여자가 다가왔다.

“벽화 알바하러 오셨나요?”

오한결이 고개를 끄덕이자 빨간 머리 여자가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설마, 벽화 작업 처음이에요?”

“음……. 아마도요.”

“아놔, 사장님 너무하네. 초짜 데리고 일하기 힘든데.”

“…….”

“휴대폰으로 이집트 그림 검색해서 대충 빈 곳에 그려 넣어요. 할 수 있겠죠?”

어리숙해 보이는 남자 알바생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

“저기요……. 풍경 위주로 그려주세요. 캐릭터는 노을 누나가 할 거예요.”

빨간머리 여자의 이름은 ‘노을’인데, 자기 이름과 닮고 싶어 머리를 붉게 염색했다. ‘거리 예술가’로 활동 중인 노을은 버려지고 소외된 폐기물을 모아 나름의 방식으로 생명력을 불어넣는 예술 작업을 하고 있다.

둔해 보이는 남자의 이름은 ‘최무열’이고 미대 명문 H대 조소과에 재학 중이다. 행동과 말투 등 모든 게 평범해, 적어도 외형적으로 예술가의 면모가 보이진 않는다. 노력으로 H대에 진학했지만, 진짜 예술은 열정만으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점점 깨닫고 있다.

지난 카페 벽화 작업 때 알게 된 두 사람은 김일중 사장이 신뢰하는 알바생들이다.

오한결이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사장님은 언제 오시나요?”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으며 노을이 대답했다.

“오늘 카페 사장님들과 미팅이 있다고 하던데……. 길어지나 봐요.”

그림에 집중하던 최무열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누나, 우리 이집트 벽화 전문으로 해도 되겠다.”

“오, 예쁜데. 역시 H대 조소과는 달라. 엄청 정교해.”

“디테일 살리려고 고생 좀 했어. 이제 색만 입히면 돼.”

오한결은 두 사람이 그린 이집트 미술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참고 자료를 보고 대충 형태만 비슷하게 그린 그림.

얼핏 보면 캐릭터는 현대 만화 같고 배경 또한 철저히 원근법을 지켜 나름 멋을 부려놓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린 거지?

일종의 풍자인가 아니면 이집트 미술을 재해석한 것인가.

근데 이들 스스로 이집트 벽화 전문가라고 칭하는 걸 보니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미간에 잔뜩 주름을 잡은 오한결이 두 사람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집트 미술을 이해하고 그리는 걸까…….’

이집트 예술은 ‘정면성의 원리’로 대상의 본질적 특성을 표현하고자 했다. 기원전 14세기, <이집트 네바문의 고분벽화 중 정원 그림>을 참고해보자.

벽화에는 원근법을 무시한 물고기와 나무가 그려져 있는데 정면이 아닌 옆 모습을 묘사했다. 이집트 예술은 예술성보다 완전함을 추구했다. 그들은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오한결은 두 알바생에게 물었다.

“이집트 미술을 따로 배우셨나요?”

“인터넷에서 작품을 많이 참고했더니, 이제는 거의 전문가가 된 거죠. 호호.”

“하지만 이집트 미술 특징이 보이지 않네요. 분명, 자료를 참고했다면 얼굴과 몸, 발의 형태가 저렇게 온전한 모양이 될 수가 없는데요.”

노을이 언짢은 표정으로 오한결을 노려봤다.

“제가 정상으로 돌려놨어요.”

“정상이요? 이집트 미술에서 정상이란 얼굴은 옆으로 향하고 상체는 정면을 보고 발은 측면을 보여주는 거예요. 철저히 계산된 표현 방식이죠.”

“이집트 사람들의 ‘유머’ 아닌가요? 그것보다 우리가 그린 게 더 보기 좋은데요.”

오한결은 인내심을 갖고 설명을 이어갔다.

“유머가 아니에요. 그 당시 이집트 미술은 멋지고 예쁘게 그리려고 하지 않았어요. 대상의 본질을 그리려고 했죠. 벽화다 보니 기록하고 설명하고자 했던 측면이 강했을 거예요. 지금 보면 어색할 수 있지만, 매우 정교한 규칙에 따른 작품이에요.”

노을의 얼굴이 머리 색깔처럼 붉어졌다.

“……뭔가 많이 아시는 거 같긴 한데, 우린 전문가한테 허락받고 작업하고 있는 거라고요!!”

“전문가요? 누구요?”

“김일중 사장님이요!”

갑작스러운 두통에 오한결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군요.”

최무열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누나, 이 분 말이 맞아. 나도 학교에서 이집트 예술에 대해 배운 적이 있거든. 이제야 기억나네. 시험용 지식이라 완전히 머릿속에서 지워졌었어……. 아무튼, 우린 완전히 헛다리 짚은 거 맞아. 우리가 그린 벽화를 보니까 갑자기 부끄러워지네.”

최무열의 말에 노을이 흠칫 놀랐다.

사실은 오한결이 지적한 그 특징들을 인지하고 있었다. 수많은 자료에 동일하게 나타난 형태였으니까.

왜 이집트인들이 그런 형태로 인물과 배경을 그렸는지 이해하려 하지 않았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이제야 벽에 그려진 왜곡된 이집트 미술이 눈에 들어왔다.

풀이 죽은 노을이 오한결을 바라봤다.

“제가 비전공자라 잘 몰라서 그래요. 미술 공부를 틈틈이 해야겠어요. 그쪽은 미술 전공하셨나 보네요?”

오한결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미 졸업했죠.”

“어디요? H대? 국립예술교육원? 혹시 유학파?”

오한결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동양예술대 서양화과요.”

“첨 들어보는데……. 어딨는 거지…….”

노을이 손가락으로 최무열을 가리켰다.

“쟤는 H대 다녀요. 굉장히 엘리트죠. 그쪽도 무열이랑 친해져 봐요. 알아두면 나중에 도움이 될 거예요.”

갑자기 오한결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재밌네요.”

“…….”

오한결이 손을 쑥 내밀었다.

“붓 좀 주세요. 직접 이집트 미술을 보여드리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