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58 7-4. 내놓으라는 길은 안 내주고 =========================
///
렌던으로 돌아가는 길에 타유아는 로엘에게 폴레이츠에게서 제안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폭스 측에서 제안을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전해왔어요.”
“어떤 제안?”
“이쪽에게 좋은 이야기라 했으니까 길을 내주는 것과 관련된 이야기 아닐까 싶어요.”
로엘로선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폭스에게 사신이 지나갈 길을 터달라고 말한 건 로엘이다.
그런데 왜 타유아에게만 그 이야기를 하고 떠난 건가.
“내가 아니라 너에게 말했다고? 확실해?”
“이런 걸로 거짓말 할 단계는 지났잖아요. 어제 그런 일까지 있었으면서......”
너무 두루뭉술하게 말한 탓에 마족 병사들이 오해를 하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로엘은 눈을 가늘게 뜨면서 주의하란 눈빛을 보냈지만 타유아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특유의 촉촉한 눈망울을 깜빡거릴 뿐이었다.
로엘은 한 번 더 진위여부를 물었다.
“확실한 거 맞아?”
“맞을 걸요. 그것 외엔 달리 해올 이야기가 없으니까요.”
“근데 왜 내가 아니라 네게 전했을까.”
“어쩌면 폭스의 군대 돌격대장을 맡고 있는 오르시치의 부탁을 받은 것일지도 몰라요. 예전부터 계속 저한테 청혼해왔었거든요. 제가 점수 따게 해주려고 일부러 저를 통해 전달해온 것일 수도 있어요.”
청혼 받았다고 하는 부분에서 타유아가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
필 가슴도 없었지만 말이다.
로엘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아, 그래. 잘 됐네.”
“저 이래봬도 여러 군데에서 데려가려고 난리인 여자예요.”
“하긴 테이머는 어딜 가든 필요하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으으!”
괜히 타고 있는 쌍두마의 갈기털을 잡아당기며 볼을 부풀리는 타유아였다.
로엘은 심통을 부리든 말든 폴레이츠란 자가 가져온 제안에만 신경 썼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 보재?”
“내일 정오에 북쪽 위험지대 가시나무 숲에서요.”
“내일이면 남쪽 위험지대가 활성화되잖아. 북쪽에 불러놓고 남쪽에서 뭔가 하려는 건 아니겠지?”
“저만 갔다와볼게요. 부른 건 저뿐이니까 저한테만 뭔가 귀띔해주려는 것 같아요. 폭스가 직접 나오는 것도 아닌 것 같았고요.”
로엘의 시점에서는 그저 폭스가 타유아를 섭외하려는 것이거나, 마왕군의 시선을 북쪽으로 끌어 놓고 내일 활성화 될 남쪽 위험지대에서 무슨 짓을 하거나 둘 중 하나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의심하다 보니 이런 생각도 들었다.
타유아에게 호감을 지니고 있는 오르시치란 자가 타유아를 따로 불러내기 위해 꾸민 일일 수도 있었다.
로엘은 그 부분은 짚어냈다.
“처음부터 폭스의 전언은 없었고 오르시치가 타유아 너를 만나려고 거짓말을 한 것일 수도 있지.”
타유아도 그럴 가능성은 충분하다 여겼는지 인상을 팍 찌푸렸다.
“생각해보니까 그럴 수도 있겠네요. 제대로 거절했는데 왜 자꾸 들이대는 건지 원.”
“어디서든 테이머는 필요......”
“아 정말! 계속 그러시기예요?”
“하하, 미안미안. 일단 어느 쪽이든 타유아 혼자 다녀오는 게 낫겠네. 우린 예정대로 남쪽 위험지대를 토벌하자고.”
“저 방치해두는 거예요?”
“너 혼자 간다며.”
“오르시치 싫어요. 둘만 있으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요. 한 번은 다른 사람들이 있었는데도 억지로 입 맞추려 했다고요.”
로엘은 여전히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럼 가지 말던가.”
“근데 정말로 폭스의 전언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하는 수 없구만. 내가 동행하도록 하지. 스랄스, 내일 아침으로 예정되어 있던 남쪽 위험지대 토벌 말인데 오후로 미뤄도 상관없겠지?”
오르시치란 자의 수작이라고 확정되는 가운데 스랄스가 로엘의 행동에 맞춰 예정을 변경하였다.
“오후에 토벌해도 문제없을 겁니다. 남쪽 위험지대 토벌은 점심식사 이후로 미루는 걸로 하죠. 마왕님과 타유아가 돌아오는 즉시 점심식사를 할 수 있도록 준비해두겠습니다.”
“그래봤자 샐러드뿐이겠지.”
“내일은 특별히 고기 요리를 준비해둘 생각입니다.”
“바비큐?”
“아뇨, 저번에 마왕님이 사두신 육포를 넣어 육포 샐러드를......”
“그걸 당당하게 고기 요리라고 말하는 뻔뻔함을 칭찬하고 싶군.”
샐러드는 질린다만 예산이 부족한데 어쩌겠는가.
로엘이 보기에 렌던은 병력보다 예산부터 채워두는 게 급선무인 것 같았다.
로엘의 위장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로엘은 금방 처리하고 바로 남쪽 위험지대 토벌에 나서는 걸로 확정지으며 렌던으로 복귀했다.
///
다음날, 붉은색 달이 중천에 떴을 무렵.
렌던 북쪽 위험지대의 가시나무 숲 중앙에선 폴레이츠가 몇몇 호위병력을 이끌고 대기 중이었다.
폴레이츠의 발치에는 1만 샤온의 가치를 지닌 보물상자가 놓여 있었다.
1만 샤온이면 4성급 부대장의 인재가 1년 반을 근무해야 벌 수 있는 돈이었다. 마계 주민 수준으로 환산하면 10년은 일해야 벌 수 있는 금액이었다.
폴레이츠는 보물상자 안의 내용물을 확인하며 확신에 가득 찬 웃음을 흘렸다.
“보는 순간 눈이 휘둥그레지겠군. 타유아 따위를 포섭하기에는 많은 감이 있지만... 뭐 1만으로 렌던을 산다고 생각하면 그리 비싼 것도 아닌가.”
이미 마왕에게서 마음이 떠난 타유아라면 1만 샤온을 보자마자 넘어올 것이다.
어제도 타유아의 상황을 안다고 하자마자 그녀의 표정이 밝아졌다.
본인도 답답했으리라.
마음에 들지 않는 주군을 섬기기는 싫은데 달리 갈 곳이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폴레이츠는 염가판매 하는 달걀을 사러 나온 기분으로 타유아를 기다렸다.
약속시간이 다 되어 가던 때에 타유아가 오나 안 오나 보러 갔던 병사 한 명이 돌아왔다.
돌아온 병사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폴레이츠 님. 타유아가 오고 있습니다.”
“역시 렌던을 등질 생각이었군.”
“그, 그게 아니라 신임 마왕과 함께 오고 있습니다. 게다가 20명의 병력까지 동행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뭐라고?”
폴레이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타유아도 폭스의 땅에서 자신을 포섭하려 한다는 것 정도는 알아들었을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가 아닌 마왕과 함께 오고 있었다.
폴레이츠의 시점에서 마왕의 동행이 의미하는 건 한 가지뿐이었다.
“마왕에게 들킨 거군.”
“우릴 잡으러 오는 것 같습니다.”
원래 병사 20명 정도면 호위 병력으로 인식해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렌던의 병력은 고작해야 200명밖에 되지 않는다.
남쪽 위험지대가 활성화된 시점에서 전체 병력의 1할을 데려 왔기에 마음먹고 병력을 이끌고 온 것처럼 느껴졌다.
폴레이츠는 속으로 괜히 타유아를 탓했다.
‘멍청한 년! 제안을 받아들일 거였으면 알아서 행동에 주의했어야지! 제길, 여기서 마왕에게 잡히는 건 좋지 않아.’
“여기선 물러난다. 보물상자를 도로 실어라!”
이번에는 중간지점에 세워둔 병사가 달려와 로엘의 행보를 알렸다.
“마왕이 속도를 높여 다가오고 있습니다!”
“제길, 작정하고 잡으러 온 거군.”
“보물상자와 짐수레는 어떻게 할까요? 짐수레를 달고 도망치다간 붙잡힐 겁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보물상자와 짐수레는 버리고 가는 게 나았다.
여기서 잡혔다간 폴레이츠 일행이 살아있는 증거가 되어버린다.
폭스가 렌던에 수작을 부리고 있다는 증거가 말이다.
심증만 있을 때와 물적 증거까지 확보한 때는 명백히 다르다.
폴레이츠는 보물상자를 보며 침을 꿀떡 삼켰다.
1만 샤온이나 되는 돈을 버리고 가려니 너무 아까웠다.
아까워서 쉽사리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데 그의 호위 병력이 폴레이츠를 재촉했다.
“점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가려면 지금 가야 합니다.”
“보물상자는 아깝지만 잡히는 것보단 낫습니다.”
폴레이츠로선 짜증이 울컥 솟아났다.
이대로 돌아갔을 경우 폭스에게 깨지는 건 폴레이츠 뿐이었다.
타유아 때문에 시작된 짜증이 재촉하는 호위병력에게로 옮겨졌다.
‘이것들이! 폭스님께 깨지는 건 나란 말이다!’
당장은 짜증낼 시간이 없었기에 내리갈굼을 예약해둔 상태로 복귀 명령을 내렸다.
“보물상자와 짐수레는 버려라. 당장 복귀한다. 녀석들의 눈에 띄기만 해도 문제가 될지 모르니 바로 출발해라.”
호위병력도 하루이틀 폴레이츠를 상대해온 게 아니기 때문에 왕창 깨질 걸 예감하며 각자 쌍두마에 올랐다.
///
로엘과 타유아는 쌍두마의 허리를 차며 빠르게 속도를 높였다.
두 사람이 속도를 높인 건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너무 느긋하게 출발한 나머지 약속시간을 훌쩍 넘길까봐 속도를 높인 것일 뿐이었다.
속도를 높인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하고 나니까 무언가를 담은 상자와 짐수레밖에 없었다.
로엘은 좌우를 둘러보며 아무도 없는 걸 다시금 확인했다.
“아무도 없는데? 정말 여기서 만나기로 한 거 맞아?”
“가시나무 숲 중앙에서 보기로 했었어요.”
“흐음, 도대체가 영문을 알 수 없군.”
“상자를 열어보죠. 이 상자를 전하는 게 목적이었을 수도 있으니까요.”
타유아가 쌍두마에서 내려 상자를 열어보았다.
상자 안에는 보석이 가득 들어 있었다.
“이거 보세요. 전부 보석이에요.”
“왜 보석을 놔두고 간 걸까?”
로엘과 타유아는 고민해보았지만 도저히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상자 안에 폭스의 전언이 있나 싶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폭스의 전언도 없고, 오르시치가 타유아를 불러낸 것도 아니었다.
타유아를 따로 불러내 돈을 건네려 했다?
로엘은 처음부터 타유아가 폴레이츠의 말을 잘못 받아들인 거였음을 알아차렸다.
“그냥 처음부터 널 포섭하려고 부른 거였구만. 내가 동행하니까 일이 수틀린 걸 깨닫고 짐을 버리고 떠난 거지.”
“저를요? 왜 하필 저였을까요. 전 이미 마왕님을 따르기로 했는데 말이죠.”
“그래봤자 이틀 전 한밤 중부터였잖아. 착각하고 포섭하려 했던 걸 거야.”
“그럼 이 돈은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긴. 꽁돈 얻었으니까 잘 써야지. 일단 너희 밀린 월급이랑 시내에 쌓인 외상부터 처리해야겠군.”
“월급은 괜찮으니까 마왕님 생활부터 개선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샐러드 질린다고 하셨잖아요.”
“이렇게 하자. 밀린 월급 전부 지급하고 너희가 한 턱 쏘도록 해.”
월급 밀린 게 로엘 탓은 아니지만 응당 지급 받아야 할 걸 놔두고 자기만 챙길 정도로 속 좁은 성격은 아니었다.
태연히 오랜만에 고기 먹는다고 웃고 있는 로엘을 보며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
마왕의 땅 서쪽 너머에 위치한 로드리고의 땅.
로드리고는 현재 가장 많은 땅을 지닌 고르오스를 견제함과 동시에 폭스의 추격을 막기 위해 계속 그를 주시하는 중이었다.
자연 타입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다는 번개의 힘을 지닌 그는 항상 전류를 두르고 있어 몸에서 광채가 흘러나왔다.
로드리고에게 있어 신임 마왕의 등장은 귀찮은 약소 세력이 등장한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서 신임 마왕의 움직임은 크게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허나 이번에 폭스가 취한 행동 때문에 신임 마왕에게도 신경 쓰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폭스가 신임 마왕에게 자금을 제공했다 이 말이더냐?”
“네, 폴로이츠가 자금이 담긴 상자를 렌던 북쪽 위험지대에 놓아두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 뒤에 바로 신임 마왕이 와서 상자를 가져갔습니다. 마치 약속된 듯한 움직임이었습니다.”
“이 놈 폭스! 신임 마왕을 이용해서 날 치려고 하는 것이구나.”
마왕에겐 분쟁에 대한 판결 권한이 있다.
로드리고 생각할 수 있는 건 폭스가 마왕을 포섭했고 그 직후에 로드리고의 땅을 친다는 것이었다.
로드리고가 두 번째로 많은 땅을 가지고 있다곤 하나 전력만 따지면 폭스와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결판이 나지 않거나 폭스가 불리해지면 마왕에게 판결을 요청해 유리한 판정을 받으려는 게 틀림없었다.
로드리고는 당장 대응에 나섰다.
“앉아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지. 폭스가 신임 마왕에게 얼마나 줬느냐?”
“정확한 액수는 알 수 없지만 1만 샤온은 넘는 것 같습니다.”
“우린 2만 샤온을 보내도록 해라. 폭스에게 넘어가지 말라는 서신도 써넣도록.”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