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93 8-10. 마검 =========================
“바로 꺼내오는 게 낫겠지?”
“네, 마그니아 산이 언제 또 불을 뿜을지 모르니 서둘러야 합니다.”
동굴 안이 어두울 것을 감안하여 미리 가져온 나무로 횃불을 만들었다.
연장자들이 횃불에 불을 붙이는 동안 로엘은 아디만티움 검을 뽑아 미리 기운을 끌어올렸다.
동굴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굴란트가 동굴 정면을 보며 외쳤다.
“마왕님! 동굴에서 누군가 나오고 있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동굴 입구로 쏠렸다.
동굴에선 검을 쥔 토르 한 명이 나왔다.
토르의 얼굴을 확인한 연장자들이 그를 알아보았다.
“데릭마이어! 마왕님, 지금 나온 자가 데릭마이어입니다.”
“갇혀 있다 하지 않았나?”
“검을 들고 있는 걸로 봐선 감옥 안에서 검을 만들어 나온 게 아닌지.”
“납득하지 못할 건 아니지만 탈출한 것치곤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군.”
바깥으로 나온 데릭마이어의 상태는 눈대중으로 보기에도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눈에 띠는 건 오른손에 들고 있는 검이었다.
언뜻 보기에는 아디만티움 검처럼 보이는 대검 하나가 들려 있었는데 검신이 비스듬히 세워져 있었다. 단두대의 날을 통째로 떼어와 검 손잡이에 붙인 느낌이었다.
뿐만 아니라 검이 스스로 의지를 가진 양 마기를 뿜어내어 데릭마이어의 팔을 휘감은 상태였다. 데릭마이어의 팔은 검의 마기에 침식당하여 시커멓게 물들어 있었다.
데릭마이어 본인은 아예 자아를 잃은 듯 눈이 뒤집혀 있었다.
연장자들은 데릭마이어의 몸에 문제가 생겼다 여겨 부축하러 가려 했다.
“오랫동안 갇혀서 약해진 것 같아!”
“어이! 데릭마이어!”
연장자들이 물을 들고 뛰어나가려던 찰나에 굴란트가 팔을 뻗어 제지했다.
“기다려! 눈 크게 뜨고 자세히 보라고! 들고 있는 건 마검이야!”
“마검? 저게 마검?”
“날의 모양이 다르잖나. 아도로스가 쓰던 마검은 좀 더 장검에 가까웠네.”
“본인의 손에 맞는 형태로 만든 거겠지. 마왕님, 역으로 주인을 부리는 검은 마검 밖에 없습니다. 지금 데릭마이어의 눈엔 뵈는 게 없을 테니 조심하십시오.”
호들갑 떠는 다른 이들과 달리 로엘은 차분하기만 했다.
호들갑 떨어봐야 도움 되는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기에.
아디만티움 검에 무형검을 덧씌우며 발걸음을 떼었다.
“굴란트, 마검을 떼어내는 방법은?”
“저 정도로 일체화되었다면 마검의 마기에 물든 부분을 베어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팔까지만 물들었으니 가슴으로 옮겨가기 전에 팔을 베어내야 합니다.”
“팔을 잘라내면 그의 특기를 발휘하기 힘들어지겠군. 다시 팔을 붙일 순 있나?”
굴란트가 고개를 저었다.
마검의 마기에 침식당한 부위는 마기가 빠지지 않기 때문에 붙여도 침식화가 다시 진행될 뿐이었다.
데릭마이어의 검 제작 능력은 남은 한 손으로도 발휘할 수 있겠지만 전투능력은 크게 떨어질 게 분명했다.
당장은 데릭마이어에게서 마검을 떼어내는 게 급선무였다.
로엘이 검을 앞세우며 다가가자 데릭마이어가 로엘을 적으로 인식하여 덤벼들었다.
“죽... 인다. 가로 막는 것은 전부 베어내... 주겠다.”
“검을 만드는 자가 검에 휘둘려 걷는 검이 되었군.”
“너부터... 벤다!”
데릭마이어가 땅을 박차며 한달음에 로엘과의 거리를 좁혔다.
토르 특유의 짧은 다리로 뛴 거라 생각되지 않을 정도의 민첩함이었다.
날의 특성을 살려 위에서 아래로 휘두르는데 정말로 단두대의 날이 떨어지는 착각마저 들었다.
로엘은 검을 휘둘러 무형검을 뻗어냈다.
보이지 않는 검날이 마검 아래로 향하며 데릭마이어의 겨드랑이를 노렸다.
북풍마냥 날카롭게 휘어져 나간 무형검이 겨드랑이를 비스듬히 베려던 찰나.
데릭마이어가 마검을 당겨 검신의 넓은 면으로 무형검을 막아냈다.
정확히는 마검이 데릭마이어를 움직여 무형검을 막아낸 셈이었다.
무형검과 마검이 부딪치면서 힘 대 힘의 경합이 시작되었다.
마검은 자신의 마기는 물론 데릭마이어의 마기까지 끌어와 무형검을 밀어내려 했다.
로엘은 경합에 응해주며 중얼거렸다.
“조금은 할 줄 아는군.”
여태껏 로엘의 무형검을 제대로 막은 자는 없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데다 기운을 감지할 즈음엔 몸이 베여나간 후였기에.
이만한 능력을 지닌 검이라면 주인을 고를 만도 했다.
그러나 검을 쥔 자와 로엘 사이에 격차가 너무 컸다.
그랜드 마스터급과 마나 익스퍼트급.
마검의 능력으로 메울 수준이 아니었다.
로엘은 잔재주 없이 단순한 힘 싸움만으로 마검의 마기를 걷어냈다. 그리곤 손목을 비틀어 검의 궤도를 사선으로 꺾어 마검을 옆으로 밀어냈다.
차캉!
로엘의 검이 마검의 검면을 경쾌하게 두드리면서 마검이 옆으로 밀려났다.
마검과 손이 연결되어 있는 데릭마이어도 팔이 옆으로 크게 벌어지면서 어깨가 훤히 드러났다.
베기 좋게 벌어진 틈을 베어내지 못할 리 없었다.
로엘은 가차 없이 검을 휘둘러 데릭마이어의 오른팔을 베어냈다.
검게 물든 팔이 마검과 함께 떨어져 나가면서 피가 흘렀다.
로엘은 비틀거리며 쓰러지려는 데릭마이어를 부축함과 동시에 굴란트를 불렀다.
“굴란트! 지혈 준비를!”
“네!”
굴란트가 옷 안쪽에 달아둔 각종 천주머니 중 하나를 꺼냈다.
천주머니 안에는 각종 비상약이 있었는데 그 중 지혈효과가 있는 약초를 꺼내 잘린 단면에 붙였다.
약재를 붙이고 붕대를 감은 다음 꾸욱 누르자 기절한 데릭마이어가 크게 숨을 토해냈다.
“흐어어억!”
빠른 응급처치 덕분에 큰 출혈 없이 지혈에 성공하였다.
다만 마검에 휘둘린 영향과 팔의 통증, 무더운 환경으로 인해 데릭마이어의 몸이 급속도로 약해져갔다.
굴란트는 바로 하산할 것을 제안했다.
“응급처치는 했지만 몸이 너무 약해져 있습니다. 당장 용암지대 바깥으로 데려가야 합니다.”
“먼저 데리고 가. 곧 뒤따라가지.”
“알겠습니다.”
굴란트는 기절한 데릭마이어를 업고 연장자들과 함께 먼저 능선을 타고 내려갔다.
홀로 남은 로엘은 바닥에 떨어진 마검을 내려다보았다.
마검은 필요가 없어진 데릭마이어의 팔에서 떨어져나왔다.
남은 팔에는 마검의 마기가 남아있었다.
로엘은 혹시나 싶어 자신의 마기를 투여 마검의 마기를 걷어내보려 했다.
그러자 남은 마검의 마기가 날뛰면서 데릭마이어의 팔을 엉망진창으로 망가뜨렸다.
겨우겨우 마기를 걷어내긴 했다만 팔은 괴사한 듯 얼룩덩어리에 조직이 모두 파괴되어 도저히 다시 붙일만한 게 못 되었다.
잘못 쓰면 도리어 사용자를 망가뜨리는 검.
로엘은 마검을 내려다보다가 서슴없이 손을 뻗었다.
“아도로스가 사용했다면 내가 사용하지 못할 리 없지.”
마검의 손잡이를 쥐자 마검의 검신에서 마기가 뿜어져 나와 로엘을 휘감으려 했다.
직접 검을 쥐어 보니 마검의 마기 안에 흉흉함이 담겨 있음이 느껴졌다.
마기에 담긴 흉흉함이 쥐는 이의 부정적인 감정을 자극하는 듯했다.
로엘은 자신의 마기로 마검의 마기를 가볍게 억눌렀다.
마검이 끝까지 로엘을 시험하려 하자 마검의 마기를 모두 걷어버릴 기세로 마기를 강하게 운용하였다.
“한낱 검 주제에 누굴 시험하려 드느냐?”
말을 알아들은 것인지 아니면 로엘의 마기에 밀려 그 역량을 파악한 것이지 마검이 자신의 마기를 갈무리하며 안정적으로 로엘에게 마기를 제공했다.
로엘은 마검의 마기와 자신의 마기가 교류하면서 900년 치의 마기가 2배로 진한 농도를 지니게 되었음을 느꼈다.
마검을 완벽하게 굴복시킨 것이다.
마왕이 가져야 할 두 개의 상징을 모두 손에 넣은 로엘은 마검을 대충 어깨에 걸치곤 하산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로엘 본인도 감지하지 못하고 있는 게 있었다.
마검과 교류함으로서 마음 깊숙한 곳까지 밀어둔 분노가 조금씩 증폭되고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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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엘이 남쪽 혼돈의 대지에 머무르는 사이.
고르오스의 본대는 또 한 번 로드리고의 본대와의 전투에서 이겨 남쪽으로 일보 더 나아갔다.
이번 전투에선 로드리고가 참가하지 않았다.
고르오스 군이 그를 궁금해 하던 차에 페네르치에게 한 가지 소식이 날아들었다.
페네르치는 첩자를 통해 전해 받은 정보를 고르오스에게 전했다.
“로드리고와 폭스가 본대에서 이탈했다고 합니다.”
고르오스는 오랜만에 페네르치의 보고에 흥미를 보였다.
두 세력의 우두머리가 이탈할 정도의 일이니 가벼이 넘겨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알아냈나?”
“마왕이 카에라와 손을 잡은데다 로얄로더까지 취했다고 합니다. 그것 때문에 저희들끼리 내분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판결권한의 이행을 재차 확인하기 위해 마왕과 접촉할 생각이로군.”
“여차하면 마왕에게서 등을 돌릴 생각인가 봅니다. 그들이 렌던에 도착하기 전에 미리 손을 써두는 게 어떻겠습니까?”
“손을 써둔다 함은?”
“항복 권유입니다. 두 세력을 취한다면 마왕을 손쉽게 누를 수 있을 겁니다.”
“나약한 방법을 취할 생각은 없다. 지금으로도 충분히 두 세력을 물론 마왕도 누를 수 있느니라.”
“고르오스 님. 마계통일이 종착점은 아니지 않습니까. 마계통일 이후 마계대륙을 다스리시려면 병력손실을 최대한 줄이는 게 좋습니다. 폭스와 로드리고는 소모품으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이참에 항복도 허용한다는 선례를 남기면 북쪽의 약체 세력이 스스로 허리를 낮춰 들어올 겁니다.”
단 한 번 취향이 아닌 전략을 취함으로서 마계통일을 앞당길 수 있다.
고르오스는 마계통일이 종착점이 아니다라는 것에 공감하며 간만에 페네르치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본대의 진격을 멈춰라. 게인하르트에게도 대기하라 이르도록. 페네르치, 이미 후방 습격이란 실패 전례가 있으니 반드시 성공시킨다는 일념으로 임하도록. 두 번의 실패는 용납하지 않겠다.”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반드시 둘을 이쪽으로 끌어들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