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08 9-7. 졸장부를 치는 건 일도 아니다 =========================
오스쿠보 성에서 본 것을 말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겨우 결심한 것이었다.
지금의 로엘에게 마검을 멀리해야 한다고 말해봤자 먹히지 않을 것이기에 지혜를 모으고자 간부들에게 먼저 밝힌 것이었다.
데릭마이어는 이해가 되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착각한 것 아닌가? 마왕님은 마검을 굴복시켰네.”
“하지만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손에 검은 반점이 생겨나 있었다고요.”
“손뿐이라면 검댕이 묻은 것일 수도 있지.”
서로 의견이 갈리자 데킬라가 중재에 나섰다.
“우리끼리 대화를 나눠봤자 소용없는 일이지. 마왕님이 돌아오면 확인하세.”
“그러고 보니 데킬라 씨의 능력으로는 파악할 수 없나요?”
“흐음, 최근 들어 마왕님을 유심히 본 적이 없었군. 내 눈으로 확인해보지.”
“부탁드릴게요. 혹시라도 마왕님이 마검에 사로잡혀 폭주라도 하게 되시면......”
마왕군 간부들은 동시에 폭주한 로엘을 상상해보았다.
상상하자마자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식은땀을 흘렸다.
“하아하아, 상상도 하기 싫군.”
“초토화라는 방식으로 모든 땅이 통일될 걸세.”
“만약 폭주하면 괴물이 진정한 의미로 괴물이 되어버리겠지.”
전투를 마치고 돌아온 로엘이 간부들이 서있는 나뭇가지로 돌아왔다.
로엘은 승전에 기뻐할 틈도 없이 지시를 내렸다.
“굴란트, 피해상황 보고해.”
“지금까지 대략 사망자 60명, 중상 80명, 경상 200명이 발생했습니다.”
“생각보다 많군.”
“라이프트리의 팔을 뚫고 들어온 바위 가고일이 꽤 있었습니다. 전부를 막기는 어려워서 어느 정도 피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상대의 숫자를 감안하면 경이적인 성과이긴 하지만요.”
“좀 더 집중하도록. 특히 타유아.”
“아, 네! 부르셨어요?”
“오스쿠보 성에서 얻은 활성화의 핵을 수비용으로 쓰라했는데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것 같더군.”
“죄송합니다.”
“집중하지 못할 이유라도 있었나?”
타유아를 비롯한 마왕군 간부 전원이 어깨를 들썩였다.
간부 전원이 타유아를 쳐다보았다.
딱 좋게 질문이 던져졌으니 이참에 물어보란 뜻이었다.
타유아는 침을 꼴깍 삼키며 속에 담아두었던 질문을 꺼냈다.
“괜찮으시다면 손을 볼 수 있을까요?”
로엘은 양손을 위로 하여 손바닥을 펼쳐보였다.
간부들의 시선이 로엘의 손바닥에 모였다.
타유아가 말한 것과 달리 로엘의 손바닥은 깨끗하기만 했다.
아무리 눈 씻고 쳐다봐도 검은 반점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어? 이럴 리가 없는데. 오스쿠보 성에서 분명 봤는데.”
“뭘 봤다는 거지?”
“그게... 마왕님의 손에 검은 반점이 있길래 마검의 침식화가 진행 중인 게 아닌가 싶어서......”
로엘은 손을 거두며 마검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침식화가 진행된 적 없어. 잘못 본 거겠지.”
“후우, 다행이에요. 마왕님이 잘못되나 싶어서 계속 걱정했어요.”
“불필요한 걱정이군. 앞으로는 전투에 집중해.”
이후 로엘의 마왕군은 신속하게 전투 후 정리에 나섰다.
폭스 때와 마찬가지로 포로들 중 고향에 돌아갈 자는 돌려보냈다.
대신 다닐루를 비롯한 로드리고 군 주축들은 전부 마기회로를 끊어 상어섬으로 보냈다.
유령여우 일족처럼 반역의 여지가 있는 자들이었기에.
폭스의 땅에서처럼 번거롭게 4성급 부대장들을 회유하는 과정은 거치지 않았다.
대륙 남쪽 지방을 모두 평정했기에 이제부턴 뒤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로엘은 오늘 내로 다닐루 무리를 호송할 병력, 로드리고의 땅에 남겨둘 병력을 편성하라 이른 후 마왕의 저택에 들었다.
개인 침실에 들어선 로엘은 오른손을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아까는 없던 검은 반점이 생겨나있었다.
마검의 마기가 로엘의 손에 엉겨 붙은 것이었다.
“방심할 틈이 없는 녀석이군.”
마검을 제압했다 여겼건만 틈만 나면 로엘의 몸을 옮아 매려 하였다.
로엘의 마음에 틈이 생겨났다는 걸 의미했다.
메이아의 죽음으로 인해 생긴 분노가 조금씩 로엘의 굳건함에 균열을 만들고 있었다.
로엘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자신의 마기로 마검의 마기를 밀어냈다.
로엘의 마기에 밀린 마검의 마기가 뿔뿔이 흩어지면서 검은 반점이 사라졌다.
“떠나더라도 네 혼은 달래주고 떠나마, 메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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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오스 군 본대가 노이즈 산맥을 넘어 카에라의 땅에 들어섰다.
경계를 넘자마자 나온 붉은색 위험지대가 나왔다.
고르오스는 슬금슬금 기어 나오는 마물을 둘러보며 말했다.
“히드라 삼켜라.”
고르오스가 타고 있는 히드라가 9개의 머리를 뻗어 다가오는 마물을 일일이 삼켰다.
히드라도 엄밀히 따지면 마물을 삼켜 힘을 얻는 타입이었다.
로얄로더처럼 마기가 생성되는 건 아니었지만 대신 마물을 소화하여 독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히드라의 독은 독물 마법에 의해 모든 독으로 변환할 수 있는 만독이다.
로엘에게 로얄로더가 있다면 고르오스에겐 히드라가 있다.
고르오스가 로얄로더를 크게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고르오스는 지평선에 걸려 있는 기다란 성벽을 응시하며 말했다.
“무슨 일이냐.”
어느새 고르오스 뒤에 박쥐의 모습을 한 페네르치가 날개를 퍼덕이고 있었다.
페네르치는 인간형 모습으로 바꾸며 히드라의 머리 위에 올라섰다.
“방금 들어온 소식입니다. 폭스에 이어 로드리고도 당했다고 합니다.”
“마왕군의 피해는 어떤가?”
“경미하다 못해 거의 없다 해도 무방합니다.”
“소모품 역할조차도 수행하지 못하는 녀석들이군.”
“이쯤 되면 생각을 달리 해야 합니다. 마왕군을 얕봐선 안 됩니다. 지금이라도 다시 후방기습 작전을 재개해야 합니다.”
“무엇을 위해?”
“이기기 위해서입니다.”
“이쪽에서 기습해버리면 난 마왕의 자격을 잃지. 영원히 무관의 제왕으로 지내는 것을 승리라 부를 텐가?”
“그걸 방지하기 위해 마왕 측의 공격을 먼저 받아야 합니다. 먼저 공격 받으면 마계 7기둥 의무를 위반하지 않고 싸울 수 있지요.”
“하지만 카에라의 땅에서 싸우면 우리가 공격하는 게 된다만?”
마왕이 먼저 공격할 경우에만 마왕을 공격할 수 있다.
이 조항을 충족시키려면 마왕에게 먼저 공격을 받아야만 했다.
만약 로엘이 카에라 군에 합류하여 성에 주둔하게 되면 좋든 싫든 고르오스 군이 먼저 공격하게 된다.
마왕의 표식을 얻어야만 하는 고르오스로선 달갑지 않은 상황이었다.
페네르치는 어렵지 않게 해결책을 내놓았다.
“마왕군이 먼저 고르오스의 땅에 쳐들어오도록 유인하면 됩니다.”
“그만한 가치를 지닌 것이 있긴 하지.”
“네. 카잔을 미끼로 쓰면 됩니다.”
“훗, 이런 식으로 경쟁자를 제거하는 건가. 자네는 여전하군.”
“제게 있어 적은 고르오스 님의 적뿐입니다.”
“뭐 그런 걸로 해두지.”
고르오스는 페네르치의 작전을 허가하였다.
물론 카잔에게 대놓고 미끼 역을 하라할 순 없으니 수비 명목으로 보낼 생각이었다.
페네르치는 이번 전쟁이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고르오스는 의무 조항 성립 건을 페네르치에게 맡기고 본인은 카에라를 치는데 집중하기로 했다.
가까워지는 성벽을 보며 고르오스가 히드라의 머리를 발끝으로 두드렸다.
“속도를 높여라, 히드라. 계집들에게 힘의 격차라는 것을 보여줘야 하지 않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