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09 9-7. 졸장부를 치는 건 일도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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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에라의 땅 남쪽 루트를 타며 요새 하나를 점령한 카잔은 전령으로부터 명령을 전달받았다.
“고르오스의 땅으로 회군하여 수비에 전념하라 하셨습니다.”
카잔은 주먹으로 탁자를 강하게 내리쳤다.
타앙!
“회군이라니! 내가 가장 먼저 승전을 쌓았건만 왜 회군하라는 것이냐!”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기는......”
“그리 말하라고 페네르치가 시키더냐! 날 물로 봤다 이거지? 개 같은 자식!”
카잔도 바보는 아니었다.
마왕이 로드리고를 친 후에 북진 중인데 수비를 하란다.
카에라의 땅에서 마왕을 맞이할 순 없으니 고르오스의 땅으로 유인할 미끼가 필요하지 않은가.
그 미끼로 카잔이 지명된 거고.
아폴로가 손가락을 튕기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몸뚱이가 크리스털로 이루어진 터라 청명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째앵!
“냉정하게 생각해보자고. 명령을 어길 수 없다는 건 너도 잘 알잖아.”
“그 명령이 페네르치의 머리에서부터 시작된 게 마음에 들지 않아. 날 제거하려고 수작을 부리는군.”
“어차피 마왕군이 고르오스의 땅 경계만 넘으면 의무 조항이 적용돼.”
“유인만 하고 카에라의 땅으로 후퇴하잔 건가? 명령은 수비하란 것이었어. 후퇴하는 순간 난 명령을 어긴 게 된다만?”
“그러면 그랜드 마스터를 상대로 정면싸움을 할 건가?”
“그건 무리지.”
“미끼 역할을 맡을 테니 의무 조항만 충족되면 카에라의 땅으로 돌아오겠다고 전하겠어.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지 않나?”
“아니,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페네르치 그 자식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카잔의 말에 아폴로가 고민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아폴로도 페네르치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이참에 페네르치를 제거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였다.
고르오스 군의 머리라 불리는 자인만큼 어설픈 계책은 단번에 간파해낼 것이다.
체스에서 외통수를 두듯 빠져나갈 길이 없는 사지에 몰아넣지 않는 이상 빠져나올 자였다.
고민하던 아폴로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입꼬리를 씨익 말아 올렸다.
“아주 없지는 않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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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오스는 성 하나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고르오스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성문이 뚫릴 것 같자 카에라 군이 금방 성을 비우고 도망갔기 때문이었다.
일부러 성을 내준 느낌이었다.
아마 카잔도 비슷한 과정으로 요새를 차지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본인은 승전을 쌓았다고만 보고했지만 말이다.
고르오스는 오래 전에 피난 간 듯 비어있는 민가 사이를 지나치며 중얼거렸다.
“도망쳐서 시간만 끌자는 생각인가. 교활한 계집이 생각할 만한 방법이군.”
마왕군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만 벌자는 생각으로 미리 주민들을 피난시켜놓고 방어는 최소한만 하려는 모양이었다.
하찮기 짝이 없었다.
아무리 시간을 끌어도 고르오스 군이 크루다이에 닿는 게 더 빨랐다.
지금 이 속도라면 마왕군이 오기 전에 카에라의 목을 칠 수 있었다.
전투다운 전투를 한 것도 아니니 재정비 시간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고르오스는 이끌고 있는 병력에게 강행군을 요구할 생각이었다.
헌데 출발 전에 회군이 예정되어 있던 아폴로가 찾아왔다.
아폴로는 고르오스 앞에서 두 손을 모으며 말했다.
“회군하라는 명령을 전달 받았습니다. 그 건에 대해 말씀드릴 게 있어 이리 오게 되었습니다.”
“이 전쟁이 시간싸움이라는 건 너도 알고 있을 텐데?”
“앎에도 불구하고 찾아온 것입니다.”
“말해보거라. 시덥잖은 이야기가 아니길 바라지.”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저와 카잔만으로 마왕군을 막아내는 건 무리입니다.”
“약한 소리나 하려고 돌아왔나?”
“이기기 위해서입니다.”
고르오스는 날카롭게 세웠던 눈매를 원래 위치로 돌리며 웃음을 흘렸다.
“페네르치와 똑같은 말을 하는군.”
“그랬습니까?”
“다음 말이 있을 텐데? 이어서 말해보게.”
“네.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저와 카잔만으로는 역부족입니다. 페네르치에게 병력을 주어 카에라의 땅으로 들어오는 남쪽 길목을 지키게 해주십시오. 의무 조항만 충족시키고 카에라의 땅에서 싸우고 싶습니다.”
아폴로는 마왕이 카잔을 무시하고 바로 카에라의 땅으로 들어올 경우를 대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페네르치를 남쪽 길목에 세워두면 어떤 방향으로 오든 대응할 수 있다고 하였다.
카에라와 합류하여 마왕이 수성전을 펼치면 고르오스는 자격을 잃는다.
허나 이미 점령한 성에서 대기하고 있으면 되러 마왕측이 공격한 게 되기에 카에라의 땅에서 싸워도 의무 조항을 충족시킬 수 있었다.
고르오스는 판단을 내리기 앞서 아폴로의 어깨 너머를 향해 말했다.
“페네르치 자네는 어찌 생각하나?”
언제부터 있었는지 아폴로의 뒤에 페네르치가 서있었다.
페네르치는 무덤덤하게 아폴로의 옆에 서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좋은 작전이군. 나도 가담하도록 하지.”
의외로 순순히 남쪽 길목을 지키는 임무를 받아들이는 페네르치였다.
고르오스로선 부하들끼리 의견이 일치하는데 굳이 반대할 필요가 없었다.
“페네르치. 네게 1만의 병력을 주마. 남쪽 길목에서 마왕군을 막아서도록.”
“막아서는 것 이상의 성과를 내보이겠습니다.”
임무를 받게 된 페네르치는 아폴로와 함께 히드라의 머리에서 내려왔다.
바닥에 내려서자마자 페네르치가 정색하듯 딱딱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속셈이냐. 마왕의 손을 빌려 날 처리하기라도 할 셈인가?”
“전혀요. 오히려 반대의 이야기를 제안하기 위해 제가 직접 온 겁니다.”
“반대의 이야기라면?”
“카잔을 처리하려 합니다.”
제아무리 페네르치라도 지금 아폴로의 발언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페네르치는 딱딱한 표정을 깨며 놀란 기색을 드러냈다.
“카잔과 자네는 친구인 걸로 안다만.”
아폴로는 고개를 좌우로 가로 젓더니 피식 웃었다.
“이용도구에 친구란 이름이 붙은 것일 뿐입니다.”
이 전쟁이 끝나고 고르오스가 마왕이 되면 다시 마계 7기둥이 정해질 것이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4인방과 카잔, 아폴로는 당연히 그 안에 들어갈 거고 공적에 따라 분배 받는 땅이 달라질 게 분명했다.
아폴로는 고르오스를 넘지 못하는 걸 알기에 최소한 2인자만큼은 되고 싶었다.
그를 위한 반석을 닦기 위해선 뭐든지 이용할 생각이었다.
마찬가지로 페네르치 역시 마계 7기둥 서열 1위의 자리를 노리고 있기에 두 마족의 이해관계는 일치했다.
두 마족은 이해가 일치함을 알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서로 손을 잡기로 약속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