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12 9-8. 왜곡된 충성심 =========================
“페네르치 님이 탈주를? 알겠습니다. 당장 수색대를 편성하겠습니다.”
“지휘관이 부재중이니 임시로 내가 부대를 지휘하겠다. 고르오스 님께도 그리 전해라.”
4성급 부대장은 카잔 지원 건은 꺼내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페네르치의 부대에 카잔을 지원한다는 지시는 내려진 적도 없었기에.
///
카잔의 부대가 한창 공성병기를 후방으로 옮기고 있을 때.
땅을 울리는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쿠웅! 쿠웅!
부대를 지휘하던 카잔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시야 안에 열린 성문 너머로 라이프트리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 들어왔다.
마왕군이 예정보다 이틀이나 빨리 도착한 것이다.
카잔은 당황하여 급히 정찰대를 불렀다.
“정찰대! 정찰대를 불러라! 예정보다 이틀이나 빨리 도착했지 않느냐!”
카잔의 측근들이 사방에 퍼졌다가 급하게 다시 돌아왔다.
“정찰대 소속이 한 명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어제까지 있던 놈들이 어디로 갔단 말이냐!”
“아, 알 수가 없습니다!”
카잔은 문득 정찰대가 모두 아폴로의 부대에서 뽑혔다는 걸 기억해냈다.
당시에는 효율을 위해서라면 당연하다 여겼는데 사실은 정보조작을 위한 행위였던 것이었다.
속았음을 안 카잔은 인상을 구겼다.
“그 입만 나불거릴 줄 아는 놈이 감히! 감히 날 속여? 날 속였단 거냐!”
“지, 진정하십시오. 그래도 지금 페네르치가 지원군을 몰고 오는 중이잖습니까. 지금이라도 공성병기를 요새로 되돌리면 됩니다.”
“놈들은 오지 않아. 날 제거하기 위해 수작을 부린 것이단 말이다!”
“그, 그런!”
도망이냐, 응전이냐.
카잔은 양자택일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도망치려던 자에게 선택권을 줄 정도로 전장의 여신은 자비롭지 못했다.
요새가 비어있음을 알아차린 마왕군 측에선 수비를 할 것도 없이 바로 공세 나섰다.
그 증거로 라이프트리 상층부에서 로얄로더가 날아올라 포효하였다.
“쿠워어어!”
방어하기 위한 산등성이가 반사벽 역할을 하여 포효가 메아리쳤다.
안 그래도 괴기스러울 정도로 커다란 포효가 메아리치니 카잔의 병력은 금세 겁에 질렸다.
거대 공성병기를 옮기는 부대가 창공을 가로지르는 로얄로더를 뿌리칠 수 있을 리 없었다.
심지어 상대는 방심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카잔의 부대가 이동하는 것보다 라이프트리의 이동속도가 더 빠른 걸 알고 라이프트리의 속도에 맞춰 날고 있었다.
라이트프리의 뿌리가 요새 성벽을 무너뜨리며 카잔 부대의 끄트머리에 도달했다.
동시에 로얄로더가 속도를 붙여 카잔의 머리 위 상공까지 날아들었다.
로얄로더 위에는 당연히 로엘이 서있었다.
로엘은 로얄로더의 머리 위에서 뛰어내리면서 마검을 뽑았다.
떨어지는 위치는 카잔의 머리 위였다.
카잔은 위험을 느끼곤 반격 대신 회피를 택했다.
“이런!”
카잔이 옆으로 몸을 날리자 그가 서있던 자리에 로엘의 무형검이 작렬했다.
콰지지직!
무형검이 작렬한 맨땅이 지진이라도 맞이한 양 갈기갈기 찢어졌다.
거칠게 갈라진 땅에서 무형검의 위력이 짐작되었다.
카잔을 향한 분노를 대변하기라도 하듯 몸 주변에 흑염의 형태를 띤 마기가 피어올랐다.
마기가 보이지 않는 검, 마기가 피어오르는 육체.
역설적인 모습이 이 세상 것이 아닌 듯한 모습을 연출하였다.
로엘은 한 걸음씩 천천히 발을 옮기며 연옥의 온도를 옮긴 듯한 분노를 내비쳤다.
“네가 메이아를 죽였느냐.”
꼴사납게 바닥을 뒹군 카잔이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면서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 버려졌군. 아폴로 그 자식이 날 속였어. 처음부터 그 자식이 아군이라 생각한 내가 바보였지. 고르오스의 지시였나? 아니면 페네르치와 손을 잡았나? 처음부터 속일 생각이었을지도. 그래, 하나만큼은 확실하지. 난 버려졌어. 버려졌단 말이다!”
고래고래 고함을 치던 와중에 카잔은 어깨가 불에 지진 듯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어느새 로엘의 검은 앞으로 뻗어져 있었고, 카잔의 오른팔이 잘려나가 있었다.
로엘은 무형검으로 카잔의 팔을 날려버린 후 무덤덤하게 말을 꺼냈다.
“네가 메이아를 죽였느냐.”
“메이아? 그 정령사 계집? 아주 가관이었지.”
“죽였다 이거군.”
“크큭, 친구들만 보내주면 몸을 주겠다고 나서는 꼴이 얼마나 같잖던지. 벗길 테면 벗겨보라고 하는데... 으헉!”
푸쉭!
카잔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팔이 공중에 떴다.
카잔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새어나올 틈도 없이 로엘의 무형검이 날아들었다.
무형검은 차근차근 카잔의 몸을 베어나가며 고통을 가중시켰다.
카잔의 출혈은 심해져만 가는데 정작 검을 휘두르는 로엘은 무표정 그 자체인지라 보는 자마다 소름이 돋아 감히 끼어들 수가 없었다.
전장의 전방에선 라이프트리와 위에 올라탄 마왕군이 카잔의 병사들을 무너뜨리고 있는 중이었다.
라이프트리 위에서 날아오르는 마족들을 상대하던 타유아가 로엘이 있는 곳을 보았다.
역시 로엘은 적의 수장을 간단하게 정리한 후였다.
평소에는 수장을 치고 난 후에 그 사실을 알려 적의 전의를 단숨에 떨어뜨리는 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신들린 마냥 카잔의 몸을 베고 있었다.
타유아는 얼른 고양이를 소환하였다.
“질풍 고양이 소환! 굴란트! 마왕님께 다녀올 테니까 내 부분까지 커버해줘!”
바람결 같이 부드러운 털을 지닌 호랑이 모습의 질풍 고양이가 소환되었다.
타유아는 굴란트의 대답을 들을 겨를도 없이 질풍 고양이에게 올라탔다.
질풍 고양이가 라이프트리의 기둥을 지그재그로 밟아 추락하듯 빠르게 지상으로 내려갔다.
난전이 벌어지는 전장 속을 내달린 타유아는 적의 무기가 자신에게 날아드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로엘을 향해 달려갔다.
날붙이가 곳곳에 스치며 생채기가 나는 것도 무시한 채 내달린 끝에 로엘에게 도달할 수 있었다.
로엘의 주변에는 얼어붙은 카잔의 병사들과 비참하게 죽어 있는 카잔의 시체가 있었다.
더하여 로엘의 팔이 검게 물들어 있었다.
저번에 본 게 착각이 아니었다.
마검의 침식화가 오른팔 전체로 확장된 것이었다.
타유아는 질풍 고양이에서 뛰어내리며 여전히 검을 휘두르려는 로엘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상대는 이미 죽었어요! 그만하세요, 마왕님!”
로엘이 반쯤 충혈된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