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57 7-4. 내놓으라는 길은 안 내주고 =========================
7-4. 내놓으라는 길은 안 내주고
다음날, 로엘은 렌던의 병사들을 이끌고 렌던 서쪽 위험지대에 들어섰다.
굴란트가 이끄는 돌격대, 스랄스가 이끄는 흑마법 부대, 테이밍 기술의 한 부류인 고양이 소환술로 고양이를 부리는 타유아가 함께 했다.
로엘이 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붉은색 위험지대를 강제정지 시키는 것만으로도 애먹었다고 한다.
타유아의 소환 고양이가 터줏대감을 찾아내면 스랄스의 흑마법 부대가 길을 열고 굴란트의 돌격대가 터줏대감을 처리하는 방식을 취해왔었다.
그 과정에서 항상 피해를 입어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그랜드 마스터급인 로엘이 가세했기에.
굴란트는 로엘과 함께 하는 첫 작업이라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마왕님과 함께 하는 위험지대 토벌. 오랫동안 이 순간을 기다려왔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이 굴란트가 몸을 던져 마왕님을 지키겠습니다.”
옆에서 걷던 타유아가 귀를 만지작거리며 핀잔을 주었다.
“시끄러워 죽겠네. 아예 우리 왔다고 홍보를 하시지?”
“타유아, 네가 지금 큰소리 칠 입장은 아닐 텐데? 마왕님께서 마음이 넓은 분이라 다시 받아준 걸 잊지마라.”
타유아는 발끈하여 사슬로 굴란트의 목을 휘감아 잡아당겼다.
“나도 네가 어제 한 말 잊지 않고 있다고!”
“켈룩켈룩! 내, 내가 무슨 말을 했다고... 켈룩! 하, 할 거면 좀 더 세게 해보시지!”
맞는 것에 저항감이 없는 굴란트이기에 타유아가 열을 낼수록 굴란트 좋은 일만 시켜주는 꼴이었다.
타유아는 화풀이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게 짜증나 부츠 신은 발로 땅을 콱콱 밟았다.
“으으! 이 마조 마초 짜증나!”
“언제는 안 짜증난 적 있었나?”
“너 언젠가 로얄로더 복귀하면 걔한테 먹어버리라고 할 거야!”
“하하! 이왕 욕할 거면 좀 더 심하게 하시지.”
“죽어! 이 멍청아 죽어!”
서로 상극인 성격끼리 붙어 있다 보니 행군길이라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시끌벅적해졌다.
그러는 사이 마왕군은 렌던 서쪽 강을 건너 꽃이 그득하게 피어 있는 땅에 들어섰다.
붉은색 흙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형형색색의 들꽃이 가득 피어있었다.
로엘을 뒤따라 쌍두마를 몰던 스랄스가 처음 서쪽 위험지대에 온 로엘을 위해 주의사항을 일러주었다.
“여기 꽃들은 전부 이곳 터줏대감인 그랜드 플라워의 힘으로 피어난 것입니다. 이제부터 꽃들이 꽃가루를 내뿜을 건데 꽃가루 색깔에 따라서 효과가 다르니까 조심하십시오.”
그랜드 플라워가 피워낸 꽃에서는 파란색, 노란색, 빨간색 꽃가루가 나온다.
파랑색 꽃가루는 환각을 유발하고, 노란색 꽃가루는 대상에게 무력감을 느끼게 하고, 빨간색 꽃가루는 광폭화(버서커) 현상을 일으키는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가만히 놔두면 꽃가루가 바람을 타고 렌던까지 날아와 주민들에게 피해를 주는 편이라 서쪽 위험지대만큼은 빠르게 처리해야 했다.
역으로 말하면 혹시나 그랜드 플라워를 사용하게 될 경우 적진지에 갖가지 효과의 꽃가루를 흘려보낼 수 있는 용도로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스랄스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어느 꽃가루가 나오든 간에 무조건 호흡을 참으십시오. 혹시라도 파란색 꽃가루를 피부에만 닿아도 환각을 유발하니까 바로 냇가에 가서 흐르는 물속에 들어가 있어야 합니다. 그 외에는 호흡을 참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정작 중요한 그랜드 플라워 공략법은 뭔데?”
“꽃밭을 뒤지다보면 금색 꽃잎을 지닌 꽃이 있을 겁니다. 그랜드 플라워의 심지인데 그걸 뽑아내면 본체가 놀라서 모습을 드러냅니다.”
설명을 들은 로엘은 꽃밭의 넓이를 가늠하였다.
넓이만 따지면 여느 도시의 대광장보다 약간 큰 정도일까.
이만한 넓이라면 금방 끝낼 방법이 있었다.
로엘은 멀뚱히 서있는 스랄스와 여전히 견원지간마냥 다투고 있는 굴란트, 타유아에게 명령을 내렸다.
“세 사람 모두 꽃밭에서 나가있어.”
스랄스와 굴란트는 일단 시키는 대로 하고 보자는 파인지라 뒤로 물러났다.
다만 타유아만은 예전부터 해오던 방식에 익숙해져 있기에 로엘의 명령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 황금꽃 수색해야 해요. 야, 스랄스. 제대로 설명 드린 거 맞아?”
“제대로 설명 드렸어. 따로 방법이 있으신 것 같으니까 명령에 따르도록 해.”
“내 고양이 소환수들 퍼트리는 게 더 빠를 것 같은데......”
타유아는 의아해하면서도 자신만만한 로엘을 보곤 시키는대로 물러났다.
대체 어떤 방법을 쓸 생각이기에 물러나라 하는 건지 궁금해졌다.
마왕군을 꽃밭 바깥으로 물린 로엘은 양발을 어깨 너미 만큼 벌렸다. 그리고 검을 뽑는 대신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현재 로엘이 가진 마나량은 700년 치.
마계에 와서도 서큐버스의 인장으로 인한 마나공급은 계속 되고 있었다.
로엘은 700년 치 마나를 죄다 투입하여 그림자군단을 소환했다.
700년 치 마나로 인해 생성된 그림자병사는 총 1400명.
오와 열을 맞추어 늘어서 있기만 했는데도 너른 꽃밭에 검은색 물결이 요동쳤다.
로엘은 손가락을 튕기며 덤덤하게 명령을 내리길.
“꽃밭을 향해 공격.”
그림자군단이 일제히 땅을 향해 참격을 뿜어내면서 형형색색의 꽃밭에 잘린 꽃잎과 흙더미가 어지럽게 흩날렸다.
언제 일일이 꽃을 뒤지고 있겠는가.
전부 베어내면 될 일이다.
로엘은 튀어 오르는 흙더미 사이로 금빛 꽃잎이 흩날리는 걸 확인했다.
그와 동시에 바닥 깊숙한 곳에 숨어 있던 그랜드 플라워가 튀어나왔다.
파리지옥이 커다랗게 성장한 듯한 모습이었다.
줄기부터 잎까지 전부 녹색인데다 상어 아가리마냥 무수한 돌기를 가진 입 사이에선 달달한 냄새가 풍겨 나왔다.
로엘은 그랜드 플라워의 본체를 앞에 두고 아디만티움 검을 뽑았다.
“이름을 잘못 붙여도 한참 잘못 붙였구만. 어딜 봐서 꽃이라는 거야?”
그랜드 플라워는 세 종류의 꽃가루가 농축된 진액을 뚝뚝 흘리며 아가리를 쩌억 벌렸다. 더하여 땅바닥에선 뿌리가 튀어나와 로엘의 발을 휘감으려 했다.
뿌리를 이용한 공격은 이미 북쪽 위험지대의 위프우드를 통해 경험해봤기에 익숙한 편이었다.
로엘은 아래를 향해 검을 휘두른 직후에 물 흐르듯 검 끝을 위로 올려 무형검을 상하로 퍼트렸다.
보이지 않는 검은 바람결과 같이 부드럽게 휘며 뿌리를 토막낸 후 그랜드 플라워의 줄기마저 베어냈다.
서걱! 서걱!
줄기가 잘린 그랜드 플라워의 머리 부분이 옆으로 기울면서 바닥에 떨어졌다.
그로 인해 이파리 사이에 고여 있던 진액이 장대비처럼 쏟아졌다.
로엘은 가볍게 두어 발자국 옆으로 물러나면서 진액을 피해냈다. 그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검을 검집에 꽂으며 손을 탁탁 털었다.
“아무나 활성화의 핵 회수해둬. 서쪽 위험지대는 이걸로 끝이지?”
로엘이 어떻게 하나 유심히 보고 있던 자들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확실히 혼자서 공략해내긴 했다.
그렇긴 한데 이렇게까지 무지막지한 방식으로 공략할 줄은 몰랐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이 무지막지한 방식을 가볍게 해냈다는 것이었다.
전성기의 아도로스도 그림자군단 1200마리까지가 한계였는데 로엘은 그 숫자를 훌쩍 넘겼다.
로엘의 힘을 제대로 목격하고 나니 황당함 보단 경외심이 앞섰다.
‘마족도 이만한 힘을 갖추기 어렵거늘. 도대체 어떤 식으로 단련하면 이만한 힘을 가질 수 있는 건가!’
‘이게 20여 년만 살아온 인간의 힘이라고? 아도로스 님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어.’
‘저 인간은 삼시세끼 드래곤 하트만 먹었나 뭐가 이리 강해?’
마왕군 간부 세 명이 감탄하는 와중에 그랜드 플라워의 몸이 녹아내리면서 활성화의 핵이 드러났다.
샤크 울프를 처리했을 때처럼 타원형 모양의 붉은색 보석이 나타났다.
활성화의 핵은 모두 같은 모양을 띠고 있어 겉보기에는 구분할 수 없지만 보석 아랫면에 터줏대감의 이름이 새겨져 있기 때문에 그걸 보고 구분하면 되었다.
로엘은 스랄스에게서 활성화의 핵을 받으며 다음 일정을 물었다.
“이제 또 해야 할 일이 있던가?”
“내일 남쪽 위험지대가 활성화되니까 거길 정리하고 조만간 북쪽 위험지대가 활성화되면 다시 샤크 울프를 베시면 됩니다.”
“이 짓을 달마다 해야 하는 거지? 마계에서 살아가기 진짜 힘들구만.”
“죄송합니다. 원래 이런 건 아랫사람들이 알아서 해야 할 일인데 저희가 약해서......”
로엘이 알기로 굴란트와 타유아는 마나 익스퍼트급이었다.
인간계에서는 한 왕국에 마나 익스퍼트 2명 이상 있으면 많은 편이었다.
“마나 익스퍼트 2명이 있는데 가장 약한 위험지대를 감당하기도 힘들다는 거야? 와, 보라색 이상이면 대체 얼마나 강한 전력이 필요한 거지.”
“다른 건 아니고 상성 때문입니다.”
“상성?”
“기본적으로 마계의 기술은 속성을 기반 삼고 있습니다. 육체, 정신, 혼령, 자연 속성으로 나뉘지요. 예를 들어 굴란트의 타격흡수나 타유아의 고양이 소환술은 기본적으로 육체 타입입니다. 육체 타입은 정신에 약하고, 정신은 혼령 타입에게, 혼령은 자연 타입에게 약합니다. 자연은 육체 타입에게 약하고요. 렌던 서쪽과 남쪽 위험지대의 터줏대감은 모두 정신 타입입니다. 그나마 북쪽 위험지대의 샤크 울프는 육체 타입이긴 한데 서쪽과 남쪽 위험지대 때문에 여태껏 애를 먹고 있죠.”
상성을 이겨내려면 적어도 두 수 위의 실력을 지니고 있어야 했다.
로엘은 그림자군단이 혼령 타입, 검술은 육체 타입 등 여러 타입을 지니고 있는데다 실력 또한 두 수가 아닌 몇 수 이상 강하기에 타입 불문하고 쉽게 벨 수 있는 것이었다.
덧붙여 스랄스는 상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많은 타입의 인재가 필요하고, 각 위험지대에 알맞은 타입의 인재를 배치하는 게 중요하다고 하였다.
로엘은 지금껏 굴란트와 타유아로만 예를 든 것이 마음에 걸렸다.
여태껏 스랄스의 실력을 확인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유가 있나 싶어 질문을 던져보았다.
“스랄스. 너는 어느 정도지?”
스랄스는 후드 앞부분을 질끈 잡아당기며 얼굴의 일부분을 가렸다.
얼굴을 가리기 전에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던 것을 엿볼 수 있었다.
“전 마나 마스터급 혼령 타입이었습니다만.”
마치 지금은 아니라는 듯한 말투였다.
사정이 있는 건지 스랄스가 잠깐 뜸을 들이다 어렵게 말을 꺼냈다.
“마계 7기둥 중 한 명에게 힘을 빼앗겨서 지금은 일개 병사만도 못한 수준입니다.”
로엘은 더 이상 깊이 묻지 않았다.
힘을 가졌던 자가 힘을 잃었을 때 가지게 되는 상실감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씁쓸한 분위기를 환기시킬 겸 렌던으로 회군할 것을 명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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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던으로 돌아가려면 한나절은 걸어야 하기에 로엘의 마왕군은 한 번 휴식을 취했다.
휴식시간이 주어지자마자 타유아는 홀로 냇가로 향하였다.
다리를 씻기 위함이었다.
로엘이 그랜드 플라워를 사냥하는 걸 보느라 다리에 진흙조각이 튄 줄도 모르고 있었다.
타유아는 옆이 파인 치맛자락을 한 손으로 모으며 늘씬한 다리를 냇가에 담갔다.
막 허벅지에 물을 묻혀 진흙을 씻겨내고 있는데 건너편 수풀 사이에서 박쥐 모습의 마족이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타유아는 깜짝 놀라 새벽의 사슬을 꺼내 쥐었다.
“웬 놈이냐!”
박쥐 모습의 마족은 바닥에 내려서며 양 손을 위로 들었다.
싸울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다.
“너무 경계하지 마십시오. 폭스님이 보내서 온 것이니까요.”
“폭스? 마계 7기둥이 나한텐 무슨 볼일이지?”
“나쁜 이야기를 전하러 온 건 아닙니다. 오히려 그쪽에는 좋은 이야기지요.”
“좋은 이야기?”
“이쪽은 타유아 씨의 상황에 대해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쪽이 혹할만한 이야기를 들고 왔는데 어디 한 번 들어보시겠습니까?”
“뭔진 모르겠지만 들어는 주겠어. 말해봐.”
“여긴 대화하기 좋은 장소가 아니니 따로 장소를 지정하겠습니다. 대화를 나눌 생각이 있으시다면 내일 정오까지 렌던 북쪽 위험지대의 가시나무 숲 중앙으로 오십시오.”
박쥐 모습의 마족은 대화를 하고 싶다는 말과 함께 시간과 장소를 지정하고 날개를 펼쳐 수풀 너머로 날아갔다.
타유아는 뒤늦게 상대가 폭스의 심복인 폴레이츠임을 떠올렸다.
‘저 녀석 폴레이츠잖아. 내 상황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내가 마왕님에게 잘 보여야 하는 입장인 걸 어떻게 알고 있지?’
로엘하고 있었던 일들은 전부 해결됐지만 타유아 본인은 아직 로엘에게 심한 말을 한 걸 마음에 두고 있는 편이었다.
타유아는 폴레이츠의 말을 곱씹다가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아~ 마왕님이 폭스에게 사신이 지나갈 길을 내어달라고 했었지. 그거랑 관련된 이야기인가 보네. 마왕님께 알려드려야겠다.’
로엘이 기뻐할 거라고 여긴 타유아는 허벅지에 맺힌 물기를 대충 털어내며 로엘에게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