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19 9-11. 종장 =========================
9-11. 종장
유난히도 길었던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되었다.
로엘은 대륙통일 및 마계통일 더하여 양 대륙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토록 기다렸던 결혼식이 행해졌다.
신부들의 희망에 따라 혼례식은 각자 따로 거행되었다.
가장 중요한 마지막 차례를 두고 주변에서 말이 많았지만 로엘의 여인들은 다툴 것 없이 메이아에게 차례를 양보했다.
그녀가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인내했다는 걸 알기에.
더불어 그녀의 출신을 두고 왈가왈부하기엔 현재 메이아가 지닌 영향력이 너무나도 커졌다.
사흘에 걸친 성대한 결혼식 이후에 가이아 대륙과 마계 대륙이 많은 변화가 찾아들었다.
브리니아 왕국을 절반으로 축소하여 절반은 제국이 흡수하고 나머지 절반은 공국으로 격하시켰다.
새로 발족한 일명 브리니아 공국은 그토록 왕위를 바라던 자가 맡게 되었다.
“기존 브리니아 귀족들의 행적을 샅샅이 조사하여 시비를 확실히 가려라. 시작을 위해선 과거를 확실히 정리해야 한다.”
“신속히 처리하겠습니다.”
“파스텔 공작도 당분간 잘 부탁하네.”
“네, 이왕 맡게 된 일이니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클라임 후작... 아니 클라임 공왕의 명령 하에 귀족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기존의 후작파 귀족들은 클라임을 따라 공국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각자 한 단계씩 직위가 올랐다.
기존 브리니아의 잔재를 모두 정리함과 동시에 법률을 정비하고 각 지방의 관할구역을 재정비해야 했다.
인재가 너무나도 부족한 터라 파스텔 공작이 당분간 공국에서 머무르며 도와주기로 하였다.
바쁜 가운데 예전 후작파 귀족들이 클라임에게 말을 붙였다.
“다소 모양새가 다르긴 합니다만 결국 왕위에 오르셨군요.”
클라임으로선 브리니아 공국의 왕이 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어차피 로엘을 넘지 못한다는 건 예전에 인정한 바이고, 현 브리니아 공국의 영토만 하더라도 예전 빌로스 왕국보다 약간 작은 정도라서 결코 작은 나라가 아니었다.
클라임은 그토록 바랐던 푹신한 왕좌가 마음에 드는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엉덩이를 들썩였다.
“그러게 내가 뭐라 했느냐. 내 능력만으로도 충분히 왕이 될 수 있다 했지 않느냐.”
처음에 브리니아 공국의 공왕을 두고 브리튼 교와 빌로스 제국 사이에 많은 논의가 오갔다.
수많은 후보들 중에서 공왕의 자리에 가장 적합한 인물로 클라임이 거론되었다.
다스림에 있어 클라임만한 수완가는 없었기에 만장일치로 공왕이 되었다.
왕명을 이행하고 온 많은 귀족 및 기사들이 보고를 하러 찾아왔다.
“전하! 분부하신 대로 남쪽 지방 각 귀족의 행적을 조사해왔습니다.”
“잠깐. 방금 뭐라 했나?”
“네? 분부하신 대로라고 했습니다만.”
“어허, 그 전에 말이야.”
“그 전이라면 전하라고......”
“다시.”
“전하.”
“다시!”
“전하.”
“하하하하!”
전하란 호칭이 마음에 들었는지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들으며 기뻐하는 클라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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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아 대륙에서 변화가 일어난 것처럼 마계 대륙에서 변화가 찾아들었다.
가장 먼저 시행된 건 마계 7기둥 개편이었다.
카에라, 바문, 야나몬, 테네시스를 제외하고도 3자리나 비게 되었다.
3자리 중 2자리는 스랄스와 데킬라가 맡았다.
두 마족이 세운 공적이나 노련함, 무력을 감안하면 충분히 마계 7기둥의 일각을 맡을만 했다.
두 마족도 스스로 행한 일에 대한 보상인지라 감히 사양치 않고 흔쾌히 받아들였다.
나머지 한 자리를 누구에게 맡길까 고민한 결과 그란데 백작을 보내기로 했다.
사실 그란데 백작의 의향이라기 보단 그의 아내인 코르네의 영향이 컸다.
코르네는 여태껏 뒤에서 정보제공 및 각종 공작을 행해주었다.
대륙 통일에 미친 영향을 생각하면 자치령 하나쯤은 내주어도 무방했다.
코르네는 자신이 행한 모든 일의 공적을 그란데 백작이 한 걸로 쳐달라고 하였다.
손은 자신이 더럽히고 공적은 남편에게 돌린 셈이었다.
충분히 요구할 수 있는 공적을 쌓아왔기에 로엘은 흔쾌히 그란데 백작을 마계 7기둥으로 봉했다.
오랜 기간 쌓여 왔던 인간과 마족의 골을 메울 수 있는 좋은 전례가 될 거라 여겼다.
그란데 백작의 무력과 코르네의 수완이 더해지면 인간과 마족이 교류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고르오스의 땅을 지배하게 된 그란데 백작은 베네타의 성에 머무르고 있었다.
“여보, 각 지방의 4성급 부대장들이 인사를 하러 온다고 해요.”
코르네가 그란데 백작을 불러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란데 백작은 대답 대신 깊은 한숨만 내쉬었다.
“하아.”
로엘을 직접 섬기지 못하게 된 것이 아쉬워 매일 같이 한숨을 쉬고 있었다.
그란데 백작이 좀 더 위로 올라갔으면 해서 그간 많은 일을 해왔다만 그로 인해 주름이 늘어간다면 본말전도였다.
코르네는 다소곳이 손을 모으며 종종걸음으로 그란데 백작의 옆에 나란히 섰다.
“로엘 폐하 곁으로 돌아가고 싶으신 거죠?”
그란데 백작은 멍하게 있다가 한참 뒤에야 대답을 꺼냈다.
“괜찮소. 당신이 고생해서 만들어준 자리 아니오. 지금의 자리도 로엘 폐하께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자리이니 열심히 하리다.”
“그냥 돌아가도록 해요. 로엘 폐하께는 제가 대신 말씀드릴게요.”
“괜찮겠소?”
“제가 보고 싶었던 건 성공해서 기뻐하는 남편의 모습이었어요. 성공해서 오히려 한숨이 늘게 되면 본말전도죠.”
“미안하오. 대신 앞으로는 당신을 우선시 하리다. 이제부턴 계속 함께 지내주시오.”
“후후, 무리하시긴. 말만으로도 기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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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계 7기둥으로 승격한 스랄스는 렌던을 중심으로 삼게 된 스랄스의 땅을 다스리게 되었다.
로엘에게서 라이프트리를 양도 받았기에 덩달아 옛 마왕의 저택은 스랄스의 저택이 되었다.
렌던에 세워둔 라이프트리 위에서 스랄스와 타유아가 나란히 서있었다.
스랄스는 찬바람 몰아치는 가시나무 숲을 응시하며 말했다.
“마왕님을 따라가도 되었을 텐데 왜 그러지 않았나?”
타유아는 쪼그려 앉으며 무릎을 끌어안았다.
“따라갈 이유가 없었으니까.”
“이유라면 충분히 있지 않았나?”
“무슨 소리가 하고 싶은 거야?”
“뭐 네가 부정하는데 내가 구태여 입 밖에 낼만한 말은 아니지.”
한때 로엘에게 거절당하긴 했다만 생각보다 반동은 적었다.
동정심에 의한 일시적인 감정에 불과했던 모양이다.
타유아는 입술을 오므렸다 펴며 나름대로 생각에 잠겼다. 이내 곧 기운을 차리면서 폴짝 뛰듯 몸을 일으켰다.
“됐으니까 업무복귀하자. 관리해야 할 위험지대가 한두 곳이 아니잖아.”
굴란트와 로드리고, 데릭마이어가 로엘을 따라 인간계로 가면서 인재가 반으로 줄었다.
로엘이 남긴 라이프트리가 있다 한들 한동안 매우 바쁘게 지낼 수밖에 없었다.
스랄스는 가벼운 걸음으로 뛰어가는 타유아를 보며 걸음을 옮겼다.
“어이, 타유아. 뇌신의 창에는 익숙해졌나?”
“아직!”
“훗, 빨리 익숙해지게. 스랄스의 땅을 관리해야 하니까.”
“마계 7기둥 됐다고 머리 꼭대기에 서려고 하지마. 두개골 확 틀어버릴 거야.”
“그만큼 기운이 넘쳐나면 위로는 필요 없겠군.”
“처음부터 위로 받을 일조차 없었거든?”
“그래그래, 그런 셈 치자고.”
///
빌로스 황궁 안쪽에 위치한 황궁 수련장.
로엘은 황궁 수련장 앞에서 좌우로 왔다갔다거리길 반복했다.
“잘 돼야 할 텐데.”
지금 황궁 수련장 안에 있는 자는 레이아였다.
로엘이 레이아가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해 들은 건 결혼식 직후였다.
식을 마치고 장인어른들을 모시고 술자리를 가지게 되었었다.
합동결혼식인 만큼 많은(?) 장인어른들을 대하는 자리가 되었는데 거기서 술에 취한 울크가 한탄하듯 레이아의 비밀을 알려주었다.
취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한 말이었고 다른 자들은 내 딸이 최고니 마니 하는 언쟁 중이었던 터라 로엘에게만 전달되었다.
그 후에 로엘은 레이아에게 직접 물어 진위여부를 확인했다.
레이아는 침울해 하며 사실이라 대답했고, 로엘은 어렵지 않게 해결책을 제시했다.
‘너 드라고라 인장 때문에 독물이 곧 마나나 마찬가지라고 했었지?’
‘그렇긴 한데 갑자기 그건 왜 물어?’
‘내가 마계에 있을 때 히드라의 내단을 얻었어. 이걸 먹으면 아마 마나마스터급까지 노려볼 수 있을 거야.’
마나마스터가 되면 육체가 재구성된다.
마법은 7써클이 마나마스터 수준인 걸로 알고 있었다.
육체가 재구성되면 레이아가 가진 문제가 해결될 거라 여겼다.
하지만 마나마스터급으로 올라서려면 가진 기운의 양뿐만 아니라 본인 스스로의 깨달음이 필요했다.
만약 레이아가 넘쳐나는 기운을 다루지 못하게 된다면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계속 수련장 서성이고 있는 것이었다.
수련장 앞의 흙바닥에는 로엘의 신발자국이 어지럽게 나있었다.
“너무 늦어. 슬슬 끝나도 이상하지 않을 시간인데......”
섣불리 들어갔다가 레이아가 생각의 끈을 놓치기라도 하면 안 되기에 기다리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다.
몇 시간쯤 흘렀을까.
기다리다 지칠 즈음 수련장 문이 열렸다.
열린 문 사이로 이전보다 훨씬 말끔한 피부와 균형 잡힌 몸매를 지닌 여인이 걸어 나왔다.
로엘은 레이아의 밝은 표정에서 결과를 가늠할 수 있었다.
“잘 됐어?”
가늠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직접 그녀의 입을 통해 듣고 싶었다.
레이아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엄지를 척 올렸다.
“당연히 잘 됐지. 정확한 건 메델에게 진찰을 받아봐야겠지만 말이야.”
로엘은 레이아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꼬옥 잡아주었다.
“분명 괜찮아졌을 거야.”
“후후후, 천하의 로엘 황제가 안절부절 못하다니 별일인 걸?”
“나도 사람이야 왜 그래? 어? 너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문틈으로 봤지롱~.”
“끝나면 바로 나오기나 할 것이지.”
“이제 너 없는 동안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알겠지?”
말하면서 로엘의 손을 깍지 끼듯 마주 잡는 레이아였다.
그녀의 손을 통해 그동안 그녀가 품어왔던 감정이 전해져오는 것 같았다.
로엘은 레이아의 흐트러진 옆머리를 쓸어 넘기며 부드러이 웃었다.
“다시는 그럴 일 없을 거야.”
“흐음~ 믿기 힘든 걸?”
“이젠 돌아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거든.”
아도로스를 처리하면서 그가 빼내갔던 반영구 회로가 다시 돌아왔다.
한 번 발동되었던 반영구 회로였던 터라 또다시 아도로스의 정신세계로 들어가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대륙통일을 이룬 후에도 회귀하지 않았다.
로엘의 수명과 운은 전부 원래대로 돌아왔다.
이제부턴 여지껏 나아갈 수 없었던 미래를 만들어나갈 수 있게 되었다.
로엘과 레이아가 서로 마주 보고 있던 차에 황궁 내부에서 두 사람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저기 있다! 로엘! 레이아! 이리로 와!”
“레이아 너 혼자서 너무 오랫동안 독점하는 거 아냐? 시간배분은 지키라고.”
“어차피 이제 곧 업무시간이에요. 그 전에 모두 모여서 티타임이라도 가지죠.”
“그럴까? 메이아, 차 부탁해.”
“어휴, 언니. 메이아 이제 시종이 아니에요.”
목소리가 들려온 장소에는 다른 여인들이 모여서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다.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로엘의 주변은 항상 시끄러울 것 같았다.
여러 의미로 말이다.
로엘과 레이아는 서로를 바라보다 동시에 피식 웃었다. 그리곤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자들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