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88 8-8. 황제의 위치 =========================
8-8. 황제의 위치
카에라의 저택에서 하룻밤을 보낸 로엘은 다음날 아침이 되자마자 북쪽으로 향했다.
로엘과 카에라, 타유아를 태운 마차 및 호위부대가 크루다이를 벗어났다.
낮이고 밤이고 색이 다른 달이 떠있을 뿐인데도 계절을 반영하듯 여름의 후끈한 공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허나 마차 안에선 냉랭한 공기만이 감돌았다.
로엘이 팔짱을 끼고 무거운 표정을 짓고 있다 보니 카에라와 타유아로선 감히 말을 걸기가 힘들었다.
특히 카에라는 초장부터 완전히 기선을 제압당해 있었다.
눈치를 보던 카에라가 겨우겨우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괜찮을까요?”
로엘은 무심한 눈길로 카에라를 바라보며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너무하다고 느낄 수도 있는 행동이었지만 카에라 입장에선 질문에 응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할 판이었다.
“마왕님에게서 서큐버스 퀸의 가호가 느껴지는데 혹시 저한테 가호를 받은 적이 있으신가요?”
카에라는 2대 서큐버스 퀸이다.
서큐버스 퀸인 만큼 서큐버스 퀸의 가호를 품고 있기에 마찬가지로 로엘의 안에 있는 같은 힘을 감지한 것이었다.
로엘은 간단한 대답으로 카에라의 의문을 풀어주었다.
“베르나트에게 받은 거야.”
“베르나트 님? 베르나트 님과 만나셨나요?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나셨죠?”
서큐버스들에게 있어 베르나트는 전설적인 존재였다.
현재의 마계 7기둥보다 두 수 위라 불리는 이전 세대의 마계 7기둥.
그 중에서도 3위에 달하는 실력을 지녔던 게 바로 베르나트다.
용마전쟁 이후 마계로 돌아오지 않아 행방이 묘연했던 베르나트를 만났다는 것에 놀란 카에라였다.
로엘은 여전히 무심한 말투로 대답하였다.
“인간계에서 만났어.”
“역시 인간계에 계셨군요. 잘 지내고 계시나요?”
“잘 지내고 있겠지.”
“베르나트 님의 인정을 받으셨다면 저도 인정할 수밖에 없겠군요.”
“그러시던지.”
카에라에게 인정받는 게 무에 그리 대수냐는 식으로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로엘이었다.
카에라는 지금까지의 어색함에서 벗어나며 로엘을 존경을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 정도로 서큐버스들에게 있어 베르나트의 존재는 엄청난 것이었다.
같은 서큐버스 퀸의 힘을 가지고 있어 로엘에게 매료되는 일은 없었지만 다른 의미로서 매료된 카에라였다.
카에라의 태도가 고쳐진 가운데 마차는 크루다이 북쪽에 있는 커넬 신전에 도착하였다.
커넬 신전은 수천 년 전 초대 마왕이 지은 신전으로 원래는 다음 세대 마왕이 태어날 때까지 마검을 보관하는 장소로 쓰였었다.
지금은 마검이 소멸되어 사용되지 않는 장소이지만 신전 안에 인간계와 이어진 실낱같은 통로가 있었다.
커넬 신전은 오랫동안 관리하지 않아 반쯤 허물어져 있었다.
그나마 카에라가 로엘이 온다하여 마족을 파견해 무너진 잔해를 치워둔 상태였다.
천장의 구멍으로 달빛이 온전히 파고들어 신전 내부가 훤히 비쳤다.
고대의 양식으로 세워진 건물 기둥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나마 청소를 위해 파견되었던 마족들의 발자국만이 적막함을 덜어줄 뿐이었다.
카에라는 기둥 사이로 걸으며 로엘을 신전 안쪽으로 안내했다.
“이쪽이에요. 신전 가장 안쪽에 바위가 있는데 그걸로 보낼 수 있어요.”
카에라의 말대로 신전의 끝이 보일 때 즈음 뭉툭한 바위 하나가 나타났다.
바위 위에는 가느다랗고 깊숙한 흠집이 나있었다.
원래 마검을 꽂아두던 바위로 바위 자체에 마검의 힘을 억누를 정도의 기운이 담겨 있었다. 허나 마검이 사라진 이후로 사용될 일이 없어졌고 마검의 영향이 남아 흠 안쪽에 특이현상의 역류가 생겨났다고 한다.
틈이 너무 좁아서 다른 것에 영향을 주진 않지만 혹시 몰라 평소에는 결계를 씌워두고 있었다.
카에라는 마검꽂이 바위에 다가가 결계를 풀었다.
결계가 풀려도 바위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로엘은 바위에 있는 좁은 흠집을 살펴보았다.
한 쪽 눈을 감아 집중력을 높여야만 안이 보일 정도로 흠집은 가늘고 좁았다.
흠집 안쪽에서 작게나마 마기가 불규칙하게 흐르는 것이 보였다.
“공간이동 특이현상을 품고 있는 건가?”
“네, 인간계와 연결되어 있는 특이현상이에요. 아! 부수진 마세요. 부순다고 특이현상이 그대로 바깥으로 나오는 건 아니니까요.”
“안 해. 나도 특이현상에 관련된 지식 정도는 있어.”
“일단 말씀드리자면 이걸 이용해서 물건을 보낸다 해도 인간계의 어디에 떨어질지는 저도 몰라요.”
로엘은 가져온 서신을 꺼냈다.
만약을 대비해서 보관마법을 걸어두긴 했으나 떨어진 장소에 따라 아예 발견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수십 장을 준비해둘 걸 그랬군.”
많이 보내면 하나 정도는 샹데르에 닿지 않을까 싶어 한 말이었다.
허나 카에라가 말하길 바위의 특이현상을 한 번 이용하면 한동안은 마나의 역류가 거세져 서신을 보낼 수 없게 된다고 한다.
즉, 이번 서신이 제대로 전달되길 바라야 했다.
로엘은 가느다란 흠집 사이로 서신을 꽂아 넣었다.
서신이 바위 속 작은 특이현상에 휘말리며 사라졌다.
이로서 로엘이 카에라의 땅에 온 당초의 목적은 모두 달성했다.
이제부터는 각자 해야 할 일을 해야 할 때였다.
“우리는 이대로 북쪽 혼돈의 대지로 가겠어.”
“로얄로더를 깨우기 위함인가요?”
“그래.”
로엘이 로얄로더를 깨우러 가는 것.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는 카에라도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고르오스가 되던 고르오스의 부하가 되던 범인이 고르오스 측에 있다고 상정한 채로 움직이려는 것이었다.
카에라도 반강제적으로 고르오스를 중심으로 조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데스나이트 부대를 격파한 부대부터 조사해보도록 할게요. 성과를 얻으면 즉각 전하도록 하죠.”
“혼돈의 대지에 갔다가 렌던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들리도록 하지. 그때 보고하도록.”
“네.”
로엘은 마검이 꽂혀 있던 자리를 바라보다가 무심히 바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빌로스 제국 남쪽 바다.
본스마 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바다 속에서 머리 하나가 불쑥 솟아났다.
셸리였다.
셸리는 젖은 머릿결을 뒤로 쓸어 넘기며 해안선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로엘은 오지 않았다.
알고는 있었다.
빌로스 제국 황궁에서 블라스크에게 로엘의 실종을 알려왔고 수색 협조 요청을 해왔었다.
아직 로엘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걸 알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약속장소로 나온 것이었다.
망자섬 토벌 이후 로엘에게 부탁했던 소원.
생일날 얼굴을 비춰달라는 그 소원이 혹시나 이뤄지지 않을까 해서 말이다.
셸리의 호위를 위해 따라온 하이퍼돌핀들이 물 위로 고개를 내밀며 울음소리를 내었다.
“꺼억꺼억~.”
위로의 의미를 담은 울음소리였다.
셸리는 가까이에 있던 하이퍼돌핀 중 한 마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조금 기대했을 뿐이야. 어쩔 수 없지 뭐.”
블라스크가 성대한 파티를 준비해준다고 하는 것도 마다하고 왔는데 결국 오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사정 보다는 로엘이 어디에 있는 건지조차 모르는 현 상황이 그녀로 하여금 답답함을 느끼게 하였다.
“난 언제쯤 그 사람이랑 같이 지낼 수 있는 거려나.”
후계자 수업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셸리가 철이 들면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도 비약적인 성장속도를 보이고 있는 참이었다.
언제든지 용왕 위를 이어받아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로엘과 쉬이 만날 수 있게 해저섬을 샹데르의 강줄기와 이어진 해안 쪽으로 옮길 생각이었다.
허나 정작 로엘의 행방을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쉬이 자리를 떠날 수가 없는 셸리였다.
도착했을 때 동쪽 수평선에 걸려 있던 태양은 어느덧 서쪽 수평선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하이퍼돌핀들이 늦었다며 돌아가자고 울어댔다.
“꺼억~. 꺼어억~.”
“그래. 이제 돌아가야지. 돌아갈 거야.”
아쉬움에 꼬리지느러미가 떨어지지 않는 와중에 하이퍼돌핀 한 마리가 요란하게 울어댔다.
“끼억! 끼어억!”
“왜 그래?”
“끼억끼억!”
하이퍼돌핀의 시선은 허공에 향해 있었다.
셸리도 하이퍼돌핀을 따라 허공을 바라보았다.
허공에서 서신 한 장이 펄럭이며 떨어지고 있는 게 아닌가.
서신은 셸리에게 전달되기 위해 날아오기라도 한 듯 곧장 셸리를 향해 떨어졌다.
셸리는 서신을 잡아 겉부분을 살펴보았다.
서신 겉에는 셸리가 그토록 기다리던 이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빌로스 제국의 황제 로엘. 이 편지를 찾은 자는 샹데르의 황궁에 서신을 전해주길 바란다.]
봉투에는 보관마법까지 걸려 있었다.
보관마법이 걸린 것만 봐도 단순한 위조편지로 보기 힘들었다.
셸리는 꼬리지느러미를 빠르게 파닥이며 손을 위로 들어 서신을 펼쳐보았다.
서신 안에는 로엘이 현재 어디에 있는지,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황궁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해줬으면 좋겠는지에 대해 적혀 있었다.
엉뚱한 자의 손에 들어가면 악용의 여지가 다분한 내용이었다.
그걸 감수하고서라도 로엘은 자신의 위치를 알리고자 서신을 보낸 것이었다.
셸리는 서신을 도로 보관마법이 걸린 봉투에 넣고 봉인을 꾸욱 눌러 입구를 봉했다. 그리곤 하이퍼돌핀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나 샹데르에 다녀올게. 로엘의 위치를 황궁에 알리러 가야해.”
“꺼억~.”
“아바마마한테는 뭐라고 하냐고? 로엘의 위치를 알아냈다고 전해. 로엘은 마계에 있어.”
“꺼억? 꺼억!”
“말장난할 시간 없어! 얼른 가!”
“꺼억!”
하이퍼돌핀들이 바다 깊숙이 잠수하며 해저섬으로 떠났고, 셸리도 샹데르로 들어가기 위해 대륙 서쪽 바다를 향해 헤엄을 쳤다.
///
베나티아와 엘로나가 급히 레이아의 집무실 문을 벌컥 열어 들이닥쳤다.
“레이아, 희소식이야. 로엘의 위치를 알아냈어.”
업무 때문에 밤을 샜던 레이아는 막 쪽잠을 자려다가 눈을 번쩍 떴다.
그녀는 쌓여 있던 서류가 마구 쏟아지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벌떡 일어났다.
“그게 정말이에요? 어디에 있어요? 대체 어디예요? 어떻게 알아냈어요? 빨리 말하세요!”
“흥분하지마. 오늘 새벽 낚시 나갔다가 셸리를 만났어.”
“새벽 낚시? 또 아저씨 같은 취미를......”
“남이사. 어쨌든 지금 로엘은 마계에 있는 모양이야. 셸리가 바다에서 서신을 얻었는데 아무래도 특이현상을 통해 보내온 서신인 듯해.”
“마계? 하아, 이젠 아예 다른 대륙으로 가버렸네요.”
“더 어이없는 건 거기서도 왕 노릇을 하고 있다는 거지. 마왕으로서 활동 중인가봐.”
“그 인간은 어딜 가도 잘 나갈 수밖에 없는 체질인가 보네요. 일단 저도 서신을 볼 수 있을까요?”
베나티아가 레이아에게 서신을 전해주었다.
레이아는 빠르게 서신을 읽어 내렸다.
의심할 것도 없이 로엘의 필체였다.
로엘의 위치가 드러났고, 그가 잘 지내고 있다하니 큰 걱정 하나는 던 셈이었다.
레이아는 벌어지는 입가를 가까스로 조절하며 서신을 접었다.
“마계에서 그를 불러올 방법은 없나요?”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해.”
“지저감옥을 억지로 뚫어서라도 데려와야 해요.”
“마음은 알겠지만 진정해. 마계랑 인간계랑 동시소멸 시킬 일 있어? 일단 내가 베르나트랑 드래곤 로드 영감한테 다녀와 보겠어. 너희는 하던 일 확실하게 챙기면서 따로 방법을 알아보도록 해.”
로엘 정도나 되는 사람이 두 달이 다되어가도록 돌아오지 않는 걸로 보아 범상치 않은 곳에 떨어진 것까진 예상했다.
그런데 설마 마계에 갔을 줄이야.
거기서도 왕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게 참 로엘답다.
레이아, 엘로나, 베나티아는 브리니아 왕국과의 전쟁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저희들끼리만 로엘의 위치를 알고 있기로 했다.
그런 고로 로엘 복귀를 추진하는 건 세 여인의 몫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