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5 6-10. 왕 안한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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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엘이 진정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 과정에서 스랄스의 갈비뼈가 어긋났기에 다시 재조립한다며 굴란트와 함께 나가버렸다.
로엘은 넓은 침실 안에 홀로 남아 생각에 잠겼다.
‘이대로 있다간 정말로 마왕이 되어버리겠어. 스랄스는 정말로 모르는 것 같으니까 여기 있을 필요가 없지. 분명 마계에 한 명쯤은 인간계로 가는 방법을 아는 자가 있을 거야. 그를 찾는 수밖에.’
이번 초기에 빌로스 국왕을 받아들인 건 빌로스 왕국에 대한 애착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계의 왕은 다르다.
굳이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
행동방침을 정한 로엘은 방 안부터 뒤졌다.
마계에 대해 아는 것은 적지만 무기와 자금, 지도 정도만 있으면 충분했다.
방을 뒤지자 검와 보석 박힌 브로치 몇 개를 발견했다.
아도로스는 검을 쓰지 않았는지 검이 전부 고급스러운 상자 안에 담겨 있었다.
발견한 검은 총 3개로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티가 났고, 각 검의 검신은 검은색, 녹색, 보라색을 띠고 있었다. 녹색 검과 보라색 검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검은색 검이 아디만티움 검인 것만은 확실했다.
로엘은 아디만티움 검만 챙겼다.
검을 세 자루나 주렁주렁 챙겨 다니면 눈에 띨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대신 브로치는 대충 한 움큼 쥐어 허리의 가죽주머니에 죄다 집어넣었다.
마계에도 화폐가 있을 테니 하나씩 팔아서 자금으로 활용할 생각이었다.
아쉽게도 지도는 보이지 않았다.
‘지도는 나가서 구하는 수밖에 없겠군. 다른 정보도 돌아다니면서 차근차근 알아보는 수밖에.’
스랄스와 굴란트가 다시 오면 골치 아파지기에 그들이 돌아오기 전에 나가고자 했다.
로엘은 두꺼운 커튼을 잘라 로브 쓰듯 몸에 휘감았다.
겉만 보면 영락없는 무일푼 여행자처럼 보였다.
나가기 위해 창문을 여니까 후덥지근한 바람이 후욱 들어왔다.
지금은 마계도 여름인 모양이었다.
로엘이 있는 방은 2층이었고, 아래는 이파리 없는 가시나무가 가득한 정원이 있었다.
건물 자체는 인간의 건축 양식과 똑같아서 별 다를 게 없었으나 정원 너머에 성벽 대신 낮은 담벽이 세워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이 성이 아니라 저택이라 했었지. 마왕은 원래 저택에서 사는 건가?’
뭔가 사정이 있는 것 같다만 로엘이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2층 높이였지만 로엘 정도의 실력자에겐 그리 높은 높이가 아니었다.
로엘은 창문 바깥으로 뛰어 바닥에 착지했다.
착지 직후에 주변에 누가 있나 없나 확인해보았는데 아무도 없었다.
마침 잘 됐다 싶어 그대로 담벽을 향해 달려갔다.
건물벽에 딱 붙어서 주의를 기울이며 달렸는데 담벽에 도달할 때까지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나마 발견한 자라곤 세탁물을 나르는 임프 몇 마리뿐이었다.
로엘은 단숨에 담벽을 뛰어넘어 저택 바깥으로 나왔다.
무사히 나오긴 했다만 찜찜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이상하군. 저택이라곤 해도 마왕의 거처니까 그만한 경비병이 있을 줄 알았는데 한 명도 없었어.’
생각에 잠길 뻔했으나 로엘은 이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신경 쓰지 말자.
여기서 머물 것도 아닌데 저들의 사정을 신경 쓸 필요는 없다고.
담벽 너머에는 작은 냇가가 있었다.
냇가 너머로 크고 작은 건물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게 보였다. 마을 너머로 기다란 성벽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기다란 성벽을 중심으로 도시가 이루어져 있는 것 같았다.
시간대는 밤이라 그런지 하늘이 새까맸으나 동그란 달이 2개나 떠있어서 대낮처럼 밝았다. 떠다니는 구름은 제비꽃물이라도 든 듯 보랏빛이었으며 땅의 색깔은 적색이라 이 땅에 익숙하지 않은 로엘로선 어느 정도 적응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로엘은 일단 도시로 가서 간단한 정보와 지도만 구한 수 이곳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없어진 걸 알면 수색대를 보낼 테니까 그 전에 빠져나가야 해.’
빠르게 판단을 내린 로엘은 신발이 젖는 것도 상관치 않은 채 냇가를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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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안은 의외로 인간들의 도시와 비슷했다.
도로가 닦여 있고, 배수로가 만들어져 있으며 마차전용도로와 각종 시설물이 늘어서 있었다. 언어도 마계어와 인간계의 대륙공용어를 함께 쓰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용마전쟁 때 오랫동안 인간계에서 머물다 온 자들이 많아 대륙공통어에 익숙해진 마족들의 후손을 위해 제도적으로 두 가지 모두를 쓰고 있는 것이었다.
마차전용도로에서 마차를 끌고 있는 게 두 개의 머리가 달린 쌍두마인 것과 돌아다니는 자들이 마족인 것만 빼면 인간의 도시와 거의 똑같았다.
게다가 마족들은 전부 전투본능을 가지고 있고 흉폭할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대다수의 마족들은 평범한 삶을 이어가고 있었으며 전투능력을 가진 마족은 그리 많지 않았다.
또 하나 놀랐던 건 의외로 인간과 같은 모습을 한 마족들이 많다는 점이었다.
생각해보면 서큐버스나 뱀파이어만 봐도 겉보기엔 인간과 똑같은 모습을 한 마족이다.
인간의 모습을 한 마족이 많은 게 이상한 건 아니었다.
그래서 중간부턴 아예 머리를 덮고 있는 커튼조각을 젖히고 얼굴을 드러냈는데도 아무도 의심치 않았다.
거리를 걷던 로엘은 먼저 만물상부터 찾아갔다.
만물상 안에는 무엇에 쓰이는지 모를 잡동사니가 그득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잡동사니 더미 사이에선 팔이 4개 달린 마족이 물건을 정리하느라 진땀을 빼는 중이었다.
“어휴, 바쁘다 바빠. 이럴 때는 팔이 두 개인 게 원망스럽다니까. 아차, 나 팔 4개였지? 아무튼 바쁘다 바빠.”
난잡한 가게만큼이나 정신없는 주인이었다.
로엘은 가까이에 있던 작은 종을 흔들며 주인을 불렀다.
“주인장, 잠시 말 좀 물어도 될까?”
가게주인이 일손을 놓고 어기적어기적 잡동사니 사이를 헤치고 나왔다.
그의 늘어진 옆구리살이 정리해놓은 잡동사니에 부딪치면서 아슬아슬하게 진열되어 있던 물건들이 마구 흐트러졌다.
아무리 봐도 물건이 많아서 계속 정리한다기 보단 가게주인이 움직일 때마다 어지럽혀지기 때문에 계속 정리하는 것 같았다.
“에구구, 계획 없이 마구 들여놨더니 정리하는 게 더 일이구먼. 뭘 찾으시오?”
“마계 지도를 사려고 해. 최대한 최근 거면 좋겠어.”
“지도라. 그런 걸 들여놨던가. 아마 있을 거야. 나는 일단 물건을 들여놓고 보니까. 잠시만 기다리게.”
가게주인은 겹겹이 쌓여 있는 물건을 마구 헤쳐 어지럽히곤 그 사이에서 돌돌 말린 지도를 꺼내들었다.
“여기 있구먼. 30샤온일세.”
샤온은 마계의 화폐단위 중 하나였다.
어느 정도 되는 돈인지는 몰라도 로엘이 가지고 있는 건 값비싼 보석이 달린 브로치뿐이었다.
로엘은 브로치 중 하나를 꺼내 들었다.
“혹시 매입도 하나?”
“매입? 날 뭘로 보고! 뭐든지 매입하고 보는 만물상 부보일세. 어디 보자. 뭐여, 돈 있구먼 사긴 뭘 사?”
“무슨 소리야?”
“이거 샤온 브로치잖나. 이 안에 돈 담아 다니는 건데 형씨 대체 어디서 왔길래 이런 것도 모르는가?”
알고 보니 마계선 화폐가 아니라 샤온이란 보석에 담긴 샤온의 기운을 화폐로 쓰고 있었다.
다른 건 전부 보석 브로치였으나 마침 로엘이 꺼내든 게 그 샤온이 박혀 있는 브로치였던 거다.
부보는 자신의 샤온 브로치를 꺼내 로엘의 것에 가져다대었다.
“샤온 브로치를 모르면 지불 방법도 모르겠구먼. 브로치 뒤에 알아서 숫자를 적게. 그러면 맞닿은 내 샤온 브로치에 해당 숫자만큼 지불된다네.”
로엘은 시키는 대로 샤온 브로치의 뒷면에 손톱으로 30 숫자를 적었다.
그러자 샤온 브로치에서 약간의 빛이 흘러나오면서 부보의 샤온 브로치로 옮겨갔다.
부보는 자신의 샤온 브로치 뒷면을 흘깃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다 됐네. 더 필요한 건 없나?”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이 샤온 브로치 안에 얼마나 있는지 어떻게 알지?”
“허, 자네 혹시 어디 몇 백년 정도 갇혀 있었나? 아니지. 샤온 브로치는 한참 옛날부터 썼던건데......”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
“프라이버시는 지켜줘야지. 미안하군, 내가 오지랖이 넓어서 말이지. 아차, 브로치 읽는 법을 물었었지. 별로 어려울 건 없네. 브로치 윗부분의 버튼을 누르면 뒷면에 수치가 뜬다네.”
샤온 브로치 위에 시계조절기 같은 버튼이 있었는데 그를 누르자 브로치 뒷면에 숫자가 새겨졌다.
[2970]
원래 3000샤온만 있었는지 방금 산 지도값 30샤온를 뺀 수치 나타났다.
버튼에서 손을 떼자 새겨졌던 숫자가 사라졌다.
로엘은 샤온 시스템이 훌륭하다 여겼다.
‘매년 화폐 때문에 상당한 예산을 쓰는데 이거라면 예산이 거의 안 들겠는걸.’
직업병이 도질 뻔했으나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며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만물상에서 나온 로엘은 지도를 펼쳐 보았다.
지도를 펼치고 보니 여러 겹으로 이루어진 10장짜리 책자 형식의 지도임이 확인되었다.
첫 장을 열자 마계 대륙 전체의 지형도가 나왔다.
대륙은 세로로 길게 이어져 있고 북쪽 끝과 남쪽 끝이 서로 역방향으로 튀어나와 있어 꼭 양말 모양 같았다.
두 번째 장에는 마계 대륙 중앙지방의 지도가 상세히 그려져 있었다.
지도 맨 왼쪽에는 이리 적혀 있었다.
[7기둥 폭스의 땅]
두 번째 장뿐만 아니라 뒷장도 마찬가지로 7기둥 OO의 땅으로 표기된 지역이 나타났다.
분명 로엘이 알기로 덱스터가 마계 정복을 꿈꾸다가 마계 7기둥을 넘지 못했다고 했었고, 베르나트는 마계 7기둥으로서 용마전쟁 마족군의 7대장 중 일각을 맡았다고 했었다.
그때는 단순히 마왕 다음 가는 귀족인가보다 했는데 아무래도 국가 수준의 땅덩이를 지닌 제후에 가까운 듯했다.
9번째 장에 들어서고 나서야 마왕의 땅 지도가 나왔다.
그런데 마왕의 당은 마계 7기둥의 땅에 비하면 반의반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마계 대륙 끄트머리에 겨우 붙어 있는 수준이었다.
마지막 장은 마계 대륙 남쪽과 북쪽에 튀어나와 있는 땅들이었는데 지도에는 ‘혼돈의 대지’라 적혀 있었다.
마왕이 성이 아닌 저택에 거주하고, 경비병은 하나도 없었으며, 땅은 제후에 속하는 마계7기둥의 반의반도 안 된다.
로엘은 인간계로 돌아갈 방법부터 찾아야 된다는 걸 명심하며 궁금증을 억눌렀다.
일단 인간계로 돌아갈 방법을 알만한 자부터 찾아야 한다.
로엘은 도로 물건을 정리하려는 부보를 불러세웠다.
“한 가지만 더 묻지. 마계 대륙에서 가장 많은 지식을 갖춘 이는 누구인지 알려줄 수 있나?”
“정말 희한한 사내일세. 그거야 물어보나마나 마계 7기둥 일원이신 카에라 님이지. 아는 것이 많아 지혜의 마녀라고도 불린다네.”
마계 7기둥이면 따로 더 물어볼 것도 없었다. 로엘은 지도 중간을 펼쳐 카에라의 땅을 확인했다. 폭스라 불리는 자의 땅을 지나야만 카에라의 땅에 도달할 수 있었다.
당장의 행선지는 카에라의 땅으로 정해졌다.
로엘은 카에라의 땅으로 가는 길을 확인하다가 마을과 마을 사이에 수도 없이 그어진 X표 표시를 발견했다. 기호표를 살피니 ‘위험지대’라 적혀 있었다.
“위험지대?”
“자네 설마 당장 카에라의 땅으로 갈 생각은 아니지?”
“그럴 생각이다만.”
“참게나. 지금 위험지대가 활성화 되서 성벽 바깥으론 아무도 나가지 못한다네. 나갔다간 마물에게 잡아먹힐 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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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각, 마왕의 저택에선 난리가 난 상태였다.
스랄스가 뼈를 맞추는 사이 로엘이 사라진 것이다.
굴란트는 온 저택을 헤집어도 로엘을 발견하지 못해 펄펄 뛰었다.
“마왕님께서 사라지셨다! 벌써 마계 7기둥 놈이 수를 쓴 거 아니냐고!”
“진정해라, 굴란트. 마계 7기둥이 어찌 알고 벌써 손을 뻗었겠느냐.”
“그럴 가능성도 있다는 거지. 다 그쪽 때문이야. 왜 쓸데없이 뼈나 어긋나가지고.”
“마왕님께서 그리 억세게 흔드시는데 뼈만 남은 내가 어찌 버티겠느냐. 일단 진정해라. 그 분이 생각 없이 사라지진 않으셨을 거다. 마계가 어떤지 궁금해서 외출하신 것일 수도 있지.”
“그래서 더 걱정하는 거라고. 혹시라도 성벽 바깥으로 나가시기라도 하면 어쩌냐고! 안 그래도 지금 때 아닌 활성화 때문에 난리도 아니잖아.”
스랄스는 로엘이 성벽 바깥으로 나갈 수 있을 리 없다 생각하면서도 걱정되는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흐음, 때 아닌 위험지대 활성화도 그렇고 요즘 따라 흉흉한 일이 많은데 마왕님까지 바로 사라지실 줄이야. 마계 7기둥이 손을 쓴 게 아니라면 좋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