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80 8-3. 피를 흘려다오 =========================
8-3. 피를 흘려다오
레이아가 언급되자 울크의 자세가 약간 앞으로 기울었다.
로엘과 약혼한 레이아를 받아들이겠다는 말이 살짝 이해가 안 되었다.
“영문 모를 소리를 하는구나. 공주는 예전에 로엘 황제와 약혼을 했는데 어찌 받아들이겠다는 망발을 지껄이느냐?”
“약혼은 결혼을 예정한 의식일 뿐이지 결혼 그 자체는 아닙니다. 저희 브리니아도 로엘 황제가 행방불명되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특이현상에 휘말리셨다지요?”
“스이켄 그 아이가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용의 꼬리를 밟으려 하는구나. 특이현상 따위로 어찌될 사내가 아니니라.”
“그건 저희도 알고 있습니다. 듣자하니 하니온 왕국은 빌로스 제국의 휘하로 들어가기로 했다더군요. 정말 그걸로 만족하십니까? 비단 이 동맹은 브리니아의 생존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니온 왕가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동맹이기도 한 것입니다. 로엘 황제가 없는 지금이 빌로스 제국을 무너뜨리고 두 왕가의 명예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기회입니다.”
“말을 골라하는 것이 좋을 게다. 누가 누구의 밑에 들어간다 지껄이는 것이냐?”
적당히 울크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여긴 사신은 준비해온 비장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울크 전하께선 그리 생각하지 않고 계시겠지요. 레이아 공주께서 먼저 왕자를 만드시면 하니온 왕가의 핏줄이 제국을 이어받게 되는 셈이니까요. 하지만 그건 불가능합니다. 저희가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레이아 공주께선 아이를......”
“네 이놈!”
사신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울크가 왕좌를 박차고 일어나며 호통을 쳤다.
그와 동시에 단상 아래의 기사에게 손을 뻗어 차고 있는 검을 빼어들곤 사신의 목을 쳤다.
사신은 반응할 틈도 없이 검에 베였다.
목이 아래로 떨어지면서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울크는 피 묻은 검을 옆으로 늘어뜨렸다.
분노와 흥분으로 인해 성난 짐승처럼 숨을 몰아쉬었다.
삽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사신은 울크가 모르고 있는 사실을 알려주려는 듯 말했지만 울크도 이미 알고 있었다.
레이아가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몸임을.
“하아하아, 감히... 감히 내 딸의 아픔을 이용하려 해? 감히!”
원래 적국이라 할지라도 사신에게 손을 대지 않는 것이 예의였다.
그마저도 잃을 정도로 울크의 분노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처음부터 브리니아 왕국의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따윈 없었지만 이번 걸로 전의가 활활 타오르게 되었다.
울크의 분노 어린 모습을 보던 하니온의 신하들은 완전히 얼어붙었다.
위엄에 눌려 감히 말릴 수조차 없었다.
얼어붙은 장내 속에서 울크만이 숨을 몰아쉬며 외쳤다.
“바카스 공작!”
왕좌 바로 아래에서 대기하던 흰색 가면의 사내가 부름에 응했다.
반 언데드의 몰골이 되어 흰색 가면을 쓰고 다니게 된 바카스 공작이었다.
바카스 공작은 절도 넘치는 움직임으로 울크의 앞에서 허리를 숙였다.
“네, 전하. 신 바카스 여기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당장 왕궁의회를 소집해라! 당장!”
“네!”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본궁 안.
울크가 들고 있는 검의 끝에 브리니아의 피가 한 방울씩 뚝뚝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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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니온 왕궁의회 소속의 의원 20명이 긴급소집에 응하여 바쁘게 왕궁으로 모여들었다.
오늘은 울크가 브리니아의 사신을 만나기 때문에 회의가 없을 줄 알았다.
영문도 모른 채 불려온 의원들은 본궁의 회의장이 아닌 별궁의 연회장으로 불려갔다.
빈 연회장 안에서 의석도 없이 선 채로 대기하며 저희들끼리 대화를 나누었다.
“오늘은 브리니아 사신 때문에 회의가 없는 거 아니었습니까? 무슨 일로 긴급회의를 연 것일까요?”
“브리니아 사신이 긴급회의를 할 만한 소식을 들고 온 거겠지. 다들 기다려 보세.”
이윽고 모든 의원들이 도착했다.
이어서 연회장 정문을 통해 울크가 들어왔다.
울크는 중역들을 이끌고 연회장 앞쪽에 위치한 높은 지대에 올라섰다.
울크가 자리를 잡자 바깥의 기사들이 정문을 굳게 걸어 잠갔다. 정문만이 아니라 옆문이며 뒷문까지 모두 봉쇄되었다.
하니온 왕궁의원들은 갑자기 연회장에 갇히게 되어 당황을 금치 못했다.
“왜 입구를 봉쇄하는 거지?”
“전하! 무슨 일인지 설명해주십시오.”
“긴급회의라 듣고 왔습니다. 사정을 알았으면 합니다.”
장내가 크게 술렁이는 가운데 울크가 손을 휘저었다.
울크의 표정이 좋지 않음을 확인한 왕궁의원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술렁거림이 가라앉고 나서야 울크의 입이 열렸다.
“이 중에 브리니아와 내통하고 있는 첩자가 있다.”
가라앉았던 장내가 다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왕궁의원들은 사나운 눈빛을 띠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의원이란 직함을 달고 적국과 내통한 배신자에게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울크는 기사에게서 검을 건네받아 길게 뽑아내었다.
검집에서 피 묻은 검이 섬뜩한 몸체를 드러냈다.
의원들은 오늘 왕궁 안에서 피를 볼만한 일이 벌어졌다는 걸 알아차렸다.
브리니아의 사신이 울크의 분노를 일으킬만한 발언을 한 것이다.
울크가 피 묻은 검을 앞으로 내세웠다.
“내통자는 앞으로 나서라. 나서지 않겠다면 이 자리에 있는 모두를 베어버릴 것이다.”
레이아가 하니온 왕궁의 사람들을 설득한 절차는 이랬다.
먼저 울크와 하니온의 중역들에게 자신의 사정을 밝혔고, 그 뒤에 의원들을 따로 불러 모아 사정을 밝히며 설득했다.
그 뒤에 정식 왕궁회의에서 표결에 부쳐 만장일치로 빌로스 제국의 밑으로 들어가기로 하였다.
공식 선상에서는 자신의 비밀을 밝히지 않았다.
브리니아의 사신은 울크가 레이아의 비밀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즉, 레이아의 비밀을 알고 있으며 울크가 알지 못한다 여길만한 인물은 하니온 왕궁의원밖에 없는 셈이다.
내통자는 왕궁의원 중에 있었다.
레이아의 비밀을, 그 아이가 눈물을 머금으며 평생 안고 살아가야 할 슬픔을, 적국에 이용하라며 팔아넘긴 자를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울크는 서글픔과 치욕을 느끼며 눈시울을 붉혔다.
“어느 놈이더냐! 어느 놈이란 말이냐!”
왕궁의원들이 하나둘 겉옷을 벗으며 제자리에 두 무릎을 꿇고 목을 내밀었다.
“전하! 감히 왕국의 딸을 욕보인 자가 이 자리에 있다면 모두를 베어서라도 척결해주십시오! 그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을 바치겠습니다!”
“저 역시 목을 바치겠습니다!”
“베어주십시오!”
하니온의 충신들이 모두 무릎을 꿇었다.
그 중에 오직 한 명만이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어리둥절해 하며 서있을 뿐이었다.
얼마 전, 새롭게 하니온 왕궁의회 의회장으로 취임한 라파에로 후작이었다.
울크는 무릎을 꿇은 의원들 사이를 가로지르며 라파에로 후작에게 다가갔다.
“라파에로 후작. 네놈이 내통자로구나.”
라파에로 후작은 설마 의원 모두가 첩자색출에 자기 목숨을 내놓을 줄은 몰랐기에 당황하였다.
“저, 전 아닙니다. 저, 저 역시 목숨을 내걸겠습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말로만 목숨을 걸겠다고 할 뿐 발은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목소리는 숨긴 것을 들킨 자 마냥 부자연스러웠으며 얼마 전부터 자랑스럽게 달고 다니던 다이아몬드 브로치가 바닥에 떨어졌다.
라파에로 후작은 본능적으로 도망칠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재빨리 자세를 고쳐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그가 부질없는 변명을 꺼내기도 전에 울크가 다가왔다.
“라파에로 후작, 네놈은 짐의 믿음을 배신하고 적국에 나라를 팔고......”
말을 하던 울크가 잠시 눈을 감더니 분노와 슬픔을 삼키며 뒷말을 이었다.
“이 나라 딸의 눈물을 팔았다.”
울크의 검이 아래로 떨어지며 라파에로 후작의 목을 쳐냈다.
푸쉭!
라파에로 후작의 목이 떨어지면서 연회장 바닥의 카펫이 붉게 물들었다.
울크는 브리니아 사신의 피와 배신자의 피가 뒤엉킨 검을 쥔 채로 몸을 돌렸다.
레이아가 울크를 설득할 당시, 레이아는 울고 있었다.
세상 모든 이에게 공평하게 허락된 신의 선물을 자신만은 가질 수 없음에 오열했다.
하니온 왕국을 위해 살아왔고, 자신을 위해 살아온 아이다.
제멋대로에 자신만만하며 당당하던 아이가 처음으로 부탁이라는 것을 해왔다.
아픔을 품을 줄 알게 되고, 고개를 숙일 줄 알게 되었다.
가장 큰 아픔을 이용하려 한 자.
아비된 자로서, 신하된 자로서 어찌 용서할 수 있으리.
울크는 핏방울이 맺혀 있는 검을 검집에 꽂으며 신하들 사이를 도로 관통하였다. 그리곤 높은 지대로 올라서는 계단 위에서 등을 진 채로 말하길.
“나의 신하들이여. 레이아를 위해 피를 흘려다오.”
울크의 측근들부터 시작하여 왕궁의원과 기사들에 이르기까지.
장내에 있는 모두가 일제히 한 쪽 무릎을 꿇었다.
“기꺼이 흘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