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17 9-9. 있다고 하지 않았었나? =========================
“있다고 하시긴 했는데 솔직히......”
“반신반의했다 이거지? 그래서 뇌신의 창을 가져온 거고.”
타유아는 풀이 죽어 고개를 푹 숙였다.
“네.”
“설명이 많이 부족하긴 했지. 어디 보자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되려나. 내가 침식화가 진행 중이라는 걸 깨달은 건 폭스와의 싸움 직후야. 처음에는 마검을 포기할까 했는데 고르오스와 싸우려면 꼭 필요할 것 같더라고. 그 와중에 여우불 능력을 얻게 되었지. 여우불을 사용하면 마검의 마기를 태울 수 있을 것 같았어.”
여우불은 사용자의 마기는 태우지 않는다.
마검의 마기가 몸에 침식한다 하더라도 여우불을 활용해 전부 태우면 침식화를 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다.
유령여우 일족을 처단할 때 일부러 무형검을 쓰지 않고 마기 블레이드에 여우불을 씌웠는데 침식화가 진행된 손바닥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검이 폭주를 일으키려면 가진 마기를 전부 침식화에 써야한다.
그때에 맞춰 여우불을 일으켜 마검의 마기를 전부 태웠다.
마기증폭은 마검 검신 자체에 깃든 능력이며 침식화와 감정증폭은 마검의 마기에서 비롯되는 능력이다. 마기가 없어진 작금의 마검에는 마기증폭 능력만 남게 되었다.
더 이상 침식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로엘의 말을 듣던 타유아가 의문을 표하였다.
“잠시만요. 그렇게나 예전부터 해결책을 알고 계셨다면 왜 알려주지 않으신 거예요?”
“침식당하지 않는다고 몇 번이나 말했어.”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지 그랬어요.”
“마검에도 의지가 있다는 걸 잊지마. 이 녀석이 마기를 전부 쏟아내기 전에 말해버리면 완전히 길들일 수 없기 때문이었어.”
“으음, 아도로스 님은 여우불 없이도 잘만 길들이셨던 것 같은데......”
“녀석은 혼령 타입의 고유능력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상성 상 정신 타입인 침식화가 안 통하는 자였겠지. 블러드리드가 혼령 타입의 시체술인 것만 봐도 알잖아.”
육체 타입이라 정신 타입의 공격에 취약한 로엘로선 다소 속이는 수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마검을 속이기 위해 감정증폭을 그대로 받아들인 탓에 상당한 시간을 무뚝뚝하게 지내게 됐지만 그만한 결과를 얻어낼 수 있었다.
설명을 마친 로엘은 메이아의 머리에 손을 올리며 시선을 허공에 두었다. 그러곤 멋쩍은 듯 콧잔등을 긁으며 말을 꺼냈다.
“그 뭐냐... 일단 폭주 직전이어서 다 듣긴 했는데......”
들었다는 건 메이아의 장황한 고백이었다.
메이아는 뒤늦게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운 말을 했는지 실감하며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그, 그게 말이죠. 계속 머릿속에 있던 말을 꺼낸 거랄까, 마왕님이 안 듣고 있다 생각해서 마음 편하게 말한 거랄까... 아우우......”
쥐구멍이라도 찾듯 허둥지둥대는 메이아였다.
로엘은 평소의 쓰다듦과 다르게 다소 흐트러진 손놀림으로 메이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음, 대답을 하자면. 뭐랄까. 나도 마찬가지야.”
“네? 다시 말해주세요.”
“두 번은 없어.”
“진짜로 못 들었어요.”
로엘은 한숨을 내쉰 후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메이아를 꼬옥 끌어안았다.
“앞으론 뒤가 아닌 옆에서 보도록 해.”
늘 듣고 싶었던 말을 듣게 된 메이아는 눈물자국 남은 얼굴로 환히 웃으며 힘차게 대답했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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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최후의 협곡 곳곳에서 마왕군이 고르오스 군을 제압하였다.
히드라와 따로 전투를 벌였던 로얄로더도 ‘히드라의 내단’을 들고 옴으로서 승리했음을 알렸다.
로엘은 남은 격전지를 돌아 전쟁이 끝났음을 알리고 병력을 모아 베네타로 향했다.
아직 정리해야 할 것이 많지만 실무와 관련된 부분은 마왕군 간부 및 후발대로 들어온 북쪽 마계 7기둥 3명에게 맡겼다.
로엘은 옛 마왕의 성에 들어서자마자 마왕의 서고부터 들렀다.
마왕의 성 지하에 존재하는 마왕의 서고는 두터운 아디만티움 문이 달려 있었다.
원형의 문 앞에 선 로엘은 문 중앙에 있는 봉인 마법진에 마왕의 표식을 가져다대었다.
지잉!
마왕의 표식을 가져다대자 봉인 마법진을 이룬 조각이 움직이면서 자물쇠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철컥!
로엘은 열린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마왕의 서고 안은 도서관에 준하는 책장과 서적이 가득했다.
수만 권은 되어 보이는 책 사이에서 인간계로 돌아갈 방법이 적힌 책을 찾아야 한다.
다행히도 책이 문자열 순서가 아닌 분야별로 분류되어 있어 찾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공간개방 마계&인간계]
제목만 봐도 마계와 인간계를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을 개방하는 방법이 적혀 있을 법한 책이었다.
마계어로 적힌 책자였으나 마계 생활을 하면서 글을 읽을 정도의 공부는 해뒀었다.
로엘은 책장을 하나하나 넘기며 내용을 확인했다.
제목대로 마계와 인간계를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을 여는 방법이 적혀 있었다.
공간을 열기 위해선 두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1. 마계와 인간계의 경계선이 얇은 곳에서만 실행가능.
2. 경계가 얕은 곳에서 마계와 인간계, 양측에서 동시에 그랜드 마스터급 이상의 기운을 방출.
경계선이 얇은 지역은 책자에 딸린 지도에 표시가 되어 있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베네타에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는 최후의 협곡 가장 깊숙한 곳이 있었다.
문제는 두 번째 조건이었다.
마계 쪽에선 로엘이 기운을 방출하면 되지만 인간계 쪽에선 그랜드 마스터급이 한정되어 있었다. 인간 중에서는 없으니 드래곤이 직접 나서서 시행해줘야 했다.
로엘이 돌아오길 원하는 드래곤이라면 베나티아가 있지만 그녀에게 소식을 전할 수 있느냐가 문제였다.
카에라의 땅에 서신을 보낼 구멍이 있긴 한데 이전에 보낸 서신이 도착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쯤이면 마기의 역류가 가라앉아 서신을 한 장 더 보낼 수 있긴 한데 베나티아에게 전해질 가능성은 희박했다.
로엘은 책자를 덮으며 중얼거렸다.
“되든 안 되든 시도는 해봐야겠지.”
로엘은 메이아를 불러다 종이와 잉크를 가져다달라고 한 후 서신을 작성했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한 달 후, 로엘은 최후의 협곡 깊숙한 곳에서 기운을 방출할 테니 인간계 쪽에서도 지정된 지역에서 기운을 방출해달라는 내용의 서신이었다.
작성된 서신은 전령의 손에 쥐여 주어 카에라의 땅으로 보냈다.
이제 한 달 뒤에 최후의 협곡 깊숙한 곳으로 가 서신이 전해졌길 바라며 기운을 방출하는 일만 남았다.
///
에메랄드 산맥에 위치한 둠러스의 레어.
베르나트는 둠러스가 유희를 나가며 맡긴 약초밭에 물을 주고 있었다.
“룰룰루~ 듬뿍 먹으렴. 특히 변비 약초 너는 더 빨리 자라야 해.”
200년 동안 봉인되어 있었기에 원래 수명보다 약간 더 살게 되었지만 이제 남은 수명은 얼마 되지 않은 편이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바랐던 게 전 드래곤 로드의 레어에서 여생을 보내는 것이었기에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오늘도 여유로운 하루를 시작하려던 때에 불청객이 찾아들었다.
“드래곤 로드의 레어에서 사는 마계 7기둥인가. 우스갯소리로도 못 쓸 광경이군.”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린 베르나트는 들고 있던 물뿌리개를 놓치고 말았다.
“다, 당신은!”
베르나트가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200년 전에 베르나트를 봉인한 인간 마법사.
그와 똑같은 모습을 한 자가 찾아온 것이다.
마법사는 대뜸 베르나트에게 구속마법을 행했다.
“홀딩.”
베르나트의 몸 주위에 마나의 밧줄이 생겨나며 그녀의 몸을 꽈악 묶었다.
3써클 마법으로 분류되는 구속마법이건만 이상하게도 벗어날 수 없었다.
200년 전과 같은 상황이었다.
그보다 베르나트는 200년 전의 인간이 아직도 살아있는 것에 의문을 가졌다.
“200년이나 지났는데 어떻게 살아있는 거지?”
“내가 만들어낸 블러드리드이기 때문이지.”
마법사가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훑자 변색마법이 풀리면서 벌건 피부가 드러났다.
베르나트는 마법사가 언급한 ‘내가 만들어낸......’이 귀에 맴돌았다.
그녀가 알기로 블러드리드를 만들 수 있는 자는 한 명밖에 없었다.
“아도로스?”
“뒤에 님 자가 빠졌구나.”
“당신이 왜 나를? 게다가 200년 전에 날 봉인한 것도 당신이었던 거야?”
아도로스는 안 좋은 기억이라도 떠올리듯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너도 알다시피 난 몇 번이나 마계 이외의 침공을 행했지. 결과는 참담했고 말이야. 특히 다른 차원에서 너희들이 배신했을 땐 말문이 막히더군.”
“자업자득이지. 난 용마전쟁 이후로 마계 7기둥에서 사퇴했어. 배신이라고 할 것도 없지 않아?”
“복수 차원에서 봉인했다 생각하나? 그럴 바엔 바로 죽였겠지.”
“그럼 무엇을 위해서 날 봉인했지?”
“대륙 정벌을 위해서. 예전처럼 단순히 영혼조각으로 부활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니 아예 반영구 회로를 만들었지. 미리 인간계의 힘을 빼놓을 생각으로 말이야.”
반영구 회로를 만들어 마계와 인간계의 존재들끼리 싸울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최종적으로 인간이 회로를 모으게 만들었다.
반영구 회로가 모이면 자신에게로 날아오게 해서 대면하게 장치해두었다.
회로를 모을 정도의 실력자를 힘을 잃은 아도로스가 이길 리 만무했다.
처음부터 마왕의 표식을 줄 생각이었던 거다.
마왕의 표식을 주면서 반영구 회로 중 하나를 빼내었다.
결과적으로는 반영구 회로 하나가 빠지면서 흐트러진 문양을 마왕의 표식으로 덧씌운 것이었다.
빼낸 반영구 회로는 44개의 목숨을 주는 불사의 인장이었다.
불사의 인장으로 죽는 것을 면한 아도로스는 인간계에 남겨두었던 블러드리드에 깃들어 때를 기다린 것이다.
아도로스는 베르나트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넌 예전부터 약한 주제에 기운 만큼은 많이 가지고 있었지. 기운을 내놓거라.”
“크윽.”
기본적으로 아도로스와 전대 마계 7기둥 사이에는 복종의 맹약이 걸려 있었다.
아도로스는 마계 7기둥이 죽어도 부활시켜주는 대신 아도로스의 뜻에 따라야 했다. 베르나트가 간단한 구속마법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승낙하지 않았음에도 저절로 기운을 제공하는 것도 전부 맹약에 의한 것이었다.
즉, 아도로스는 마기 저장고로서 베르나트를 봉인한 셈이었다.
베르나트는 기운이 다하는 것을 느끼며 아도로스를 노려보았다.
“내 힘을 가져도 인간계는 차지하지 못할 걸?”
“내가 병력 문제를 염두에 두지 않았을 것 같나? 혼자서도 마계로 이어지는 통로를 여는 방법을 알아냈지. 마계의 병력을 끌고 인간계를 칠 예정이니라.”
빌로스 제국이 강력하다 한들 연이은 전쟁 이후 마계의 마족들까지 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마계의 마족들을 동원하려면 마왕의 표식이 있어야 한다.
마왕의 표식이 있어야만 타 대륙 침공 시 병력 동원 조항을 이행할 수 있었다.
아도로스는 마계로 돌아가 로엘을 죽여 마왕의 표식을 되찾을 생각이었다.
아도로스가 사라진 후에 마왕 세력이 약해질 것 정돈 아도로스도 예상하고 있었다. 로엘이 마왕이 된다하더라도 마계 7기둥의 틈바구니에서 치이고 치여 지쳤을 거라 생각하였다.
익숙하지 않은 환경과 인간을 적대시하는 마족의 성향, 발목만 붙잡을 약소 세력.
지친 로엘이 베르나트의 힘을 흡수해 전성기의 힘을 되찾은 아도로스를 이겨낼 리 없었다.
아도로스는 곧 베르나트가 지닌 2500년 치 마기를 전부 흡수하였다.
마기를 모두 빨린 베르나트는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신음을 흘렸다.
“으으......”
아도로스는 앓는 소리는 내며 쓰러진 베르나트를 내버려둔 채 등을 돌렸다.
“남은 건 지저감옥으로 가는 것뿐이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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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나티아는 마계로 통하는 길을 여는 방법을 묻기 위해 둠러스의 레어를 찾았다.
그녀는 레어에 들어서자마자 쓰러져 있는 베르나트를 발견하곤 얼른 달려갔다.
“베르나트! 무슨 일이야?”
쓰러진 후로 상당한 시간이 흘렀는지 몸이 얼음장처럼 차갑고 반쯤 굳어 있었다.
베나티아는 마기가 전부 사라져 탈진했음을 알고 자신의 기운을 나눠주었다.
기운을 전해 받은 베르나트는 눈가를 파르르 떨며 겨우 눈을 떴나.
“베나... 티아?”
“이게 뭔 일이래. 그 많은 기운은 어따 두고 탈진해 있던 거야?”
“아도... 로스가......”
“일단 따뜻한 차라도 마셔. 몸이 따뜻해질 거야.”
베나티아는 베르나트의 등을 손으로 받쳐주며 따뜻한 차를 먹여주었다.
마른입에 수분이 스며들면서 약간이나마 기력이 회복되었다.
베르나트는 기침을 몇 번 하다가 급히 말을 전했다.
“아도로스가 인간계 침공을 노리고 있어. 당장 지저감옥으로 가서 그를 막아. 불사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목숨이 여러 개임을 잊지마.”
“당장 가라고?”
“얼른 가!”
베르나트가 호통을 친 후에 거친 기침을 하였다.
베나티아로선 그녀가 걱정되었지만 아도로스를 막으러 가는 게 급선무인 것 같았다.
혹시 몰라 몇 가지 약초와 먹을거리를 가져다놓았다.
베나티아는 걱정을 뒤로 하고 레어 바깥으로 나가 날개를 퍼덕였다.
지저감옥을 향해 날아가는 동안 베나티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인간계 침공을 노리려면 마계의 입구를 열어야 하는 거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