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될놈될-150화 (150/219)

00150 7-1. 그녀 역시 =========================

토끼의 변화에서 이곳에 전혀 안전하지 않은 곳임을 알게 된 메이아였다.

궁녀로서 살아온 그녀에게 야수에 가까운 토끼와 싸울 능력은 없었다.

메이아는 곧바로 도주에 나섰다.

“꺄아악!”

비명을 지르면서도 뛰는 것 하나는 무척 재빨랐다.

치맛자락이 찢어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신없이 뛰기만 했다.

그러나 아무리 메이아의 걸음이 재빨라도 그녀 또래의 평범한 여자들보다 조금 빠른 정도에 불과했다.

괴물 토끼는 두어 번의 점프만으로 가볍게 메이아를 따라잡았다.

쿵! 쿵!

두 번째 뜀박질이 바로 뒤에서 울린 것을 느낀 메이아는 마음이 조급해진 나머지 자신의 치맛자락을 밟고 말았다.

“아악!”

데구르르

갈대 위를 몇 마리 구른 메이아는 흙투성이가 되어버렸다.

넘어지면서 구른 탓에 무릎이며 팔꿈치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아파왔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이미 괴물 토끼가 메이아의 코앞에서 입을 쩌억 벌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메이아는 차마 징그러운 괴물의 아가리를 두고 볼 수 없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괴물 토끼의 입이 자신을 삼키는 것 대신 강한 타격음이 울려 퍼졌다.

빠각!

“크워어!”

살포시를 눈을 뜨니 한 명의 여성이 괴물 토끼를 발로 걷어차고 있었다.

단순한 발차기처럼 보이는데도 괴물 토끼의 고개가 옆으로 크게 꺾이면서 몸체가 녹아내렸다.

괴물 토끼는 곧 검은 그림자가 되어 땅바닥에 스며들었다.

괴물 토끼를 단박에 처리한 여성은 특이한 모습이었다.

생김새는 미인 축에 속하는 인간 여성 같았으나 등에 검은색 날개가, 머리에는 얇은 뿔이 달려있었다. 옷차림은 위로는 가죽조끼만 걸치고 있어 둥근 가슴골과 옆가슴이 훤히 비쳐보였고, 아래로는 짧은 바지와 롱부츠를 신고 있어 탄탄한 허벅지만 드러낸 상태였다.

같은 여자인 메이아가 보기에도 상당히 자극적인 차림이었다.

날개 달린 여성의 오른쪽 다리에는 상당량의 검은 기운이 넘실거리고 있었는데 곧 사라졌다.

괴물 토끼를 쓰러뜨린 여성은 괴물 토끼가 사라진 걸 확인한 후에야 고개를 돌렸다.

“하마터면 위험했네. 괜찮니? 다친덴 없어?”

메이아는 다리에 힘이 풀려 일어나지 못한 채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걸 알아차린 여성이 메이아를 부축해주려다가 멈칫했다.

“너 서큐버스가 아니잖아. 무슨 종족이야?”

“일단은 인간이에요.”

“인간? 인간이 왜 마계에 있지? 으음, 특이현상에라도 휘말린 건가.”

마계라는 말에 메이아는 깜짝 놀랐다.

땅의 색깔이나 달의 개수에서 평범한 곳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설마 마계였을 줄이야.

마족에게 있어 인간은 적이라 들었다.

메이아는 서큐버스가 덤벼 올까봐 잔뜩 긴장했다.

그러나 메이아의 걱정과 달리 서큐버스는 다시 손을 뻗어 메이아를 부축해주었다.

“갑자기 마계에 와서 놀랐겠네. 갈 곳도 없을 테니 같이 가자.”

“저 인간인데 괜찮은 건가요?”

“인간이기 전에 여자잖아. 종족을 불문하고 여성은 보호하는 게 카에라 님의 방침이거든. 아, 근데 너 이름은 뭐야?”

“메이아예요.”

“난 스칼라야. 보라색 위험지대에 오래 있어봐야 좋을 거 없으니까 바로 날아갈게. 나한테 업혀.”

“아, 네. 신세지겠습니다.”

“푸훗, 고작 이런 거 가지고 신세는 무슨. 자, 출발한다.”

스칼라는 메이아를 등에 업고 날개를 활짝 펼쳐 위로 날아올랐다.

///

메이아는 스칼라의 등에 업혀 가면서 마계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들을 얻게 되었다.

현재 마계에는 마왕이 없어 마계 7기둥이란 자들이 서로 견제 중이고, 스칼라가 모시는 카에라란 여성도 마계 7기둥 중 한 명이라고 한다.

카에라는 2대 서큐버스퀸으로 마계 여성 종족의 생활에 큰 변화를 일으킨 여성이었다.

서큐버스가 남자의 정기를 빨아들여 강해지기 때문에 아무 남자나 받아들일 것 같은 이미지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자신의 몸을 내주면서까지 강해지려는 서큐버스는 그리 많지 않고, 있다하더라도 서큐버스 내에서 치즈녀 취급 받기 일쑤였다.

하지만 서큐버스가 가진 이미지 때문에 마계의 남성 종족들은 서큐버스를 창부 취급해왔고 범해도 되러 좋아하는 종족이라 여겨왔다.

1대 서큐버스퀸인 베르나트 시절부터 계속 되어온 서큐버스 이미지 개선계획은 2대 서큐버스퀸인 카에라 대에 와서 결실을 맺었다. 그 덕분에 현재 카에라의 땅은 서큐버스 뿐만 아니라 많은 여성 종족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땅이 되었다.

이야기를 듣는 와중에 메이아가 슬쩍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저만치 아래의 땅은 온통 보랏빛이었으며 드문드문 정체모를 동식물이 사방에서 뛰어다니고 있었다.

“저것들은 뭐예요?”

“땅에 있는 저것들? 아까 널 잡아먹으려고 한 버크래빗이랑 같은 마물들이야. 그래도 버크래빗과 마주쳐서 다행이야. 그나마 보랏빛 위험지대에서 가장 약한 생물이거든.”

위험지대에는 붉은색 땅, 보라색 땅, 검은색 땅이 있는데 후자로 갈수록 마물들의 평균 무력치가 높고 숫자도 많다고 한다.

메이아가 어찌 보면 정신을 잃은 사이와 정신을 차리고 난 후에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은 건 운이 좋았다고 볼 수 있었다.

안전을 위해 높은 위치에서 날던 스칼라는 서서히 아래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도착했어. 저기가 카에라의 땅 중심지인 크루다이야.”

위에서 본 크루다이의 풍경은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새하얀 건물들이 각을 맞춰 늘어서 있었으며 블록마다 도로 대신 강이 흐르고 있었고, 그 위로 기다란 조각배 수백 척이 움직이는 중이었다. 크루다이의 명물 중 하나인 나룻배 상점이라고 하는데 고도가 낮아질수록 나룻배에 실려 있는 각종 물건이 구별되었다. 그리고 원형 성벽의 안쪽에는 거목들이 심어져 있었는데 모두 마계석류나무로 1년 내내 커다란 석류가 열리고, 뿌리가 땅 속 깊숙하게 박혀 있어 지하로 이동할 수 있는 마물의 침입을 막아주고 있다 한다.

스칼라는 시가지 위를 그대로 통과하여 크루다이 중심에 있는 커다란 성에 날아들었다.

성에서 가장 높은 탑 위에선 빛이 뿜어져 나오는 광석이 있었는데 스칼라는 그 빛을 유도등 삼아 탑 꼭대기에 착지했다.

비행을 통해 들어오는 이들은 무조건 탑 꼭대기에 착지해야 하는 모양이었다.

탑 꼭대기에서 대기 중이던 다른 서큐버스가 스칼라를 맞아주었다.

“스칼라. 너무 늦었어.”

“미안, 중간에 이 아이를 구한다고 잠깐 시간을 허비했거든. 그리고 사람 태우고 나는 게 생각보다 속도가 안 나더라고.”

탑지기로 보이는 서큐버스는 앞머리로 얼굴 반쪽을 가린 상태였다. 그나마 드러난 반쪽 얼굴에는 눈매며 콧날, 턱선까지 모두 날카로운 느낌이라 살벌한 인상을 품고 있었다.

스칼라와 달리 통이 넓은 옷으로 몸 전체를 가리고 있었는데 노출을 삼가는 성격인 것 같았다.

그녀는 스칼라의 등에서 내린 메이아를 강하게 노려보았다.

메이아가 움찔하자 스칼라가 키득키득 웃으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겁먹을 거 없어. 나샤가 무서워보여도 사실 인형 만들기가 취미인 귀여운 성격이야.”

“아, 그랬군요.”

나샤의 귀까지 닿았는지 나탈라가 성큼성큼 걸어와 스칼라의 볼을 쭈욱 잡아당겼다.

“쓸데없는 소리를 나불대는 게 요 입이려나?”

“아파아~, 자모해써요~.”

“얼른 안으로 들어가봐. 카에라 님께서 기다리고 계셔.”

“응, 아차, 이 아이는 메이아야. 갈 곳이 없다고 하더라고. 여기서 지내게 하고 싶은데 카에라 님께 데려가도 될까?”

“뭐 괜찮지 않겠어? 데리고 가든 말든 상관없으니까 얼른 가보기나 해.”

“눼이눼이~.”

///

마계 7기둥 카에라는 무척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차림새는 천으로 만든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적당히 혈색이 도는 피부에 금색에 가까운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고, 살짝 올라간 입꼬리와 진한 쌍꺼풀이 가미된 눈매 덕분에 항상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카에라는 스칼라를 맞이하면서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어서 오세요, 스칼라.”

스칼라는 친한 옆집 언니를 대하듯 손을 흔들면서 편하게 인사했다.

“다녀왔어요~, 카에라 님~.”

“기운 넘치는 걸 보니 별 일 없었나 보군요.”

“네, 메두사들 마을부터 아마조니아의 마을까지 전부 문제없었어요.”

“한 달 동안 순찰 도느라 수고했어요. 그런데 데리고 온 저 아이는 누구죠?”

“메이아라고 인간이래요. 크루다이 남쪽 위험지대에 혼자 있길래 데리고 왔어요.”

카에라는 자애로운 눈빛으로 메이아를 훑어보았다.

단지 시선을 주고 있을 뿐인데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게 느껴졌다.

카에라 본인이 지니고 있는 특유의 부드러운 분위기 덕분이었다.

“메이아라고 했나요?”

“네. 빌로스 왕국 출신 메이아라고 합니다.”

“후후, 딱딱하게 대답할 거 없어요. 그냥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 된답니다. 메이아에 대해 들려주세요. 인간과 대화하는 건 처음이라 매우 기대되네요. 스칼라, 아래에 가서 데모르티에게 티 테이블을 세팅해달라고 해주세요.”

“네에~.”

카에라의 명령에 의해 금방 티 테이블이 차려졌다.

항상 티 테이블을 세팅하는 입장이었는데 처음으로 앉은 입장이 되었다.

차는 마계석류를 첨가한 홍차였는데 레몬과는 또 다른 풍미가 있었다.

메이아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 전 겨우 궁녀여서 제 이야기를 들어도 재미없으실 거예요.”

“세상에 재미없는 삶을 산 사람은 없답니다. 자신에게 무관심한 것일 뿐이죠. 시간은 많으니까 차근차근 얘기해보세요.”

신세져야 하는 입장에서 계속 꾸물거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메이아는 가진 기억을 총동원하여 어렸을 때부터 현재까지의 일을 차근차근 읊어나갔다.

그녀는 열 살이 채 되기도 전에 가난한 집안을 위해 스스로 궁녀로 지원했고, 1년 만에 견습 딱지를 뗀 후 어린 로엘의 개인시중으로 배정받게 되었다. 그 후,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빌로스 왕자의 시중으로서 살아왔으며 모시던 왕자는 성인이 되어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부터 시작되었다. 왕이 된 로엘은 소년의 티를 벗고 점점 남자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메이아도 조금씩 로엘을 남자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로엘에게 있어 메이아는 소꿉친구이자 남매 같은 사람이었을 뿐이었다.

로엘은 즉위하자마자 각종 업적을 세우며 성군이라 불리기 시작했고, 하나둘 예쁘고 뛰어난 여자들과 약혼을 맺어갔다. 로엘과 이어지는 사람들은 전부 왕족, 귀족, 혹은 다른 단체의 수장이 키운 소녀들이었다. 걔 중에 드래곤까지 포함되어 있을 정도로 로엘은 점점 멀어져만 갔고 이제는 메이아가 끼어들 틈따윈 없어졌다.

메이아는 괜한 욕심을 부리는 대신 그를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봉사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살아오다가 갑작스런 특이현상에 휘말려 마계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이야기를 마친 메이아는 식은 지 오래인 찻잔을 내려다보며 아련히 말했다.

“딱히 큰 걸 바라진 않아요. 얼른 폐하를 찾아서 인간계로 돌려보내드리고 싶어요. 그러니까... 어?”

메이아가 고개를 들었을 때, 맞은편에 앉은 카에라는 물론 옆에 앉아있던 스칼라와 시중을 들던 데모르티란 시중까지 모두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치고 있었다.

스칼라는 손수건을 놓고 두 손으로 메이아의 손을 감쌌다.

“훌쩍훌쩍, 좋은 이야기야. 이런 좋은 이야기는 정말 오랜만이야.”

“스칼라... 씨?”

“스칼라라고 불러. 넌 정말 좋은 애야. 꼭 이어질 수 있도록 도와줄게.”

“아니, 전 딱히 이어지길 바라는 게 아니라......”

“넌 욕심 부릴 자격이 있어. 신분이 문제면 신분을 메울만한 능력을 갖추면 돼. 그렇죠 카에라 님?”

카에라도 메이아의 이야기에 감동했는지 눈가의 물기를 닦아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연약한 자도 자기 꿈을 이룰 수 있는 세상. 그걸 위한 카에라의 땅이니까요. 메이아 양, 로엘이란 분은 제가 찾아드릴게요. 얼마나 걸릴지 모르니 이곳에서 머물면서 공부라도 해보시지 않겠어요?”

“공부요?”

“전 지혜의 마녀라고도 불린답니다. 꿈의 실현을 위한 기본단계는 지식의 축적에서부터 시작되죠. 이곳 크루다이에는 마계에서 가장 큰 학교와 도서관이 있으니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거예요.”

교육이라곤 왕족, 귀족의 시중을 들 수 있는 예법과 가사능력밖에 받지 않은 메이아다.

자신이 다른 것을 배울 수 있으리라곤 생각한 적도 없었다.

메이아는 저도 모르게 설렘을 느끼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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