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 1. 군인 할증
* * *
밟았을 때 바로 안 터지는 지뢰 같은 거, 영화에서나나오는 설정 아니었나?
왜 그딴 비상식적이고비전술적인물건이 아주 천연덕스럽게 등장하는 건데?
그리고 저 냉철쿨시크유능해보이는엘프저격수는 왜 그딴 걸 당연하다는 듯이 밟고 나자빠졌단 말인가?
“아 그러시구나……. 근데 저한테 뭘 어쩌라는 거죠…?”
나는 조금 어이가 없어서 베르쿠트에게답했다.
대충 저지뢰밟은등신은갖다버리고, 그냥 내 갈 길만 가면 만사 해결이지 않을까?
굳이 내 목숨을 걸어가면서 처음 만나자마자 총구를 들이미는,
버릇 없고 괴상한 귀 긴 괴물 따위를 구해줄필요가 있을까?
일단 내게는 장갑차가 있다. 웬만한 대인 지뢰 정도는 끄떡없다.
비록 저 짐덩어리엘프가내 앞길을 가로막고 있다지만, 적당히 후진해서 빠져나가면 될 것이다.
그렇게 마음 먹은 나는 베르쿠트를경멸스럽게 쳐다보며 단언했다.
“아… 저는 갈 길이 급하니까 이만 가볼게요.”
딱히 갈 곳은 없지만, 적어도 지뢰 밟은 엘프같은 물건과는 최대한 멀리 떨어지는 게 생존에 이로울 것이다.
“자, 자, 자, 잠깐마안…!”
내가 미련 없이 떠나자 베르쿠트가다급하게 말했다.
“도, 도와줘어…!”
베르쿠트는꽤나 간절한 얼굴이 되어 나를 올려다봤다.
“싫은데.”
하지만 어림 없다. 알량한 동정심 따위로 나를 어떻게 해보려 했다면 유감이다.
나는 네놈이 불쌍하거나 말거나, 그딴 것엔 전혀, 조금도 신경쓰지않으니까!
“어, 어째서…….”
베르쿠트는당혹스런얼굴이 되어 나를 쳐다봤다. 아까와는 다르게 조금 울먹이는 얼굴이다.
“그야, 만나자 마자 총구부터 들이미는 인간을 도와줘봤자얻을 게 없잖아?”
나는 장갑차 위에 쪼그려 앉아 베르쿠트를내려다봤다.
“그건…! 내가… 명령을 받고 있으니까 어쩔 수 없는 거라고…….”
베르쿠트가억울하다는 목소리로 항변했다.
하지만 어림 없다.
“있지, 나도 군인 출신이거든. 그래서 잘 알아. 민간인들한테 군인들이 협조를 요청 하면 보통 어떻게 반응을 하느냐….”
누구는 군 생활을 안 해봤는지 아느냐? 이 어리석은 것아.
잘 보거라.
이것이 바로 민간인의 전투수행KnowHow다.
“민원 넣겠습니다.”
나는 싸늘한 얼굴로 베르쿠트를내려다보며 선언했다.
민원이야 말로 민간인이 꺼낼수 있는 가장 포악하고 잔인한무기다.
“엑, 에에엑…? 그, 그치만! 군사작전구역에들어온 사람을 통제하는 것이 내 임무인데……! 어째서민원을…….”
베르쿠트가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내게 말대답을 했다.
감히 민간인 님께 말대답을 해?
미쳤습니까? 솔져?
“와아아놔아아아……! 어이가 없네~ 당신이 지뢰밭에전세 냈어? 내가 가겠다는데! 당신이! 뭔데! 막고! 난리야? 어? 괜히 지뢰나 밟아 가지고어?이제는 민간인한테어?목숨 걸고 살려달라? 그러다가! 어? 나 다치면? 당신이 책임질거야? 어?”
나는 순식간에 진상 민원인으로 돌변하여 베르쿠트를몰아세우기 시작했다.
역시 민원도 찔려본 놈이 제대로 찌르는 것이다.
수 없이 많은 민원에 시달려 온 나는 진상도 아주 발작 수준으로 게걸스럽게 떨어대는 고급 스킬을습득하였다.
“그, 그건…… 여긴 지뢰밭이라 위험하니까…… 민간인을 통제하는 것뿐이고……. 군사구역이니까일단은 군 소유의 땅이고…….”
“참~~!! 나~~!! 지뢰밭이고, 나발이고 당신이 오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잘 가고 있었거든?? 당신이 와서 위험해진거거든!! 내가 지뢰 밟았어?? 당신이 밟은 거잖아!! 그리고오군 소유?? 구우우운소오오오유우우우우우??? 내 세금 내고 굴러 가는 내 나라내 군대땅에서내 나라 국민이 발도 못 들인다는 게 말이나 돼?? 그럼 세금 토해내! 세금 돌려줘어!!”
사실 여기서 세금 내본 적 없지만.
“어…… 긋… 그으으…… 그…… 죄, 죄송합니다…….”
할말이 없어진 베르쿠트가결국 고개를 푹 숙인 채 나에게 사과했다.
내가 이깄다! 내가 이깄으!
“그럼! 나는 이만 가볼 테니까그렇게 알도록!”
그렇게 선언한 나는 베르쿠트에게서쌩하니돌아섰다.
장갑차 해치를열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안에 착석했다.
그리고 잠망경너머로 전방의 시야를 확인했다.
전방에는…
“우으으으…….”
베르쿠트가잔뜩 울상이 되어서 이쪽을 아른거리는 눈동자로 쳐다보고 있었다.
아주 간절하게.
“…….”
알량한 동정심 따위에는 흔들리지 않기로 굳게 마음을 먹었다.
나는 이래봬도매몰찬 녀석이다. 한 번 결심한 것에는 마음을 굽히지 않는다.
“아으으……. 어, 어떡하지…….”
베르쿠트가새빨간 눈동자를 축축하게 적셨다.
곤란하다는 얼굴로자신이 밟은 지뢰와 나를 번갈아 쳐다봤다.
입가를 삐죽거리며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지뢰를 밟은 한 쪽 발을 떼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 하고 있다.
꼴에 군인이면서 혼자서 뭐, 어떻게 못 하나?
무전을 쳐서 동료를 부른다던가, 그런 거 있잖아…. 아무 것도 못 하나? 등신인가…?
대충 이 나라의 안보 수준이 가늠되는 순간이었다.
“하아…….”
보다 못한 나는 결국 해치를열고 장갑차 밖으로 기어나왔다.
그래, 이건 동정심이 따위가 아니다.
저 멍청한 모습을 보고서,
더 이상 베르쿠트를위험대상으로 분류하지 않았을 뿐이다.
인간은 한심한 상대를 보면 가만히못 보고 넘어가는 나쁜 버릇이 있다.나도 예외는 아니다.
“어이…… 귀잽이…….”
장갑차를 까고 나온 나는 베르쿠트를내려다보며 낮게 말했다.
“귀, 귀잽이가아니라 베르쿠트다…!”
베르쿠트는꼴에 자존심이라고있는지, 자신의 이름을 떠들어댔다.
“니가 지금 자존심 챙길 팔자야?
“아, 아니다…….”
베르쿠트가귀를 축 늘어뜨리며 나를 올려다봤다.
“자, 그럼 부탁하는 사람의 예의를 보여야겠지?”
“무, 무슨… 예의……?”
베르쿠트는아무 것도 모르겠다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하아……. 그걸 내 입으로 말하라고?”
민망한데…….
“자, 잠깐만! 나한테 난폭하게 굴 생각인 거야? 에로 망가처럼!”
이쪽 동네 엘프들은다 정신병자인가?
아니면 이 놈이 유독 지적 수준이 떨어지는 열등 엘프인건가?
“돈이다! 돈! 헛소리 하지 말고 돈 내놔!이멍청아!”
돈이 최고야! 웃기지 마!
“앗, 뭐야…. 괜히 겁 먹었네. 돈이라면 줄게.”
베르쿠트는의외로 순순히 자신의 전투복 하의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들었다.
“엑? 이렇게 간단하게 줘도 되는 거야?”
도리어 내가 더 당황하여 놈에게 되물었다.
“어차피 난 살 것도 별로 없어.”
베르쿠트가먹먹한 목소리로 지갑을 통째로 나에게 던졌다.
“우와아앗!”
나는 넘겨 받은 지갑을 엉거주춤하게 붙잡았다.
국방색 천으로 짜 만든 낡은 지갑이었다. 내용물은의외로 두툼하다.
지갑을 열어 내부를 확인하자 안에는 왕관을 쓴 남자가 그려진지폐가 가득 들어있었다.
그것 외에는 그녀의 군인 신분증 정도가 고작이었다.
나는 베르쿠트의지갑을 들고 한 동안 멍하니 생각했다.
괜히 베르쿠트의눈치만 슬금슬금 보면서 쓸 데 없는 고민을했다.
“젠장…….”
이렇게쉽게 금전을 던져버리면 오히려 가져가기가미안해진다.
나는 베르쿠트에게다시 지갑을 돌려주면서 답변했다.
“됐어. 돈은 안 받을래. 나중에 술이나 한 잔 사라고.”
“엇…….”
지갑을 다시 돌려받은 베르쿠트가동그래진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봤다.
“그래서…. 어떻게 해주면 돼? 참고로 나는 지뢰 해체 같은 건 할 줄 몰라.”
그걸 알았으면 이러고 안 있지.
“……무전기 있어?”
“무전기?”
그러던 베르쿠트의입에서 의외의 말이 튀어나왔다.
“응.”
“무전기라면…… 분명 장갑차에 부착되어 있을 것 같은데…….”
확인해보지는 않았다. 아직 포탑에 들어간 적이 없기 때문에 확신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제식장비가 정확히 구비된 장갑차라면 분명 무전기 또한 부착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베르쿠트는무슨 이유로 무전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일까?
“…한 가지 확인할 게 있는데.”
“뭔데?”
“그걸로… 네 군 부대와 연락하려는 거야? 그러면 좀 곤란한데….”
베르쿠트는애초에 나를 압송하는것이 목적이다.
만약 녀석이 자신의 부대와 연락을 취한다면 나는 꼼짝없이 놈에게 잡히는 꼴이 된다.
그럴 바에는 그냥 여기에 베르쿠트를버리고 가는 것이 낫다.
녀석을 구해주고 도리어 내 목숨을 뺏긴다면수지타산이맞지 않는다.
“어… 그게… 그러려고생각했는데…….”
내 우려는 정확히 맞아 떨어진 듯했다.
물론 베르쿠트에게명백한악의가 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군인은 신상에 문제가 생기면 먼저 보고부터 하려고 드는 것이 본능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베르쿠트가순순히 그렇게 하도록 놔둘 수만은 없었다.
“잠깐만……. 이쪽도 사정이라는 게 있다고. 너네 부대 사람을 여기로 부르면 나는 꼼짝없이 압송당할거 아냐? 그런 건 좀 피하고 싶은데.”
“앗…. 음… 어…….”
베르쿠트는미처 거기까지는생각을 못했는지 고민에 빠졌다.
역시 나에게 구체적인 위해를 가할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다.
“그치만… 너를 압송하는게 내 임무다….”
아니……. 정정……. 저 새끼는 나를 죽이려는 생각만 하고 있다.
“그럼 저는 그냥 갈게요.”
미쳤다고 내가 목숨걸어가면서 귀잽이나구하고 나자빠졌냐?
“앗! 아아앗! 미, 미안! 안 할게! 안 할게!!”
그제야 정신을 차린 베르쿠트가손사래를쳐댔다.
“그, 그, 그럼… 그…… 제국자유마도노동총연맹에연락을 보내줘…….”
“뭐, 뭐요……? 마도노동… 뭐??”
처음 듣는 단어가 줄줄이 열거되자 머리가 둔해진다.
“제국자유마도노동총연맹.”
그러자 베르쿠트가한 번 더 강조했다.
“…뭐하는 곳이야.”
이름만 들어도 수상해보인다.
“말 그대로…… 제국의 자유 마도운용사들이가입해있는 곳이다.”
“마도운용사?”
어…… 대충 마법사 같은 건가?
그래도 꼴에 이세계라고마법도 있는 건가?
“응. 분명… 그들 중에 분해 마법을 쓸 줄 아는 사람이 있을 거야.”
“분해 마법이라…….”
아마도 베르쿠트는자신이 밟은 지뢰를 통째로 분해해버릴 생각인 것 같다.
확실히, 임기응변으로는 예리한 판단이다.
“좋아. 제국자유마도노동총연맹이란거지. 어떻게 연락하면 돼?”
“무전기로… 어… 잠깐만…… 거기는 무전이 안 되는데……. 어디 보자… 분명 전화번호가…….”
“…….”
베르쿠트가자연스럽게 자신의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어 전화번호를 찾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이 새끼는 진짜 등신인가??
“뭐야? 왜? 불만 있어?”
베르쿠트가낡고 깨진 자신의 휴대폰을 은근슬쩍 가리면서 새초롬하게 물었다.
괜히 자신의 구닥다리 휴대전화에 자격지심을 가지는 듯한데,
문제는 그게 아니다.
“……전화가 있으면 처음부터 쓰면 됐잖아! 이 멍청아!”
난 베르쿠트에게버럭 소리를 질렀다.
“우읏…!”
베르쿠트는내 목청을 듣고서한 번 움찔하였다.
그러더니 불만스런얼굴로 나를 잔뜩 노려봤다.
“으우윽……. 그렇다고 소리를 지를 것 까지는 없잖냐……!”
베르쿠트가자신의 기다란 귀를 내려서 막으며 조금 울먹거렸다.
꼴에 엘프라고큰 소리에 민감한 모양이다.
“네가 멍청한 짓만 안 했어도, 내가 소리지를 필요도 없거든?잔말 말고 전화나 해!”
나는 괜히 나까지 멍청해지는 기분이 들어서 베르쿠트를채근했다.
“알았다!재촉 안 해도 할 거다!”
베르쿠트가짜증이 섞인 눈동자로 나를 한 번 흘기더니 전화에 귀를 가져다댔다.
나는 그런 그녀를 묵묵히 바라봤다.
엘프가휴대폰도 다 쓰는구나…, 하는 기묘한 감상과 함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