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81 8-4. 용서란 없다 =========================
8-4. 용서란 없다
빌로스 제국 남서쪽 지방이 된 파스텔 공작령.
파스텔 공작령에 그란데 백작이 이끄는 4만의 군대가 집결했다.
그 중 2만은 빌로스 제국군 정규군이었으며 나머지 2만은 오크의 땅에서 온 오크군이었다.
그란데 백작은 4만의 군대를 넷으로 나눠 브리니아 왕국으로 진격시킬 예정이었다.
1진은 브리니아 왕국 정면으로 갈 그란데 백작의 1만 정규군, 2진은 남쪽 해안을 타고 움직일 델프의 5천 기마대, 3진은 에메랄드 산맥 끝자락을 거쳐 하니온 군이 들어올 수 있게 측면에서부터 요새를 요격할 블랑코의 2만 오크군, 마지막은 파스텔 공작령에 남아 보급품을 호위할 5천의 후방부대였다.
파스텔 공작과 그란데 백작은 산더미처럼 쌓인 군량 사이를 걸으며 대화를 나눴다.
“그란데 백작, 전... 아니 폐하의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인가?”
“로스트 경이 수색대를 꾸려 출발했습니다. 먼저 빌렝턴부터 돌아본다고 합니다.”
“폐하께서 부재중인 만큼 우리가 정신 바짝 차려야하네.”
“폐하의 바람이 곧 저의 바람. 스이켄의 목을 칠 때까지 돌아오지 않을 각오로 출정할 겁니다.”
“훗, 자네에게 충심을 권하다니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격이었군. 보급은 걱정 말고 힘껏 싸우게나.”
그란데 백작은 두 말할 것도 없다는 듯 검갑을 튕겨보였다.
건틀릿에 튕긴 검갑이 청명한 소리를 내며 그 소리가 동쪽을 향해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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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로스 제국의 4만 대군은 각자 미리 정해놓은 루트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란데 백작은 1만의 본대를 이끌고 파스텔 공작령을 넘어 국경을 향해 다가갔다.
찌는 여름날 아래에 갑옷을 입고 행군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태양이란 군주가 풀어놓은 더위란 병사들은 적아 구별 없이 모든 이들을 힘들게 했다.
투구 안은 찜통이 들어앉은 듯 후끈거렸으며, 갑옷 틈 사이로 땀이 쉴 새 없이 배어나왔다.
기사들이 타고 있는 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냥 걷기만 해도 더운데 무거운 안장과 풀 플레이트 갑옷을 입은 기사들을 태우고 있다 보니 혀를 추욱 내밀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란데 백작은 땅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열기를 감지하며 생각에 잠겼다.
‘정오가 되면 온도가 더 올라가겠군. 숲을 벗어난 후에 휴식시간을 가져야겠어.’
숲 속은 나무그늘이 있어 쉬기에 안성맞춤이지만 지금 쉬면 가장 더울 때인 오후 때까지 계속 쉬어야 하니 오늘 안에 숲을 나가지 못할 수도 있었다.
최근 비가 내리지 않아 나무며 풀이 바짝 말라 있는 상태였다. 마른 숲에서 야영을 했다가 적이 화공이라도 쓰면 아무 것도 못하고 당할 가능성이 높았다.
차라리 조금이라도 덜 더운 지금 숲을 통과하고 숲 너머에 천막을 쳐서 그대로 야영을 하는 게 나았다.
브리니아 왕국도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일 테니 작은 것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할 때였다.
모든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그란데 백작과 달리 휘하의 기사 몇 명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지방에서 올라와 본대에 합류한 엑스디와 라이랄이란 기사가 있었다.
두 기사는 어느 자작령 소속으로 자작부인이란 인맥을 통해 기사가 된 자들이었다.
엑스디와 라이랄은 더위 속에서 말을 몰며 밑도 끝도 없이 투덜거렸다.
“어이, 라이랄. 무더위 속에서 행군을 한다는 게 말이 되? 요즘은 기사양성소에서도 이리 움직이지 않는다고.”
“동감이야. 듣자하니 이번 전쟁은 황제 폐하를 위해서니 뭐니 하면서 그란데 백작이 주도했다더라.”
“쳇, 윗대가리 놈들이 생각하는 게 다 그렇지 뭐. 이때다 싶어 공을 세우려는 거겠지. 더워 뒤지겠는데 휴식시간 없이 계속 진군시키는 꼴을 봐. 이러다 싸우기 전에 다 쓰러지겠어.”
“저쪽에 냇가가 있는데 잠깐 땀이라도 씻고 가자고.”
엑스디와 라이랄은 멋대로 대열을 이탈하여 나무 사이로 들어갔다.
라이랄의 말대로 나무 사이로 들어가자 냇가가 나왔다.
비가 내리지 않아 물줄기가 매우 미약했지만 한두 사람이 땀을 닦아낼 수준은 되었다.
두 기사가 말에서 내려 투구를 벗으려던 찰나.
뒤에서 벼락같은 호통이 떨어졌다.
“뭣들 하는 것이냐! 기사란 이가 행군 중에 대열을 이탈하다니 제정신이더냐!”
호통을 친 사람은 그란데 백작이었다.
두 기사가 이탈하는 것을 본 다른 기사가 그란데 백작에게 보고를 올렸던 것이었다.
엑스디와 라이랄은 깜짝 놀라 벗었던 투구를 다시 쓸 생각도 못한 채 몸이 굳어버렸다.
“죄, 죄송합니다. 투구 안에 땀이 차서 그만......”
“용서해주십시오.”
“행군 중이니 긴 말하지 않겠다. 두 사람의 처분은 숲을 빠져나간 후에 할 것이니 대열에 합류해라!”
그란데 백작의 기세에서 큰 벌이라도 내릴 줄 알았던 두 기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도로 대열에 합류했다. 그리곤 대열 선두로 복귀하는 그란데 백작의 뒷모습을 보며 철없이 웃었다.
“누가 보면 큰 죄라도 지은 줄 알겠네. 조금 빠져나왔다고 고자질 하는 놈이나 그걸 듣고 찾아오는 놈이나 쪼잔해서 못 봐주겠구만.”
“그러게 말이야. 더운 거 알면 휴식시간이나 가지지 이 더위에 무슨 강행군이람.”
어차피 말로만 경고하는 것뿐이라 여겨 점점 그란데 백작을 우습게보기 시작한 젊은 두 기사였다.
하지만 그건 두 기사의 착각에 불과했다.
수 시간 뒤, 숲에서 빠져나온 그란데 백작은 넓은 들판에 야영지를 세우라 이르며 엑스디와 라이랄을 불렀다.
병사들을 재촉하여 저희들 쉴 공간을 만들게 하던 엑스디와 라이랄은 호출을 받고 달려왔다.
“백작님,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란데 백작은 엑스디와 라이랄을 강렬히 노려다보다 냉정한 투로 명령을 내렸다.
“이 둘을 틀에 묶어라.”
“네!”
주변의 기사들이 엑스디와 라이랄을 붙잡아 갑옷과 투구를 벗기곤 기다란 나무틀에 엎드리게 하였다. 동시에 밧줄로 팔과 다리, 허리를 빙빙 둘러 감아 고정하였다.
별안간 형틀에 엎드리게 된 엑스디와 라이랄은 얼굴을 찡그리며 사정이라도 알고자 하였다.
“배, 백작님! 가,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무엇 때문에 이리 묶여야 하는 겁니까? 말씀해주십시오!”
그란데 백작은 싸늘한 눈빛으로 고개조차 들지 못하는 두 기사를 내려다보았다.
“병사의 모범이 되어야 할 기사가 멋대로 대열을 이탈한 죄. 원래라면 탈주병으로 여겨 참수를 해야 마땅하나 경험부족과 첫 실수임을 감안해 곤장 20대로 끝내겠다. 이번 일을 거울삼아 전공을 세울 수 있게 노력하도록.”
형벌을 담당하는 기사들이 기다란 나무봉을 들고 와 곤장을 쳤다.
짜악! 짜악!
곤장이란 내리치는 모양새와 달리 뜯어내는 힘을 통해 아픔을 주는 형벌이다.
처음부터 두 기사의 엉덩이가 벌겋게 부어오르는가 싶더니 10대쯤 치자 피와 살점이 묻어나왔다.
시골 마을에서 흔치 않은 실력을 지닌 기사로서 어깨에 힘을 주고 다녔던 엑스디와 라이랄이다.
형벌이라든지 아픔이라곤 겪어보지 않은 그들에게 곤장을 견뎌낼 인내심은 존재하지 않았다.
20대를 모두 맞은 엑스디와 라이랄은 기절하다시피 몸을 늘어뜨렸다.
그란데 백작은 병사들로 하여금 엑스디와 라이랄을 데려가라 일렀다.
“이 둘은 데려가라. 그리고 이참에 모두에게 확실히 전해두마. 한 번쯤은 괜찮겠지, 나 하나쯤은 괜찮겠지 하는 생각이 모두를 위험에 빠뜨리는 게 전쟁이다. 모두가 조금씩 불편함을 감수하는 게 자신을 살리고 나아가 아군을 살리는 길임을 명심하도록.”
곤장 20대가 가벼운 벌은 아니었지만 그란데 백작으로선 많이 봐준 것이었다.
대상이 시골에서 고작 수십 명밖에 이끌어보지 않은 젊은 기사라는 점과 엑스디와 라이랄이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마나유저 중급에 이르는 유망주들이라는 것에서 공을 세워 만회할 기회를 준 셈이었다.
이 일을 반면교사 삼아 전군에 경각심을 심어줌과 동시에 당사자들도 깨닫는 게 있어 몸가짐을 바로 잡았으면 했다.
로엘이 자신을 무시하던 드리안 공작과 케이델 공작에게 기회를 주어 충신으로 거듭나게 한 것처럼 말이다.
허나 그란데 백작의 생각과 다르게 엑스디와 라이랄은 반성은커녕 그란데 백작에게 앙심을 품게 되었다.
병사들의 부축을 받아 본인들의 천막으로 돌아온 두 기사는 침상에 엎드려 누웠다.
엉덩이가 아파 앉을 수조차 없었다.
“젠장, 고작 더위 좀 식히려는 것 가지고 이따위로 사람을 두드려 패?”
“그 놈은 미쳤어. 쉬기 좋은 그늘을 놔두고 땡볕 내리쬐는 벌판에 진영을 차리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잖아.”
“씨팔, 저딴 놈 밑에서 싸워야 한다니 미치겠군.”
막 두 사람을 부축하고 나갔던 병사들이 도로 천막 안에 들어왔다.
“엑스디 경, 라이랄 경. 사령부에서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국경을 넘으면 부대를 이끌고 최전방 측면에 서라는 명령입니다.”
최전방이라고는 하나 측면의 선두는 비교적 안전한 편이었다.
그란데 백작은 두 젊은이가 반성의 기미를 가지고 첫 전투에서 바로 자신감을 회복하길 바라며 배려를 해준 것이었다.
하지만 엑스디와 라이랄은 최전방이라는 단어에 얽매여 그란데 백작에게 적개심을 가졌다.
“최전방이라니! 이미 눈 밖에 난 자라 이건가.”
“우릴 화살받이로 쓰려는 게 틀림없어. 큰소리 떵떵 치고 고향을 떠나왔는데 이게 뭐냐고.”
“죽을 바엔 차라리......”
엑스디의 말에서 심상치 않은 기미를 느낀 라이랄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미쳤어? 브리니아 왕국에 투항하려고?”
“여기 있다가 맥없이 뒈지는 것보단 나아.”
“브리니아 왕국에게 제국을 막을 힘이 있다고 생각해? 자칫 잘못하면 더 험한 꼴 당할지도 몰라.”
“너도 지금 군대 꼬라지를 낱낱이 봤잖아. 저런 미친놈이 이끄는 군대가 잘도 이기겠다. 첫 전투에서 살아남아도 저 미친 백작은 우릴 죽이려고 계속 화살받이로 쓸 건데 계속 이용당하고 있을 생각이야?”
그란데 백작이 자신들을 버리는 돌로 취급한다 여긴 두 기사는 점점 배신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재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뒷길만 사용해왔기 때문에 가능한 발상이었다.
기사가 될 때는 자작부인의 밤노리개를 자청하여 그를 이용해 되었고, 기사가 된 이후에는 도시 뒷골목의 뒤를 봐주며 편하게 실적을 쌓았다.
편한 길만 골라 살아온 두 젊은 기사에게 정공법으로 현 상황을 타개한다는 발상은 존재하지 않았다.
라이랄도 결국 배신을 결심했다.
“브리니아 왕국에 투항하는 건 좋은데 그들이 우릴 받아줄까?”
엑스디는 단검을 제복 안쪽에 넣으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그란데 백작을 처리하고 가면 환영 정도가 아니라 아주 후한 대접을 받지 않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