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61 7-4. 내놓으라는 길은 안 내주고 =========================
폭스는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브론즈 체스가 완전히 부서지면서 보랏빛 활성화의 핵 파편이 바닥을 굴렀다.
퀸까지 진화하지 못할 정도로 심한 타격을 입었음을 의미했다.
마왕 포섭에 있어서 적은 로드리고뿐이라고 여겼는데 완전히 착각하고 있었다.
마왕 본인은 힘만 가진 바보가 아니었다.
지금 로엘이 직접 나와 상황을 타개한 건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로엘이 대치 상황을 직접 처리함으로서 폭스와 로드리고에게 격을 매겨버렸다.
세력 대 세력싸움이면 폭스와 로드리고가 월등히 우세하다.
하지만 단순 수장대결로 가면 이만큼이나 차이가 있다고 자연스럽게 경고한 셈이 되어버렸다.
더하여 로엘이 이 사태를 ‘소란’으로 치부함으로서 폭스와 로드리고는 로엘에게 폐를 끼친 게 되었다. 원래는 사절단으로서 손님 대접을 받아야 할 위치였는데 로엘의 행동 하나로 소란을 일으킨 난봉꾼들로 추락하였다.
무엇보다 두려운 건 이 상황이 돌발상황이었다는 점이었다.
갑자기 벌어진 소란임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타이밍에 튀어나와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만들었다.
소란조차도 이용할 수 있는 재치를 가진 자란 뜻이었다.
폭스는 첫 대면만으로 로엘이 상상 이상의 강적임을 알아차렸다.
그건 로드리고도 마찬가지였다.
로엘은 폭스와 로드리고가 변명할 틈조차 주지 않고 검을 검집에 넣으며 말머리를 돌렸다.
“인사하러 왔다면서 인사는커녕 말조차 하지 않는군. 무례한 놈을 받아들일 자리는 없으니 썩 돌아가도록.”
폭스와 로드리고의 방문은 표면적으로는 인사 하러 온 것으로 되어있었다.
초장부터 그 명목 자체를 뭉개버리는 로엘이었다.
렌던에는 발조차 들이지 못하고 축객령을 받게 된 두 마족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로엘의 축객령도 축객령이지만 방금 무례한 ‘놈’이라 했었다.
두 마족 모두를 지칭하는 게 아니라 한 쪽에게만 축객령을 내린 것이었다.
여기서 지명되지 않은 쪽이 어느 쪽인지 알 수 없어 자기는 따라가도 되는 것인지 고민했다.
로엘은 냉정하게 렌던 쪽으로 말을 몰다가 잠깐 뒤를 돌아보며 로드리고를 향해 검지를 까딱였다.
“로드리고, 폭스에게 한 말이니까 신경 쓰지 말고 따라와라.”
로드리고는 구겨질 뻔했던 인상을 펴며 급히 로엘을 따라나섰다.
반면 폭스의 얼굴은 미청년의 모습이 완전히 지워질 정도로 엉망진창으로 구겨졌다.
두 마족은 여전히 마왕 포섭이란 전제조건의 연장선에서 로엘의 행동을 받아들였다.
‘폭스보다 내 쪽이 더 많은 자금을 준비했단 걸 들은 모양이군. 폭스를 버리고 날 선택한 것이렷다.’
‘젠장! 역시 로드리고에게 포섭된 후였나. 이대로 물러날 순 없어.’
이대로 로엘과 로드리고가 손을 잡게 놔둬서는 안 된다.
모든 게 폭스에게 불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폭스로선 마음이 조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폭스는 데스나이트 부대를 대기시키곤 홀로 유령마를 몰아 로엘에게 다가갔다.
마왕군 간부들은 폭스가 오는 걸 기다리기라도 한 듯 자연스럽게 길을 내주었다.
조급해진 폭스에게 거기까지 감지할 여유는 없었다.
로엘의 옆에 바짝 붙은 폭스는 일단 두 손부터 모으고 봤다.
“신임 마왕께 인사 올립니다. 렌던 북쪽에서 미약하게나마 마계 7기둥의 일각을 맡고 있는 폭스라 합니다.”
로엘은 폭스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고자세를 유지했다.
“얘기는 많이 들었어. 여러 가지 재미있는 짓거리를 많이 했더군.”
“그, 그건......”
로드리고는 폭스가 수작 부릴 틈조차 주지 않기 위해 대놓고 험담을 하였다.
“마왕이시여. 저 자의 말에 귀 기울이실 것 없습니다. 당장 돌아가라 하소서.”
로드리고가 간섭하려 들자마자 로엘의 미간에 주름이 그어졌다.
“적어도 폭스는 인사는 했건만 그대는 바로 험담부터 시작이군. 아무래도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것 같군. 물러나라. 그리고 폭스 그쪽이 대신 따라오도록.”
폭스의 표정이 밝아지는 반면 로드리고의 표정은 금세 어두워졌다.
로엘의 양옆에서 흑과 백이 계속 교차하고 있었다.
로드리고는 초보도 하지 않을 기본적인 실수를 한 것인지라 뭐라 하지도 못하고 끙끙 앓았다.
금방 로드리고도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최대한 저자세로 로엘에게 인사를 올렸다.
“로드리고가 마왕님께 인사 올립니다. 제가 우매하여 감히 있을 수 없는 행동을 한 것이니 너그러이 용서해주십시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주의하겠습니다.”
폭스는 로드리고의 실수로 기회를 잡은 김에 그를 내쳐버리고 싶었지만 괜히 로엘에게 꼬투리 잡힐까봐 함부로 말을 꺼내지 못했다.
어느새 두 마계 7기둥 모두 로엘의 눈치를 보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뒤에서 폭스와 로드리고가 쩔쩔 매는 모습을 보고 있던 마왕군 세 간부는 속으로 연신 감탄사를 연발했다.
‘대단해. 저 로드리고와 폭스가 스스로 자세를 낮추고 있어.’
‘나오기 직전에 둘의 경쟁심리를 이용할 거라고 말씀하시긴 했다만 실제로 보니까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군.’
‘나 같으면 폭스를 바로 버렸을 텐데 수작 부린 자도 이용하려 들면 저렇게 이용할 수 있구나. 진짜 말이 안 나오네.’
불과 30분 전.
렌던 바깥에서 소란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로엘이 잠깐 고민하더니 이리 말했었다.
정치질하기 딱 좋은 상황이 되었다고.
먼저 로드리고의 편을 드는 척하며 저울질을 할 것이니 동요하지 말고 묵묵히 따르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폭스와 로드리고가 로엘의 말에 따를까 의문을 가졌었는데 교묘한 개입과 무력시위, 말머리를 돌리는 타이밍이 겹쳐져서 두 마계 7기둥을 쥐고 흔들 수 있게 되었다.
폭스와 로드리고는 급기야 굽실거리기까지 했다.
“렌던의 자금 사정이 좋지 않다는 걸 듣고 새로이 3만 샤온을 준비했습니다. 넓은 아량으로 받아주십시오.”
“저 역시 3만 샤온을 가져왔습니다. 렌던에 들여보내주셔서 마왕님과 대화를 나눌 기회를 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는 영광으로 여기겠습니다.”
이제는 아예 제발 자금을 받아달라는 지경에 이르렀다.
로엘은 일부러 고민하는 척을 하다가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투로 말했다.
“흐음, 너희들의 성의를 봐서 렌던에 들어오는 건 허락토록 하지.”
폭스와 로드리고로선 자기만 들어갔으면 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두 마족은 들여보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말해야했다.
“마왕님의 넓은 아량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지난날의 무례를 만회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선제압에 성공한 로엘은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느라 애썼다.
두 마족을 마음껏 휘두른 다음 인간계로 돌아갈 방법을 알고 있는지 묻고, 혹시나 모른다면 찾게 만들거나 카에라의 땅에 문의해보도록 지시할 생각이었다.
모든 것은 인간계로 돌아가기 위한 포석으로서 진행 중이었다.
‘이만큼 휘둘러 놓았으니 내가 인간계로 가고 싶다하면 냉큼 방법을 찾아보겠지. 좋아, 모든 게 잘 풀리고 있어.’
///
로엘은 폭스와 로드리고 일행을 이끌고 렌던으로 돌아왔다.
마왕의 저택 안에 위치한 회의장 안에서 로엘이 상석에 앉은 채로 폭스와 로드리고가 각각 양쪽 사선자리에 앉았다.
로엘은 테이블 위에 놓인 두 개의 샤온 브로치를 응시했다.
방금 폭스와 로드리고가 올려놓은 샤온 브로치였다.
두 개의 샤온 브로치를 들어서 위쪽 버튼을 누르니 각각 3만이란 숫자가 새겨졌다.
새로이 6만 샤온이 들어온 셈이었다.
로엘은 무덤덤하게 두 개의 샤온 브로치를 뒤에 서있는 스랄스에게 넘겼다.
“장부에 기록해둬.”
돈 같은 것엔 관심 없다는 듯한 행동이었다.
실제로도 마계의 돈따윈 인간계로 돌아가면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이니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로엘에겐 대수롭지 않은 행동이었지만 폭스와 로드리고에겐 큰 압박으로 다가왔다.
‘6만 샤온이면 적지 않은 돈인데 눈 하나 깜빡 안 해?’
‘렌던 1년 예산에 맞먹는 돈이건만!’
두 마족 모두 좀 더 돈을 들고 오는 게 좋았을까 하고 고민하던 차에 로엘이 입을 열었다.
“두 사람에 대해선 많은 이야기를 들었어. 마계 7기둥 내에서도 지금 2, 3위를 다투고 있다지?”
폭스와 로드리고는 뭔가 떠보려고 꺼낸 말인 줄 알고 머릿속에서 어떤 대답을 꺼낼지 고민했다.
그 정도로 두 마족은 로엘에게 주눅이 들어 있는 상태였다.
“고르오스에 비하면 한참 부족할 따름입니다.”
“운이 좋아 미천한 실력으로 과분한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과할 정도로 자신을 낮추는군. 단순히 운만으로 오르기에는 쉽지 않은 위치이지. 그만한 능력을 지니고 있으니까 지금의 두 사람이 있는 거 아니겠어?”
여태까지 질책만 하던 로엘이 돌연 두 마족을 높이 사기 시작했다.
두 마족은 오히려 칭찬이 더 불안하게 느껴졌다.
무슨 이야기를 꺼내려고 갑자기 칭찬해주기 시작하는 건가.
아니나 다를까 로엘의 칭찬은 완급을 주기 위한 포석에 불과했다.
로엘은 양손을 겹쳐 깍지를 끼며 자신만만한 어투로 말을 꺼냈다.
“2, 3위를 다투는 바쁘신 분들이 고작 렌던 밖에 가지지 않은 내게 앞다퉈서 인사 하려는 이유가 뭘까? 난 그게 참 궁금하단 말이지.”
식은땀이 폭스와 로드리고의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로엘은 시작부터 각자의 입으로 속내를 밝히길 원하고 있었다.
말투로 보아 두 사람의 속내는 이미 알고 있고 속을 떠보기 위한 질문이었다.
여기서 까딱 잘못 대답했다간 바로 렌던에서 쫓겨날 가능성이 농후했다.
인사 제대로 안 했다고 돌아가라 말하는 사람이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먼저 칼을 빼어든 건 로드리고였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마왕님의 판결 권한을 이용해서 폭스의 땅을 제압하려 했습니다.”
로드리고가 솔직하게 말함으로서 선수를 쳤다.
순간적으로 폭스는 발끈할 뻔했다.
서로의 의도를 알고 있다곤 해도 코앞에서 대놓고 듣는 것만큼 기분 나쁜 건 없었다.
거기에 로드리고가 먼저 솔직하게 말함으로서 폭스의 입장이 애매해졌다.
이제 와서 돌려 말하기에는 늦었고, 솔직하게 말한다 하더라도 로드리고 보다 솔직함이 부족한 자로 낙점되어 버린다.
로드리고도 거기까지 계산하고 냉큼 진실을 밝힌 것인지 폭스를 보며 의기양양한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고민하던 폭스는 문득 로엘의 말에 어폐가 있음을 느꼈다.
‘잠깐! 결국 로드리고와 사전에 합의가 되어 있던 게 아니란 말이잖아. 완전히 놀아났군.’
로드리고도 대답을 한 이후에야 깨달았는지 당했다는 낌새를 내비쳤다.
그러나 이미 새로이 가져온 6만 샤온은 로엘에게 넘어갔고, 두 마족이 저자세를 취하면서까지 렌던에 입성한 것은 변하지 않았다.
게다가 화를 내기에는 로엘이 보인 무력이 너무나도 큰 걸림돌이 되었다.
알아챈 것만으로 대응하기에는 두 마족 모두 로엘의 파놓은 함정에 허리까지 잠긴 상태였다.
로엘은 두 마족이 상황파악을 끝낸 걸 알아차리곤 대놓고 두 마족에게 일침 가했다.
“난 너희를 속이지 않았어. 너희 멋대로 날 이용하려다가 제 꾀에 빠진 거지. 왜 그런 줄 알아? 난 세력이 작고 너희는 2, 3위를 다투는 큰 세력이니까. 너희들 스스로 자기가 잘난 줄 알고 나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야. 적어도 자신이 상대하는 자가 어떤 자인지 알아보는 노력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니겠어? 탓할 거면 너희의 무거운 엉덩이를 탓하라고.”
로엘의 말에 틀린 점이 없는 터라 두 마족은 더더욱 할 말이 없어졌다.
이번 일은 원인은 자만심이었다.
그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랜드 마스터급의 실력자가 가세한 8세력 중 최약체.
어차피 견제해야 할 정도는 아니며 상대는 같은 마계 7기둥 뿐.
자금이 부족하니까 돈을 주면 혹하겠지.
이 모든 생각이 잘못된 것이었다.
폭스와 로드리고가 스스로를 탓할 틈도 없이 로엘이 새로운 카드를 꺼내들었다.
“뭐 바보 같은 짓을 하긴 했지만 비관할 건 없어. 내가 너희들에게 희소식 하나를 전하도록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