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충해도 완벽한 예술 천재-3화 (3/202)

제3화 빛의 화가

눈을 감고 홍철수와 홍미숙의 모습을 떠올리자, 어둠 속에서 그들의 형체가 어렴풋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잠시 뒤 외형뿐만 아니라 내적 심성까지 투영된 이미지가 환한 빛을 발산하며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좀 더 선명했으면.’

오한결은 한때 선명하고 완전한 외형을 중시한 고전주의 예술에 심취했었다. 뚜렷한 윤곽을 가진 그림만이 위대한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그림 속 빛은 인물의 완전한 모습을 형상하기 위해 존재할 뿐이었다.

하지만 오한결은 그들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데 그치고 싶지 않았다.

‘그건 너무 재미없다.’

기능적인 수준에서 탈피하여 마음을 담은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그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해주고 싶었다.

그렇다고 난해하고 복잡한 현대 예술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에게 익숙한 미적 감동을 환상적으로 전해주고 싶었다.

빛의 화가 ‘렘브란트’처럼.

검은 안개에 묻힌 인물들이 빛의 구원으로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하자.

천천히 눈을 뜨는 오한결.

홍철수, 홍미숙에게 밝고 따스한 빛이 부드럽게 비추기 시작한다.

윤곽을 따라 빛과 그림자가 수없이 쪼개지더니 형체가 입체적으로 떠오른다.

‘좋아, 포착했어!’

스스슥. 스스슥.

연필을 잡은 손이 스케치북 위에서 분주하게 움직인다.

지우개 따위는 필요 없다. 수백 수천 개의 선으로 색을 쌓는 작업도 생략한다. 오직 힘의 강약으로 빛과 어둠의 깊이를 만들어내고 있다. 거친 종이 표면은 그림 속 인물의 생생한 질감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예술 세계에 빠져든 오한결.

어느덧 그림을 마무리하고 연필을 내려놓는다.

이것이 바로 ‘빛의 그림’이다.

홍철수와 홍미숙은 오한결의 모습에 벅찬 감동을 했다. 그가 긋는 모든 연필 선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설계된 신의 동작 같았다.

홍철수 사장에게 그림을 건네주는 오한결.

“선물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요.”

홍철수는 말문이 턱 막혔다. 이건 ‘위대한 작품’이다. 평생 그림을 수집하고 판매한 홍철수는 오한결의 작품의 미술사적 가치를 단번에 알아봤다.

“……믿을 수가 없어.”

오한결이 어깨를 으쓱하며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마음에 드시니 다행이네요. 나중에 제대로 그려드릴게요.”

“……제대로. 한결 학생,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건가?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군.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이런 수준 높은 그림을 그리다니. 이건 기적이야!!”

작품에 눈을 떼지 못한 홍미숙이 흥분하며 말했다.

“그림을 보면, 오빠와 내가 빛의 은총을 받은 것처럼 성스럽게 보여. 한결이의 따스한 마음이 인물에 그대로 투영되었나 봐. 절로 행복한 기분이 드는걸.”

홍철수가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우리에게 주는 건가? 이런 귀한 작품을…….”

“그럼요. 고마움의 표시인걸요. 은혜를 갚는다고 생각해 주세요.”

“은혜? 고작, 물감 몇 개 준 걸 가지고……. 은혜라니 당치도 않네.”

“물감이 아닌 사장님 마음에 대한 보답입니다!!”

“……참, 부끄럽구먼.”

“자, 이제 작품명을 정해볼까요?”

오한결이 주변를 둘러봤다. 창밖에서 들어온 따스한 햇볕이 아트화랑 내부를 포근히 감싸고 있었다. 꿈꾸는 듯한 표정을 짓는 두 사람이 보였다.

직관적으로 이름을 지어 보자.

“<홍철수, 홍미숙>으로 할게요.”

“……세상에, 영광인데.”

홍철수, 홍미숙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꼬르륵.

얼굴이 붉어진 오한결이 쑥스러운 듯 배를 문질렀다.

홍미숙이 말했다.

“어머, 배고프구나. 방금 된장찌개 끓였는데, 식사하고 가요.”

식사하는 내내 그들의 웃음은 끊이지 않았다.

* * *

오한결이 가고 나자 홍철수와 홍미숙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들은 두려웠다. 위대한 그림이 자신들의 손에서 그 빛을 잃을까 봐. 오랜 고민 끝에 홍철수가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신가, 김일중 사장. 급히 상의할 게 있어서 전화했네.”

[아이고, 형님. 때마침 찾아뵈려고 했는데, 무슨 일이시죠?」

“잘됐네. 아트화랑으로 좀 오게나. 보여줄 게 있어.”

* * *

낮에 가족에게 통보한 ‘중대발표’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가족을 무척 보고 싶은 마음에 오한결이 무척 긴장하고 있다. 와락 안아 버릴까? 그럼 너무 놀라겠지. 오한결은 50년 만에 가족을 보지만 그들은 오한결을 본 지 몇 시간밖에 되지 않았다. 너무 감정을 표출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잠시 후 현관문이 열리고 아버지 오준근과 어머니 박선희가 함께 들어왔다. 우연히 아파트 입구에서 만난 그들은 아들이 보낸 문자에 온종일 신경이 쓰였는지 몹시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

꿈에서도 보고 싶던 부모님의 모습이 보이자, 오한결이 소리를 질렀다. 부모님은 오한결의 반응에 놀라 대꾸했다.

“한결아! 간 떨어질 뻔했잖니. 근데 네 동생 한수는 아직 안 왔어?”

시계를 확인해 보니 6시 50분이었다. 약속 시각까지 10분 남았다.

부모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오한결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아직이네요, 올 거예요.”

“한결아 너 정말 괜찮은 거니? 중대발표란 게 뭐야? 무슨 걱정 있는 건 아니지?”

“동생 오면 말씀드려도 될까요? 모두 모였을 때 얘기하고 싶어요.”

“…….”

잠시 뒤 현관문이 열리고 동생 오한수가 다급히 들어왔다.

“딱 맞춰왔습니다!! 헤헤.”

동생이 도착하자 반가운 마음에 장난으로 헤드록을 거는 오한결.

동생이 미꾸라지처럼 쑥 빠져나가더니 소리를 질렀다.

“형 미쳤어?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잠시 뒤, 부모님과 동생은 ‘어서 빨리 말해’라는 듯이 오한결의 얼굴만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었다. 오준근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래, 무엇을 중대 발표하겠다는 거지?”

오한수가 불쑥 끼어들었다.

“형, 진짜 중요한 일 아니면 내가 무슨 막말 할지 몰라, 조심해.”

오한결이 주머니에서 조각난 비행기 표를 꺼내 보였다.

“미국에 안 가기로 했어요. 갑자기 말씀드려 죄송합니다.”

한동안 말없이 찢긴 비행기 표를 바라보는 가족.

아버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가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 어렵게 취업한 거라며?”

“한국에 남아 있을 이유가 생겼거든요.”

오한결은 급히 방으로 들어가 <균형과 기울기 그리고 색채> 작품을 들고나왔다.

“어때요? 예술 계속해도 되겠죠?”

가족의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던 오한결이 말을 이었다.

“진정한 예술가는 경제적인 이유로 예술을 포기하지 않아요. 그걸 너무 늦게 깨달았어요. 미국행 비행기 표는 저의 어리석음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찢어 버렸어요.”

동생이 찢어진 표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거 환불할 거지? 나 용돈 좀…….”

“해야지. 근데 학교 선배가 끊어준 거라 나한테 떨어지는 돈은 없어.”

“……힝. 가슴 아프네.”

박선희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림이 굉장하네. 내가 그림을 잘 몰라서 얘기하기 조심스럽지만, 대단한 작품 같구나. 그리고 돈이야 벌면 되지.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꿈을 위해 노력하는 아들이 얼마나 자랑스러운데. 네 아버지와 나는 그걸로 만족해.”

오준근이 끼어들었다.

“이야, 멋진 그림이네. 안정감이 있어 좋다. 나도 그림을 잘 모르지만, 한결이가 예술가가 아니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어. 잘 생각했다. 미국 갈 필요 없다.”

오한수가 한숨을 푹 쉬었다.

“뭐야! 난 또 무슨 일 있는 줄 알았네. 형이 하고 싶은 대로 해. 진정한 예술가는 그런 눈치 보는 거 아니야. 그리고 혼자 이상한 죄책감 느끼면서 살지 좀 마라. 오바하는 거다. 그거.”

오한결이 울먹이며 말했다.

“나 혼자 살겠다고 미국으로 건너가는 일 없습니다. 이번에는 한국에서 최고의 천재 예술가가 되어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겠습니다. 약속드립니다. 더는 돈 때문에 이산가족처럼 헤어지지 말아요!!”

감정이 격해진 오한결을 바라보며 가족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동생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말했다.

“……저 형이 실성했나. 근데 미국 가본 적은 있어? 마치 갔다 온 것처럼 말한다.”

“그게……. 가보진 않았지만, 무척 낯익은 곳이라고 할 수 있지…….”

“……뭐래.”

오준근과 박선희는 눈빛을 교환한 후 말했다.

“믿을게! 아들의 성공을 진심으로 믿고 기다릴게. 그게 부모로서 해줄 수 있는 최선인 것 같아.”

오한수가 눈치를 살피다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대박!! 그림만 그리더니 완전 다른 사람이 됐어. 스트레스 때문인가. 약간 무서운데.」

「뭔 말이야. 누가?」

「우리 형! 지금 장난 아니야. 본인이 천재 예술가래. 그림은 곧잘 그리는 거 같긴 한데……. 천재는 좀 오바 아니냐.」

「ㅋㅋㅋ 좋겠다 천재라서. 넌 아니잖아.」

「……야!!」

* * *

늦은 밤, 침대에 누워 있는 오준근과 박선희. 두 사람 모두 오한결의 그림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박선희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한결이가 변했어요. 분명히.”

긴 침묵이 흐른 뒤 오준근이 속삭이듯 대답했다.

“한결이가 미국에 가길 원하는 줄 알았는데…….”

“찢긴 비행기 표를 볼 때……. 눈물 참느라 혼났어요. 얼마나 속앓이를 했을까요.”

“아들이 그렇게 예술을 하고 싶다는데. 우리가 적극적으로 밀어줍시다.”

몸을 벌떡 일으킨 오준근이 박선희를 내려다봤다.

“아니. 그럴 필요 없을 거 같아. 아까 그림 봤잖아. 한결이는 이미 자신의 예술 세계가 있는 거 같아.”

“맞아요. 단순한 그림이었는데……. 계속 보고 있으니까 이상한 기분이 드는 거예요. 복잡한 감정이 누그러지고 자연스레 겸손해지더라고요. 그림 하나로 그런 울림을 줄 수 있다니 상당히 놀랐어요.”

“한결이의 천재성이 드디어 발현된 게 아닐까?”

“…….”

“생각해 보니까, 어렸을 때부터 남달랐던 것 같아. 당신도 기억하지?”

“……갑자기요?”

“……음.”

* * *

이른 아침 아트화랑.

은은한 원두커피 향이 화랑 내부를 포근히 감싸고 있다.

신문을 읽던 홍철수 사장이 커피잔을 드는 순간, 도어벨 소리와 함께 가게 문이 서서히 열렸다.

베레모를 쓴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홍철수 사장이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김 사장, 아침 일찍부터 불러서 미안하네.”

“별말씀을요. 저도 형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요.”

홍철수 사장에게 깍듯이 인사한 남자는 ‘화신벽화’ 김일중 사장이다. 사촌 형인 홍철수의 도움으로 5년 전 파주에서 벽화 사업을 시작했다. 미대 졸업 후 마땅한 일자리가 없어 방황하던 김일중에게 홍철수가 자금을 빌려주며 벽화 사업을 제안했다.

김일중 사장이 찬물을 벌컥 들이키며 푸념하듯 말했다.

“형님, 벽화 작업도 이제 못 해 먹겠어요.”

“……또 의뢰인하고 싸웠나?”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파주 카페 거리 벽화 의뢰가 들어와서 급하게 미대생 알바를 구했는데, 글쎄 이놈이 오늘 작업하는 날인데 잠수탔지 뭡니까.”

“……무슨 사연이 있겠지. 통화는 해봤나?”

“형님은 순진한 건지, 훌륭한 건지 모르겠네요. 잠수 몰라요? 도망친 거죠. 그런 놈이 휴대폰을 켜놓겠어요? 이미 다 해봤어요.”

다시 찬물을 시원하게 들이킨 김일중 사장이 말을 이었다.

“형님, 주변에 그림 그리는 사람 있으면 추천 좀 해주세요.”

“잘됐네. 그거 때문에 자네를 이리로 부른 걸세. 잠시만.”

홍철수가 잠시 자리를 비운 뒤 스케치북을 들고 나타났다.

“김 사장, 자네 깜짝 놀랄 거야.”

스케치북을 펼치자 <홍철수, 홍미숙> 작품이 눈앞에 펼쳐졌다.

김일중 사장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세상에! 이거 누가 그린 거예요? 믿을 수가 없어요……. 이건 단순한 정밀묘사가 아니잖아요. 마치 바로크 시대 그림이라 해도 믿겠는데요. 근데 이런 훌륭한 작품이 왜 스케치북에 그려져 있는 거죠? 설마 습작인가요……. 누가요? 대체 누가 그렸어요?”

“습작은 아니라네. 역시, 자네는 단번에 그림의 가치를 알아보는군. 이 그림은 분명 예술사에 기록될 만한 수준의 작품이야. 아직도 눈만 감으면 한결 학생이 이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습이 떠올라. 정말 엄청난 충격이었어.”

“한결 학생이요? ……아, 가끔 찾아오는 그 어리바리한 학생 말인가요?”

홍철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김일중이 갸우뚱했다. 김일중의 기억 속의 오한결은 자신감 없고 주눅 든 모습이었다. 그 학생이 이런 위대한 작품을 그렸다고?

“한결 학생을 직접 만나봐야겠어요.”

“잘 생각했네. 한결 학생의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말이야. 자네가 벽화 알바를 제안해 보면 어떤가?”

“형님!! 무슨 알바입니까. 정말 이 그림을 그렸다면 아티스트에요. 무조건 핵심 인력으로 스카우트해야죠!”

“……그렇지. 근데 한결이가 벽화를 그리려고 할까.”

김일중 사장이 자신 있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일단 그 학생을 만나봐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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