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52 7-2. 얕보지 마라 =========================
클라임 후작의 단도가 닿기 직전에 고우트의 몸이 그림자로 변했다.
나름대로 허를 찔렀다고 생각했건만 단도는 허무하게 맞은편 의자 등받이를 긁는데 그쳤다.
고우트는 그림자로 변한 상태에서 말을 꺼냈다.
“왕이 될 수 있는 기회인데 걷어 차버리시는 겁니까?”
“브리니아의 힘을 빌릴 정도로 나약한 자로 보였더냐?”
“힘을 빌리는 게 아니라 거래이지요.”
“내가 오를 자리는 내가 만들 것이니라.”
“조금은 머리가 돌아가시는 분일 줄 알았는데 실망이군요.”
“세 치 혀를 함부로 놀리는구나. 경솔하게 범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였으니 무사히 나갈 생각은 말아라.”
고우트로선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가소롭기 짝이 없었다.
빠져나갈 걸 염두에 두지 않고 들어왔는줄 아는가.
클라임 후작의 행렬은 진즉에 파악해두었다.
현재 클라임 후작의 행렬에 고우트의 도주를 막을만한 실력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구 겐크 왕국의 왕이었던 아지스나 브리니아의 왕이었던 파이오르의 마차에도 들어갔다 나올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고우트다.
고작(?) 마나유저 상급 2~3명이 섞인 기사단쯤이야 가볍게 뿌리칠 자신이 있었다.
고우트는 마지막으로 경고 섞인 한 마디를 남기며 마차 바깥으로 흘러나갔다.
“스스로 왕위를 걷어 차버린 것을 후회하게 될 겁니다.”
고우트가 나가는 것을 본 클라임 후작이 그를 잡으려고 마부를 향해 외쳤다.
“마차를 멈춰라! 침입자가 들어왔느니라! 침입자를 잡아라!”
마부가 급하게 고삐를 당기면서 클라임 후작의 마차가 크게 흔들렸다.
문을 박차고 나가려 했던 클라임 후작은 마차가 흔들린 탓에 균형을 못 잡고 넘어졌다.
쿠당탕!
마차 바깥에선 기사들이 마차 문을 열며 무슨 일인지 확인하려 하였다.
“후작님! 무슨 일입니까?”
“뱀파이어가 침입했었다! 그림자의 모습으로 마차에서 나갔으니 놓치지 마라!”
“그림자! 그림자를 찾아라!”
고우트는 이미 기사들 뒤로 빠져나와 유유히 도로 너머로 사라지는 중이었다.
고우트의 그림자 모습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이상 알아볼 수 없는 터라 기사들은 고우트가 이미 빠져나간 것도 모르고 엉뚱한 그림자만 밟을 뿐이었다.
고우트는 멀리서 기사들이 나무 그림자나 마차 그림자를 밟으며 허우적대는 꼴을 보며 비웃었다.
‘백날 찾아봐라. 내가 찾아지나. 너희들 따위에게 붙잡힐 정도였다면 진작 붙잡혔겠지.’
하지만 고우트의 비웃음은 오래 가지 못했다.
고우트의 그림자 위로 냉기의 마나가 부여된 손이 날아들었기에.
푸욱!
마나 건틀릿을 씌운 손이 고우트의 그림자를 꿰뚫고 바닥에 박혔다.
뿐만 아니라 고우트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손에 깃든 마나가 땅바닥을 얼려버렸다.
땅 아래에 남아 있던 수분이 얼면서 땅바닥에 점점 서리가 앉기 시작했다.
추위를 이기지 못한 고우트는 변신을 유지하지 못하고 원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고우트의 몸 전체에 서리가 끼여 있었다.
고우트는 시퍼렇게 질린 안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는 베나티아가 한 손은 고우트의 등에 대고, 나머지 한 손으론 졸린 눈을 비비며 하품을 하고 있었다.
“푸아암~, 졸릴 때 모기가 윙윙 날아다는 것만큼 짜증나는 건 없지. 안 그래?”
“베, 베나티아?”
“어쭈? 말이 짧다?”
“... 님?”
“나는 말이야. 딱히 인간들 정치놀음에는 간섭하지 않아. 하지만 마족 잔당이 남아있다면 얘기가 다르거든?”
“저, 저는 마족 잔당이 아니라......”
“지금은 다른 곳에 속해있다고 해서 이전에 했던 일이 없어지는 건 아니지.”
고우트의 등에 올려져 있던 베나티아의 손에서 점점 더 많은 냉기 마나가 흘러나왔다.
베나티아는 인간들의 정치놀음에는 관심 없는 편이었다.
여태껏 망자섬 토벌 이외에는 힘을 발휘하지 않은 것도 그 이유에서였다.
그나마 간섭한 게 있다면 로엘의 부탁으로 그를 현장까지 태워준 것과 파이오르 사건 때 그가 도주하지 못하게 강을 얼린 정도뿐이었다.
엘로나가 브리니아 왕국을 친다고 말한 이후에 그녀에게 확실히 말해두었다.
필요 이상으로 인간의 일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엘로나도 베나티아의 힘을 빌려 모든 일을 쉽게 해결하려는 성격은 아니었기에 납득했다.
하지만 마족 잔당과 관련된 일이라면 다르다.
드래곤에겐 인간계 이외의 차원에서 온 존재를 막아낼 의무가 있다.
즉, 귀찮은 걸 떠나서 고우트를 처리해야만 하는 입장이라는 거다.
베나티아는 이미 대신전에서의 긴급회의 때 고우트의 존재를 알아차렸고 스이켄이 있는 마을로 가는 걸 확인하였다. 그 후에 레이아와 상담을 했는데 레이아가 말하길 스이켄이 로엘의 부재를 알아차렸다면 클라임 후작부터 포섭할 거라 하였다.
고우트가 현재는 스이켄의 밑에 있다하더라도 한때 마족군의 일원이었으니 마족 잔당이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베나티아가 직접 처리하러 온 것이다.
베나티아로선 레이아의 말대로 된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브리니아 왕국이라는 녀석들도 참 불쌍하네. 로엘이 없어도 레이아가 있으니 원.’
빌로스 제국의 중심을 잡아줄 로엘이 없으니 조금만 건드리면 와르르 무너질 거라 생각했겠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로엘을 대신하여 레이아가 중심을 잡고 있는 상태였다.
하니온 왕국을 떠나 테헤란의 빌로스 왕궁에서 지내기 시작하며 빌로스 신하들의 신뢰를 얻었고, 로엘의 여자들과는 두루두루 친한데다 정치적 능력도 뛰어나다. 최근에는 독물 마법 수준이 3써클로 올라가서 개인적인 무력도 끌어올리고 있었다.
베나티아의 앞에선 고우트가 살기 위해 뭐라뭐라 입을 놀리고 있었지만 베나티아는 전혀 듣지 않고 있었다.
모기가 윙윙거리는 걸 계속 듣고 싶은 사람이 있겠는가.
베나티아는 한여름의 모기 잡듯 고우트의 몸에 냉기를 잔뜩 쏟아 부어 얼려버렸다.
고우트를 얼음동상으로 만든 베나티아가 할 일이 끝났다는 듯 등을 돌렸다.
이미 베나티아의 뒤에선 소란을 듣고 달려온 클라임 후작의 기사들이 대기 중이었다.
베나티아는 몸을 돌리며 명령조로 한 마디 날렸다.
“부숴버려.”
클라임 후작의 기사들은 메이스를 들고 와 얼음동상이 된 고우트를 향해 휘둘렀다.
콰지직!
///
아직 케시어에 남아있던 레이아는 막 돌아온 베나티아에게서 고우트를 처리했다는 소식을 전해 받았다.
“네 말대로 클라임 후작한테 왔더라. 일단 제대로 처리해뒀어.”
“클라임 후작은 어땠나요?”
“모기 녀석이 제안했는데 단칼에 거절한 것 같더라고.”
“잘 됐네요. 그를 죽이지 않아도 되서.”
레이아가 베나티아에게 부탁한 건 고우트의 처리만이 아니었다.
클라임 후작이 고우트에게 어떤 대답을 했는지 알아와 달라는 부탁도 곁들였었다.
만약 클라임 후작이 빌로스 제국을 배신하고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려 했다면 바로 크라넬을 보내 죽일 생각이었다.
레이아는 로엘처럼 자신에게 거스르는 자들까지 일일이 감화시키는 성격이 아니다.
감히 반역 따위를 꿈꾼다면 그 꿈 채로 베어버리는 게 레이아의 정치 스타일이었다.
하니온 왕국은 왕에게 반기를 든 자들에게 살벌하리만큼 엄격하기 때문에 레이아도 그 성향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베나티아는 칼 같이 냉철한 레이아를 보며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얘도 진심으로 움직이면 꽤 무섭네.’
“나는 이제 할 일 다 했으니까 먼저 샹데르로 가련다. 가는 동안 모자란 잠이나 자둬야겠네.”
“수고하셨어요, 언니.”
할 일도 마쳤겠다 베나티아는 샹데르로 돌아가는 마차에 올라탔다.
돌아가는 내내 잔다는 말이 허언이 아닌지 마차 안에는 의자 대신 기다란 쿠션이 설치되어 있었다.
베나티아가 샹데르로 떠난 후에도 레이아는 케시어에 남아있었다.
좀 더 남아 울크까지 완전히 배웅하고 난 후에 엘로나와 함께 돌아갈 생각이었다.
막간을 이용해 레이아는 로엘이 있었던 침실에 들렀다.
침실 안에는 마나의 흔적이 남아있는 부분을 미스릴판자로 둘러놓은 상태였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방바닥이었으나 감지해본 결과 공기 중 마나가 크게 흐트러져 있다고 한다.
또 특이현상이 발생할 수도 있으니 특수제작 된 미스릴 판자로 둘러놓은 것이었다.
로엘이 사라진 거야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니 다시 확인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레이아가 침실을 찾아온 건 로엘이 아닌 다른 사람 때문이었다.
레이아는 화장대 아래에 떨어져 있는 상자를 발견하곤 집어 들었다.
상자 안에는 그윽한 냄새를 품고 있는 향이 들어 있었다.
“역시 같이 휘말린 거려나.”
사라진 사람은 로엘만이 아니었다.
어제부터 메이아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로엘이 사라진 충격 때문에 아무도 신경 쓰고 있지 않았지만 레이아의 경우 메이아를 개인시중으로 두고 있었기에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마침 크라넬이 방으로 들어오며 알아본 사실을 보고하였다.
“알아본 결과 어젯밤에 엘로나 여제께서 향을 피워달라고 부탁하신 모양입니다. 그 이후에는 누구도 메이아를 본 사람이 없습니다.”
레이아는 들고 있는 향 상자를 화장대 위에 올려놓았다.
“메이아도 휘말린 게 확실해졌네.”
“로엘 폐하와 함께 있으니 괜찮겠죠.”
“도디는 메이아의 냄새도 기억하고 있겠지?”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루엔 님의 시중을 들 때 도디까지 한꺼번에 감당했었으니까요.”
“혹시 모르니까 도디에게 메이아의 옷자락을 들고 가라고 해야겠네. 아바마마는 언제 떠난데?”
“지금 하니온 왕국 사람들이 마차를 준비 중입니다. 30분 이내에 떠나실 것 같습니다.”
“배웅하고 우리도 바로 떠나자. 샹데르로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이 많아.”
“네, 마차를 준비해두겠습니다. 당분간 개인시중은 빌로스 왕궁 수석궁녀 루니스가 맡을 예정입니다. 처음에는 에아를 이쪽으로 돌리려 했는데 절대로 안 된다고 하시더군요.”
아무래도 루엔과 도디의 시중을 맡을 사람이 없었나 보다.
루엔의 시중은 궁녀계의 상하차라 불리고 있기에 어지간한 궁녀들로는 감당하기 힘들었다.
지금 한창 바쁜 때라 궁녀들도 인원부족으로 시달리고 있기에 수석궁녀인 루니스까지 나서고 있는데 그녀도 루엔의 시중만은 싫은 모양이었다.
레이아는 에아가 곧 푸석푸석해질 것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에휴, 바쁜 시기 지나면 걔 공방에 배정인원을 늘리던가 해야겠네.”
///
여전히 케시어 동쪽의 마을에서 머무르던 스이켄은 표정이 굳고 말았다.
고우트가 돌아오지 않아 몰래 사람을 파견해봤는데 돌아온 건 고우트의 사망소식이었다. 게다가 더욱 당황스러운 건 클라임 후작이 제안을 거절했으며 베나티아가 미리 대기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클라임 후작은 몰라도 베나티아가 대기한 건 명백히 부자연스러웠다.
누군가가 스이켄의 의도를 읽고 베나티아를 배치한 게 분명했다.
현재 빌로스 제국의 수뇌부 중에서 그만한 두뇌를 가진데다 베나티아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스이켄은 방 안에 홀로 앉아 턱을 매만지며 한 사람을 떠올렸다.
“레이아 공주로군. 상당한 미인이었지.”
레이아라면 로엘에게 호되게 한 방 먹기 전에 스쳐지나가듯 잠깐 보았었다.
신장이 조금 작긴 하다만 그게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비율이 좋고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엘프의 숲에 유학을 다녀온 스이켄이라 어지간한 여자들은 성에 차지 않는 편이었다. 그래서 레이아가 엘로나에 뒤지지 않는 미인이라 들었어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었다.
그런데 실제로 보고 나니 생각 이상으로 아름다웠다.
귀여움과 성숙함이 적절하게 맞물려 있는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거기에 정치적인 능력 또한 뛰어나니 아름다운 것도 모자라 유용하기까지 한 여자였다.
스이켄은 탐스러운 것을 떠올리는 양 혀로 입술을 핥았다.
“그녀가 현 빌로스 제국의 중심이었군. 그녀를 취하면 빌로스 제국에 타격을 입히는 것인 셈인가. 중고품인 게 아쉽긴하다만 그 정도는 감수해야겠지.”
아직 로엘과 레이아는 약혼만 한 상태이며 정식 결혼은 가을에 올리는 걸로 알고 있다.
지금이라면 충분히 파혼으로 몰고 갈 수 있었다.
스이켄의 머릿속에서 레이아를 취할 방법이 그려졌다.
“그녀도 바보가 아닌 이상 간단히 넘어오진 않겠지. 그렇다면 하니온 왕국 쪽을 공략해야겠군.”
클라임 후작 포섭은 실패했지만 울크 정도라면 포섭할 자신이 있었다.
반강제로 빌로스 제국의 속국이 될 처지에 놓은 하니온 왕국이니까.
스이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움직일 채비를 하였다.
‘울크 국왕과 접촉해봐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