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충해도 완벽한 예술 천재-2화 (2/202)

제2화 균형과 기울기 그리고 색채

오한결은 새하얀 캔버스를 응시한 채 자신의 예술적 영감을 끌어올리고 있다.

어떤 작품을 그려야 할까.

‘평범함’을 탈피해 ‘특별함’으로 가는 여정.

천재가 되어 돌아온 오한결을 상징하는 그림이어야 한다.

스윽!

연필을 든 오한결이 한 줄의 ‘선’을 캔버스 위에 그려 넣었다.

그동안 수없이 그었던 연필 ‘선’이었지만 매번 특별하게 느껴진다.

수천, 수만 번 그었어도 똑같은 느낌과 모양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 작업은 이 ‘선’의 연장과 변형을 통해, 예술가 지망생 시절 확립하지 못했던 독창적 예술 양식을 보여주고 싶다.

‘도형으로 추상화를 그려보자.’

‘피에트 몬드리안’의 작품이 환영처럼 눈앞에 아른거렸다.

면과 선으로 이루어진 그의 추상화는 그 자체로 깔끔하고 세련된 이미지이다.

‘극적인 단순화를 통해 진리를 표현해보자.’

눈에 보이는 복잡한 외형에는 단순 명료한 본질이 감춰져 있기에 눈이 아닌 마음으로 사물의 본질적 특성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몬드리안은 오직 세련되고 깔끔한 작품만이 사람들에게 그 특성을 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붓 대신 삼각자를 꺼내든 오한결은 천천히 ‘선’을 첨가하기 시작한다. 평행을 달리는 직선은 서서히 삼각형과 사각형이 되고 결국에는 격자무늬 패턴으로 캔버스를 가득 채운다.

완벽한 직선, 직각은 왜곡 없는 순수한 형태이며 예술에 대한 진정성을 보여준다.

이제는 색이다.

천재 예술가의 등장. 색의 상징에 주목하자.

‘주황, 노랑, 파랑’으로 격자무늬를 채워나갔다.

‘주황색’은 에너지와 성과를 상징하고 삶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신경 시스템을 촉진 시킨다고 알려진 노란색은 긍정적 미래와 약속을 뜻한다. 마지막으로 ‘파란색’은 신성함과 책임을 의미하며 감각적이고 이성적인 느낌을 준다.

그림을 보면서 오한결은 생각했다. 너무 완벽한 형태는 정적이고 심심하다. 인간은 역동적이며 사유하는 동물인데, 경직된 그림이 주는 밋밋함을 참을 수 있을까?

작품에 기울기가 필요하다!

몬드리안은 대각선을 쓰지 않았지만, 오한결은 밋밋한 수평과 수직보다 기울기로 긴장감을 유발하고 싶었다.

천천히 그림을 그리는 오한결.

드디어 회귀 후 첫 작품 <균형과 기울기 그리고 색채>가 완성됐다.

팔짱을 낀 오한결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추상화를 감상하고 있다.

어설픈 습작을 치우고 세련된 작품으로 대신하니 음침했던 작업실이 환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마치 오한결의 밝은 미래처럼 말이다.

피에트 몬드리안은 네덜란드 구성주의 회화의 거장이다. 그는 ‘신지학’에 심취했는데, 그것은 일반적인 현상 속에서 보편적인 특성을 끌어낼 때, 신과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종교적 믿음이다.

나무, 건물, 사물들의 겉모습은 다르지만, 그것들을 관통하는 보편적인 본질은 같다고 믿었다. 그 본질은 궁극적으로 조화로운 상태에 있으며 화가의 임무는 그것을 작품에 반영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빨강, 파랑, 노랑의 3원색과 수평과 수직의 선을 이용하여 불변하는 본질을 표현하고 싶었던 몬드리안. 그는 곡선을 너무 감정적인 형태로 여겼기에 그의 작품에 사용하지 않았다.

* * *

기분 좋게 작업을 마치고 거실에서 커피를 마시는 오한결.

예전의 오한결은 온종일 작업실에서 그림만 그렸지만 이젠 모든 것이 달라졌다. 창을 통해 비추는 따스한 햇볕을 즐기며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만끽하고 있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과거의 아픈 기억들.

충고로 위장한 예술계 사람들의 독설이 다시 들리는 것 같았다.

-요즘은 개나 소나 예술 하나 보지?

가슴 속에 뜨거운 분노를 느낀 오한결이 벌떡 일어섰다.

‘이제 작품도 발표 못 하는 게으른 교수들. 근거도 없는 예술 비평으로 신인 예술가의 등장을 막고 있는 오만한 평론가들. 학벌, 파벌로 예술계를 진흙탕으로 만들어 자신들의 잇속만 채우는 못된 놈들!’

예술 생태계를 바꿔야 한다. 예술가의 힘은 학벌이 아닌 작품에서 나오는 것이다.

오한결이 급히 방으로 들어가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미국행 비행기 표를 발견한 오한결은 있는 힘껏 표를 찢어 버렸다.

‘아직은 미국에 가지 않아도 돼. 가족이 있는 한국에서 예술이 뭔지 보여주는 게 우선이야!’

갈기갈기 찢긴 비행기 표를 바라보며 오한결이 미소지었다.

* * *

오한결이 설레는 마음으로 가족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저녁에 중대발표 있습니다!」

잠시 후 아버지와 어머니, 동생에게서 답장이 왔다.

「아버지: 아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어머니: 어머, 중대발표라고 하니까. 불안한데……. 미리 말 못 해줘?」

「동생: 뭐야!! 형! 지금 말해줘. 저녁에 바쁘단 말이야!!」

오한결이 살짝 미소지으며 생각했다.

‘신이 주신 두 번째 기회다. 다시는 근시안적인 어리석음으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족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위대한 예술가로 돌아온 오한결.

오늘 저녁, 달라진 자신의 모습과 가족의 행복한 미래를 설명할 것이다.

그들이 믿지 않아도 상관없다. 곧 증명해낼 테니까.

생각만으로도 오한결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띠링!

불쑥, 문자 하나가 도착했다. 휴대폰을 보니 ‘아트화랑’ 홍철수 사장이다.

「오한결 학생, 미술 재료 준비해 뒀어요. 시간 날 때 오세요.」

‘아!! 사장님.’

반가운 마음에 오한결이 탄성을 질렀다.

아트화랑 홍철수 사장과는 오한결이 예술대 학생일 때부터 인연을 맺었다. 가난으로 세상을 어둡게 바라봤던 그 시절. 유일하게 오한결에게 인간적인 따스함을 보여주셨던 감사한 분이었다.

재빨리 답장을 보냈다.

「사장님!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옷을 주섬주섬 챙겨입은 오한결이 집 밖을 나와 지하철로 향했다.

* * *

프랑스 파리에는 ‘몽마르트 언덕’이 있다. 파리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그곳에 수많은 화가가 모여 예술활동을 하고 관광객들을 상대로 작품도 판매하고 있다.

몽마르트 언덕의 예술적 감성에 취하다 보면 프랑스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입을 모은다.

그런 낭만적인 장소가 한국에도 있다면 믿겠는가?

2호선 삼각지역에 내리면 ‘삼각지 화랑거리’가 있는데, 이곳을 한국의 ‘몽마르트 언덕’이라고 부른다. 지금은 예술적 분위기가 매우 옅어졌지만, 1960년대만 해도 한국 화가들에게 중요한 예술활동 장소였다.

용산 미군 부대를 중심으로 전국에서 화가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대부분은 미군들에게 초상화를 그려주며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화가들이 대략 2천 명 가까이 모였다고 하니, 그때의 분위기는 프랑스 몽마르트 언덕에 뒤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후 그림 회사들이 생겼고 한국 작가의 작품들은 미국, 유럽으로까지 수출됐다.

기회의 장소였던 화랑거리.

실력 있는 화가들은 학벌 및 인맥과 상관없이 자신의 작품을 판매할 수 있었다.

이중섭과 박수근 화백도 거쳐 간 ‘삼각지 화랑거리’.

그곳은 당대의 핫플레이스였다.

하지만 1990년대부터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저렴한 중국산 그림의 등장으로 수출길이 막혀버린 것이다. 화가들의 생계를 책임지던 그림 시장은 서서히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사라져갔다.

이제는 화려한 시절만 추억할 뿐, ‘화랑거리’는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현재는 대략 50여 개의 화랑, 표구사, 액자가게가 영업 중이다.

오한결이 찾아가는 ‘아트화랑’도 이곳 삼각지 화랑거리에 있다. 삼각지역에 내려 골목길로 접어들자 아트화랑 간판이 보였다.

오한결은 익숙한 듯 문을 열고 들어갔다.

화랑 내부는 갤러리와 비슷하게 꾸며져 있었다. 벽을 따라 그림들이 빼곡했고 테이블에는 각종 미술용품과 장식품들이 진열돼 있었다. 천장에 달린 은은한 조명 덕분에 따스한 분위기가 화랑 내부를 포근히 감쌌다.

홍철수 사장과 그의 여동생 홍미숙이 오한결을 반갑게 맞았다.

“한결 학생 어서 와요!”

두 사람과 인연은 오한결의 대학생 시절부터였다.

가난한 미대생이었던 오한결은 미술재료를 저렴하게 구하기 위해 이곳저곳 발품을 많이 팔고 다녔다. 어느 날, 우연히 삼각지를 헤매다 아트화랑에 들어온 오한결은 깔끔한 실내장식과 고급 유화 재료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젯소, 사포, 캔버스, 팔레트, 미디움, 유화 물감 등

유화 재료들이 오한결의 눈에는 보석처럼 빛나 보였다.

평소 국산 제품인 신화유화물감 밖에 모르던 오한결은 윈저 앤 뉴튼, 렘브란트 등 값비싼 해외 제품을 넋을 놓고 바라봤다.

물감을 만지작거리며 망설이는 오한결에게 홍철수 사장이 조심스레 다가왔다.

“미대생인가요? 역시 좋은 물감을 알아보는군요.”

“아…… 네. 근데…… 이거 많이 비싼가요?”

“국산보다 두세 배 비싸요. 물 건너온 놈들이라.”

잠시 망설인 오한결은 남아 있는 자존심을 쥐어짜며 대답했다.

“지금 당장 필요한 건 아니니까……. 그냥 물건만 구경하고 갈게요.”

묵묵히 대화를 듣던 홍미숙이 레몬차를 건네며 미소 지었다.

“좋은 재료는 좋은 사람에게 가야죠. 이 물감 한 번 써 보시겠어요? 비용은 나중에 여유 있을 때 주셔도 돼요. 대신, 꼭 사용 후기를 들려주셔야 합니다.”

오한결이 머뭇거리며 답했다.

“……아니에요. 그건 너무 염치없죠.”

기어이 오한결 손에 각종 미술 재료를 쥐여주셨던 홍철수 사장님.

나중에 물건값을 드리려고 찾아갔지만, 그들은 돈을 받지 않았고, 오히려 오한결에게 따스한 위로와 차를 대접했다. 외롭고 불안했던 그 시절. 오한결의 마음을 따스하게 만들어준 그들에게 그는 언제나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반드시 은혜를 갚고 싶었다.

그래서 홍철수 사장님의 문자를 받자마자 부리나케 아트화랑으로 달려온 것이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온 오한결에게 홍철수 사장이 유화 물감을 건네며 말했다.

“한결 학생에게 주는 선물이야. 절대로 부담 갖지 말아요.”

책상에서 뭔가를 적던 홍미숙이 펜을 내려놓고 오한결을 쳐다봤다.

“오빠한테 소식을 들었어요. 미국에 일자리를 구했다고요. 이거 서운해서 어쩌지…….”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본 오한결이 옅은 미소로 말했다.

“아……. 미국이요? 그게……. 저는 한국에 계속 머물기로 했어요. 갑작스럽게 계획이 변경돼서요. 뒤늦게 말씀드려서 죄송해요.”

홍철수와 홍미숙은 몹시 놀란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혹시 문제라도 생긴 거면 말해줘요.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아뇨, 전혀 문제없어요. 한국에서 해야 할 일이 남아서요.”

“……정말이죠?”

“저는 여기서 예술가로 성공할 겁니다. 다시는 도망치고 싶지 않아요.”

젊고 매끈한 자신의 손을 보며 오한결은 생각에 잠겼다. 뉴욕 식당에서 궂은일을 하며 온갖 상처와 굳은살로 흉물스럽게 변한 자신의 예전 손이 생각났다.

“고생은 한 번으로 충분해요.”

홍철수와 홍미숙은 거침없이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는 오한결이 낯설게 느껴졌다. 오한결이 잠시 눈을 감고 회귀 전 타임스퀘어에서 만난 행위 예술가를 떠올렸다.

“진정한 예술이 뭔지 이해했거든요. 이번엔 무조건 예술가의 자존심을 지켜보려고요.”

“…….”

“그리고 아트화랑이 너무 좋아요. 홍철수 사장님과 홍미숙 누나도 좋고요.”

홍미숙은 누나라는 말에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30대 중반이고 동안인 홍미숙에게 누나라는 호칭이 어색하지는 않았지만, 평소 낯을 가렸던 오한결이 불쑥 그런 친근한 표현을 거침없이 사용하자 어색함이 느껴졌다.

홍철수가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우리가 한결 학생한테 고마운걸. 예전에도 말했지만 나와 여동생은 화가 지망생이었어. 지독하게 가난했던 젊은 시절에 화가의 꿈을 접고 장사를 시작했지. 한결 학생을 알고 나서 무뎌진 그때의 감정이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아. 뭐랄까, 설렌다고 할까.”

따스한 커피를 오한결 앞에 내려놓으며 홍미숙이 말했다.

“맞아, 한결 학생 덕분에 화가에 대한 아쉬움이 많이 사라졌어. 옆에서 이렇게 지켜만 보는 것도 큰 힘이 되더라고. 그럼, 미국에 안 간다니까 이렇게 계속 볼 수 있겠네.”

감동한 오한결이 가방에서 주섬주섬 스케치북을 꺼냈다.

진정성 있는 선물을 하고 싶었다. 천재 예술가 오한결로 이곳에 왔으니까, 평생 소장할 수 있는 작품을 그려주고 싶었다.

“제가 선물 하나 해드려도 될까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두 사람에게 오한결이 스케치북을 흔들어 보였다.

“두 분을 그려주고 싶어요.”

그들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쑥스럽지만, 한결 학생의 그림 선물이라면 마다할 수 없지.”

두 사람을 바라보는 오한결의 표정이 비장했다. 오한결이 연필을 손에 쥐자 정확하게 대상을 스케치했던 과거의 경험들이 손끝에서부터 생생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오한결은 그들과 공간을 감싸고 있는 빛을 읽기 시작했다.

빛의 화가 ‘렘브란트’처럼.

빛의 방향과 어둠의 농도까지 모두 정확히 묘사해 환상적인 인물화를 그릴 예정이다. 오한결의 손끝에서 빛의 마법이 시작될 것이다.

연필심이 스케치북의 거친 표면을 무심히 스쳐 가자, 감각적인 선들이 화면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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