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14 9-8. 왜곡된 충성심 =========================
“메타폴이? 제길, 하필 이 타이밍에... 전원 메타폴을 피해 움직여라! 어설프게 건드렸다간 이 이상으로 분열한다!”
안 그래도 무식할 정도로 숫자가 많았다.
숲에서 튀어나온 숫자만 수 천에 달했는데 아직 전부 나온 것 같지도 않았다.
어디선가 미친 듯이 미리 분열해놓고 돌격해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라마가 메타폴을 하나씩 집어 크루다이 쪽으로 집어던지며 외쳤다.
“게인하르트! 계속 진격해라! 메타폴은 내가 처리하마!”
“메타폴을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들은 전부 측면으로 빠져라! 나머지는 나를 따라 무너진 성벽으로 돌진한다!”
“와아아!”
그라마가 던진 메타폴이 크루다이 성벽 위에 찰떡처럼 떨어졌다.
철퍼덕!
카에라는 당황하는 병사들을 향해 외쳤다.
“건드리지 마세요! 성벽 위에서 분열이라도 하면 곤란해요! 공격하지 말고 성벽 아래로 밀어내세요!”
그러나 걱정과 달리 메타폴은 카에라 군을 공격하지 않고 스스로 성벽 너머로 추락했다. 그리곤 게인하르트의 부대를 공격하기 위해 통통 튀며 이동했다.
나타난 메타폴은 오로지 게인하르트의 부대만 공격했다.
게인하르트는 메타폴에게 막혀 더 이상 진격할 수 없었고, 1만에 달하는 병력이 차츰차츰 검은 점액으로 물들어갔다.
카에라는 메타폴 떼의 행동을 관찰하며 중얼거렸다.
“마물답지 않게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움직이고 있어요.”
“설마 마물이 우릴 도와주러 온 건 아니겠죠? 아하하,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질 리가 없긴 한데......”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놀라운 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숲에서 나오는 메타폴 행렬이 끝나자 이번에는 마족 병사들이 뛰쳐나왔다.
마족 병사들은 각기 다른 3가지 색의 깃발을 들고 있었다.
바문, 야나몬, 테네시스의 깃발이었다.
스랄스가 서열 5위, 6위, 7위의 마계 7기둥을 설득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바문, 야나몬 테네시스는 각자 기운을 끌어올리며 천둥과도 같은 목소리를 내었다.
“고르오스에게 벌벌 떨던 시절은 잊어라! 마계 대륙 전체에 우리의 용맹함을 알릴 기회로다!”
“메타폴이 적을 교란하는 틈을 놓치지마라!”
“전군 돌격하라!”
메타폴에 더하여 북쪽 마계 7기둥 3명의 공격까지 시행되었다.
숲 가까이서 메타폴을 걷어내던 그라마는 이마에 핏대를 세웠다.
“북쪽 마계 7기둥들이 어째서 한데 모인 것이냐! 론메일 그 자식은 이런 일이 벌어질 동안 뭘 했냔 말이다!”
메타폴 사이에서 로브를 두른 리치 한 명이 태연하게 걸어 나오며 말했다.
“론메일이라면 벌써 고인이 되었지.”
그라마는 리치를 유심히 쳐다보다가 그의 정체를 기억해냈다.
“스랄스인가. 론메일을 죽인 게 네놈이라면 설마......”
스랄스는 짐작이 맞았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 양손에 업화의 불꽃을 둘렀다.
“전력을 다하는 게 좋을 게야. 그러지 않으면 금방 죽을 거다.”
“기고만장하지마라. 내가 폼으로 강완의 거인이라 불리는 줄 아느냐.”
“그 별명도 오늘까지만 사용할 수 있겠군.”
스랄스와 그라마가 일대일 대결에 들어가면서 게인하르트 부대의 마나마스터 2명 중 한 명이 묶인 셈이 되었다.
게인하르트는 바문, 야나몬, 테네시스가 전장에 합류한 것을 목격했다. 뿐만 아니라 카에라도 성벽에서 내려와 진격해오고 있었다.
마계 7기둥은 기본적으로 마나마스터급 이상은 된다.
즉, 스랄스를 포함하여 총 5명의 마나마스터를 상대해야 하는 셈이었다.
병력의 차이는 말할 것도 없다.
어찌된 게 메타폴이 적의 명령을 듣는 양 게인하르트의 병사들만 공격하고 있어서 사실상 적은 몇 배나 더 많은 병력을 지니고 있다 보면 되었다.
“스랄스가 뼈를 되찾으러 가는 김에 하위 3명을 설득한 건가. 젠장, 이대로 가다간 전멸이야.”
사실은 하위 3명을 설득하러 간 김에 뼈를 되찾은 거지만 게인하르트에게 있어선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게인하르트는 갈등에 빠졌다.
이대로 후퇴했다간 이 많은 병력이 고르오스의 땅으로 진격해버린다.
그렇다고 여기서 게인하르트가 이들 모두를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게인하르트는 서서히 줄어드는 병력을 보며 제3의 선택을 하였다.
“점령한 요새까지 후퇴해라! 농성을 해야만 한다! 이들을 결코 고르오스 님이 있는 곳으로 보내선 안 된다!”
성을 끼고 싸운다면 진다하더라도 시간은 벌 수 있다.
현명한 판단이긴 했으나 명령을 내리는 시점이 너무 늦었다.
적어도 마계 7기둥들이 전장에 섞여들기 전에 내려야 했을 명령이었다.
벌써 전장 안에 파고든 마계 7기둥은 가차 없이 게인하르트의 병력을 쓰러뜨리고 있었다.
메타폴의 점액 때문에 게인하르트의 특기인 진법은 예전에 봉쇄당한 상황이었다.
후퇴 명령을 내렸지만 최후방의 병력만 등을 돌렸을 뿐이고 나머지는 마계 7기둥군... 아니 연합군 병사들과 경합하느라 발을 뺄 수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스랄스와 싸우던 그라마가 업화의 불꽃에 가슴이 꿰뚫려 뒤로 넘어가고 있었다.
게인하르트는 뒤늦게 가장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전황은 마왕이 참전한 순간부터 변해있었구나.”
후퇴하여 시간을 끄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게인하르트는 이대로 죽어 적의 시체술에 조종당할 바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택했다.
폭발 땅벌레를 소환하여 명령을 내렸다.
“조종당할 바엔 자결을 택하겠다. 내게 붙어 폭발하거라.”
소환된 폭발 땅벌레는 게인하르트를 안 듯이 휘감곤 몸을 말아 폭발하였다.
콰광!
///
한때 불리하다 생각되었던 크루다이 교전은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
카에라는 최근 10년 간 교류가 없었던 세 마계 7기둥을 앞에 두고 감사의 말을 전했다.
“다들 고맙습니다. 여러분이 제때 와준 덕에 살았네요.”
“마왕과 한 배를 타게 된 이상 당연한 지원이지. 동의하게 된 건 저 친구들 때문이지만.”
세 마계 7기둥이 전장 한가운데에 서있는 두 남녀를 가리켰다.
한 명은 스랄스였고, 다른 한 명의 여성은 아주 익숙한 얼굴이었다.
“메이아?”
카에라는 스랄스와 함께 서있는 자가 메이아임을 확인하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죽은 줄 알았던 아이가 버젓이 살아 연합군과 함께 왔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메이아는 소환했던 상급 정령을 되돌려 보내며 카에라에게로 다가와 두 손을 모았다.
“간만에 뵙네요, 카에라 님. 전투 중이라 바로 인사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살아있었군요, 메이아. 다행이에요. 죽은 줄 알고 얼마나 상심했는지 몰라요.”
“저... 다른 학생분들 일은......”
“메이아 탓이 아니랍니다. 지금은 메이아가 무사히 돌아온 것만으로도 매우 감사하고 있답니다. 마왕님이 이 소식을 들으면 굉장히 기뻐할 거예요.”
“아참, 로엘 폐하는 어디 있나요? 당장 도우러 가고 싶어요.”
“로엘 마왕님은 지금 베네타로 가고 있답니다.”
바문은 쉬지 않고 바로 출발하자 제안하였다.
“고르오스의 본대가 회군 중이라는 건 우리도 들었다네. 바로 출발하도록 하지. 카에라 자네는 뒤처리를 해주게나. 긴급 피난을 행한 터라 주민들을 원래 마을로 돌려보내야 하니 할 일이 많잖은가.”
카에라는 고개를 끄덕인 후 메이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가서 마왕님께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도록 하세요. 이번에야 말로 놓치지 말고 제대로 마음을 전하도록하세요.”
카에라의 응원은 메이아에게 큰 힘이 되었다.
곧 로엘과 재회할 수 있다는 기대감과 그를 도울 정도로 성장했다는 자신감이 메이아로 하여금 당당한 대답을 내놓게 만들었다.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어요.”
///
북상하던 라이프트리는 베네타 근처에 있는 최후의 협곡에 들어섰다.
먼 옛날, 초대 마왕자리를 놓고 수만 명의 마족들이 물고 물리는 혈전을 벌였던 장소였다.
협곡은 깎아낸 듯 가파른 절벽이 겹겹이 솟아올라 있었으며 절벽과 절벽 사이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심연이 담겨 있었다.
수천 년 전의 싸움으로 인한 혈향이 아직도 남아있는 듯 불길한 공기가 감돌았다.
협곡의 험난함은 라이프트리 상층부의 마왕 저택 창문으로도 보일 정도였다.
로엘은 저택 안 회의실에 앉아 창문 너머로 최후의 협곡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라이프트리의 높이보다도 깊은 협곡을 보며 말했다.
“라이프트리로 협곡을 넘는 건 무리겠어.”
마왕군 간부들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로엘의 말에 동의했다.
“여기선 병력만 따로 움직이고 라이프트리는 안전한 장소로 옮기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왔던 길로 되돌려 보내는 게 가장 안전하겠군. 필요한 병력만 내리고 라이프트리는 되돌려 보내도록 해.”
“네. 그리고 마왕님.”
“음? 뭐 또 할 말이라도 있나?”
마왕군 간부들은 하고 싶은 말이 있었으나 쉽사리 꺼내질 못했다.
로엘의 침식화는 사실로 확인되었으며 오른팔까지 올라왔었다고 하였다.
팔을 넘어 어깨와 목에 닿으면 침식화가 가속화되어 단숨에 이성을 잃을 가능성이 높았다.
반면 로엘은 고르오스를 치기 위해 마검 사용을 고집하고 있으니 말을 꺼내기가 애매했다.
모두가 고민하고 있던 차에 굴란트가 가까스로 말을 꺼냈다.
“마왕님, 벌써 침식화가 오른팔까지 올라왔었다고 들었습니다. 계속 마검을 사용하시면 위험합니다.”
로엘은 타유아가 결국 모두에게 말했음을 알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시선을 받은 타유아가 고개를 떨구었다.
로엘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마검에 휘둘릴 일은 없으니 걱정마라.”
“침식화가 오른팔 이상 진행되면 그 뒤론 금방 온몸으로 퍼집니다.”
“휘둘릴 일은 없다고 했을 텐데?”
“만약을 위해서입니다.”
“날 믿지 못하나?”
“...”
굴란트의 성격상 믿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굴란트로선 더 이상 로엘의 능력을 의심하는 듯한 발언은 할 수 없었다.
물러나기 앞서 한 가지만 확실히 해두고자 했다.
“침식화 당하지 않을 확실한 방법이 있으십니까?”
“있어.”
“어떤 방법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있다고 했는데도 뭘 그리 의심하는지 모르겠군.”
“죄송합니다.”
“달리 또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자가 있으면 지금 해두도록 해.”
“없습니다.”
“그럼 회의를 마치도록 하지. 다들 맡은 부대를 이끌고 최후의 협곡에 오르도록.”
로엘은 먼저 로얄로더와 날아갈 동선을 논의하기 위해 먼저 저택을 나섰다.
고르오스 군의 본대와 아폴로의 부대가 지척까지 다가왔고, 그들이 베네타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으려면 최후의 협곡에서 맞이해야 했기에 결전은 최후의 협곡 안에서 펼쳐질 예정이었다.
고르오스가 다른 마계 7기둥보다 한두 수 위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 걸 알기에 만반의 준비를 갖춰놔야 했다.
로엘이 먼저 나갔으나 간부들은 아직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회의장에 남은 간부들은 여전히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역시... 거짓말이겠지?”
마검의 침식화를 막을 수 있는 방법 따윈 없다.
로엘은 이미 마검의 능력에 매료되어 놓을 수 없는 상황까지 이른 게 분명했다.
마왕군 간부들은 한숨을 푸욱 내쉬며 걱정부터 앞세웠다.
“침식화가 더 진행되기 전에 싸움이 끝나길 바랄 수밖에 없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