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62 7-4. 내놓으라는 길은 안 내주고 =========================
희소식이라는 말을 듣고도 폭스와 로드리고는 긴장을 풀지 않았다.
대체 이 신임 마왕은 자기들을 얼마나 더 가지고 놀아야 직성이 풀리는 건가.
그런 생각으로 이미 뒤틀린 속을 달래느라 애쓸 뿐이었다.
로엘의 이어지는 말은 희소식인 건 둘째 치고 놀라운 소식이긴 했다.
“난 마계의 패권다툼에 관심 없어.”
폭스와 로드리고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마왕자리를 이어 받은 이가 마계의 패권에 관심이 없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두 마족은 표정관리조차 잊은 채 진위여부를 물었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이십니까?”
로엘은 팔을 벌리는 제스처를 취하며 피식 웃었다.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지. 난 마족이 아니라 인간이야. 우여곡절이 있어서 마왕의 표식을 얻긴 했다만 개인적으로는 인간계로 돌아가고 싶어.”
인간계에서 황제였으며 통일 직전이었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마계 정벌보다 인간계 통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산전수전 다 겪은 폭스와 로드리고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로엘의 말은 이어졌다.
“둘 모두에게 거래를 제안하겠어. 인간계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내준다면 마왕의 권한을 적극 활용해서 도움을 주고 가도록 하지.”
로엘로선 인간계로 돌아갈 방법을 찾을 수 있고, 폭스와 로드리고는 판결권한을 1회 사용할 수 있는 찬스를 얻게 되는 셈이었다.
누가 로엘에게 얼마를 더 줬니, 얼마나 더 공손했니 하는 것보다 훨씬 단순하고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결국 지금의 제안을 듣는 데에만 각각 4만, 5만 샤온씩 갖다 바친 셈이 되었지만 로엘의 교묘한 화술 때문에 그 누구도 그 점을 신경 쓰지 못했다.
지금 폭스와 로드리고의 머릿속에는 로엘이 정말 인간인지, 정말로 인간계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주면 판결로 이득을 줄지 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 거짓일까? 판결 권한으로 도움을 준다했는데 정말로 그리 해준다는 보장은 어디 있지?’
‘인간이라면 고작 해야 20년 정도 산 것 같은데... 고작 20년을 산 인간이 이 정도 강함과 지략을 갖추고 있다고? 사실이면 사실인대로 굴욕이고, 거짓이면 거짓인대로 골치 아프군.’
머리를 굴리는 소리가 로엘이 있는 곳까지 들려오는 듯했다.
로엘은 쉽게 결정할 수 없는 일임을 알고 있기에 시간을 주었다.
“대답은 내일 듣도록 하지. 하루 동안 차분히 생각해보도록 해.”
폭스와 로드리고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던 터라 흔쾌히 받아들였다.
///
폭스와 로드리고는 각각 ㄷ자형 저택의 양쪽 갈래 끝에 있는 방을 배정 받았다.
두 마족이 서로 사이가 나쁜 것을 알기에 일부러 마주치지 않도록 방을 배정해준 것이었다.
마왕의 저택 오른쪽 끝 방을 사용하게 된 폭스는 방 안을 서성이며 고민했다.
창가에는 폭스를 따라온 폴레이츠가 창틀에 발톱을 걸친 채로 거꾸로 서있었다.
고민하던 폭스가 중얼거림인지 질문인지 모를 어중간한 말투로 말했다.
“진심일까 아니면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걸까?”
폴레이츠가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거짓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인간이라고 거짓말을 해서 본인이 이득 볼 게 없으니까요.”
“그 부분은 나도 사실일 거라 여기고 있어. 문제는 제안 부분이야. 정말로 인간계로 돌아가고 싶을 뿐인지 다른 꿍꿍이가 있을 뿐인지 진의를 파악할 수가 없어.”
“너무 깊게 생각하지 않는 게 좋지 않을까요? 이번 일도 너무 깊이 생각하다가 4만 샤온만 바친 셈 아닙니까.”
“그 4만 샤온 중 1만 샤온을 누구 때문에 빼앗겼다 여기는 것이냐?”
“쩝,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야 뭐......”
고민하고 있던 차에 창가 너머로 타유아와 굴란트가 정원 쪽으로 가는 것이 보였다.
폭스는 달리 뾰족한 수도 없는 터라 마왕군 간부들에게서라도 정보를 얻고자 했다.
“마왕군 간부들이라도 구슬려 봐야겠군.”
“마왕군 간부들은 폭스 님을 무척 싫어할 텐데요. 묵은 감정이 있어서 제대로 된 정보를 주지 않을 겁니다.”
“네놈은 대체 누구 편이더냐?”
“다, 당연히 폭스 님 편입니다.”
“안 된다, 안 된다 지껄일 줄만 알지 하나도 할 줄 아는 게 없군. 무능력한 놈.”
“죄송합니다.”
폭스는 고개를 조아리는 폴레이츠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며 나갈 채비를 하였다.
이 이상 로엘에게 놀아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이미 체면은 뭉개질대로 뭉개졌다.
실리라도 챙기지 않으면 분통 터져서 렌던 방향으론 발 뻗고 자지도 못할 것 같았다.
폭스는 마왕군 간부들이 돈에 혹할 놈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그들이 혹할만한 걸 궁리하며 정원으로 향했다.
///
폭스가 ㄷ자 건물 모서리에 있는 옆문으로 나오자 반대편 모서리 옆문에서 로드리고가 나왔다.
로드리고도 폭스처럼 로엘의 진의를 파악하느라 골머리를 감싸고 있었던 것이다.
로드리고 역시 정원에 나온 타유아와 굴란트를 보고 정보를 얻고자 나온 것이었다.
앙숙과 친구는 한 끗 차라 했던가.
하는 짓도 생각하는 것도 비슷한 두 마족이었다.
폭스와 로드리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다가서며 으르렁거렸다.
“마왕 앞에서 강아지마냥 잘도 꼬리를 흔들더군. 부채질이나 해주려고 꼬리 9개 달고 태어났나?”
“그쪽이야 말고 서열 2위라고 어깨에 힘주고 다니더니 이마에서 육수만 줄줄 뽑던데?”
“훗, 네놈이 하는 생각이야 뻔하지. 마왕군 간부들에게 말 걸 생각은 말아라. 지난 수 년 동안 마왕군 간부들이 누구에게 시달려 왔다고 생각하느냐?”
폭스는 눈썹을 씰룩거리며 혼령불을 소환하려 했지만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로엘의 말이 스쳐지나갔다.
‘경고로 끝나는 건 이번뿐이다.’
로엘의 저택 안에서 로엘이 검을 뽑게 하는 건 자살행위였다.
단 한 번의 검짓이었지만 보랏빛 활성화의 핵과 로드리고의 전격을 걷어낸 그 무위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현재 마계에서 가장 자인 고르오스라 한들 로엘에게 이긴다고 장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폭스가 주춤하면서 두 마족은 소강상태에 빠졌다.
그 틈을 타서 벽 모양으로 반듯하게 깎인 정원수 너머에서 타유아와 굴란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간계로 돌아가고 싶어하신다고 하셨잖아. 난 금시초문인데 대체 무슨 말이야?”
마왕군 간부인 타유아도 모르던 사실이었던 건지 그와 관련된 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폭스와 로드리고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듣고 싶었던 이야기가 진행 중임을 알고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서로 다투기 보단 모처럼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게 중요했다.
지금 막 타유아가 던진 질문에 굴란트가 대답하려는 참이었다.
“흥분하지마. 단순히 마계 7기둥을 속이기 위한 말이니까.”
“마계 7기둥을 속여? 무슨 뜻이야?”
“너도 마왕님께서 인간계의 황제인 건 알고 있지?”
“그건 알고 있어. 인간계에서 커다란 제국을 다스리고 있었다고 했잖아.”
“지금 마왕군 최대 약점은 세력이 작다는 거잖아. 근데 인간계의 병력을 끌어오면 어떻게 되겠어?”
“적어도 수 만 이상의 병력이 더해지겠네.”
“마왕님은 여기 오자마자 마계와 인간계를 오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라고 하셨어. 근데 여기 렌던의 서적만으로는 솔직히 무리더라고. 그래서 폭스와 로드리고를 이용해서 방법을 찾게 하실 생각인 거지.”
“그런 중요한 이야기를 왜 나만 몰랐던 거야?”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으니까 그렇지.”
“내가 그 이야기 꺼내지 말라고 했지? 확 가시나무 숲에 매달아버린다?”
그 뒤의 대화는 타유아와 굴란트가 투닥거리는 쪽으로 흘러갔다.
정원수 너머에서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폭스와 로드리고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로엘의 진의(?)를 알게 되었다.
폭스와 로드리고는 서로 싸울 때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먼저 폭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네놈이 매우 싫지만 지금만큼은 그 생각을 접어야겠군.”
“동감이다. 하마터면 범에게 날개를 달아줄 뻔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