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3 6-9. 반영구 회로의 진실 =========================
시체를 다루는 능력은 기본적으로 언데드의 영역이다.
혈마는 다른 차원에서 온 자다.
혈마의 세계에서도 시체를 다루는 기술이 따로 존재했을까?
그렇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한 가지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다.
리치의 잠재력에서 빼내온 그림자 군단.
마나를 마족의 기운인 마기로 전환할 수 있는 마기전환.
여러 개의 목숨을 지닐 수 있는 불사의 능력.
거기에 언데드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시체술까지.
로엘의 회귀를 제외하면 전부 마계에서 생성된 듯한 느낌을 주는 능력들이었다.
로엘은 자신의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손등 위의 문양은 여태까지 보다 훨씬 느린 속도로 변화 중이었다.
이미 3개의 문양이 새겨져 있는 탓에 마지막 문양이 자리잡으려면 시간이 걸릴 것으로 추정되었다.
문양이 완전히 자리를 잡았을 때 반영구 회로가 발동되리라.
일단 로엘은 루엔을 물리기로 하였다.
“이만하면 됐어. 돌아가서 자도록 해.”
“오늘 같이 자면 안 돼?”
“으음, 그런 눈빛으로 보면 고민되는데 말이야. 엘로나가 허락하면 와도 돼.”
“오오! 다녀올게.”
루엔을 내보낸 로엘은 창가 옆 의자에 앉아 오른쪽 팔꿈치를 창가에 기대었다.
오른쪽 손등의 문양이 검은 점이 되었다가 새로운 형태로 바뀌었다.
새로 만들어진 문양은 뿔 달린 야수의 얼굴 같은 모양이었다.
동시에 완성된 반영구 회로에서 검은 기운이 솟아나더니 구체를 이루었고, 구체는 점점 더 커져서 순식간에 로엘을 집어삼켰다.
검은 구체안에 삼켜진 로엘은 시야가 시커멓게 변함과 동시에 목소리가 나오지 않게 되었다.
시야가 다시 밟아진 건 그 후로 10초 뒤의 일이었다.
검은 공간 끝에서부터 하얀 점이 보이더니 이번에는 하얀 공간이 나타났다.
하얀 공간에 떨어진 로엘은 그제야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허억허억! 어후, 놀래라. 각오했는데도 이 모양이네.”
반영구 회로가 다 모이면 반영구 회로를 만든 자가 준비해놓은 현상이 발동된다고 했었다.
수많은 결과를 예측해놓았었는데 이상한 공간에 빨려들어갈 줄은 몰랐다.
로엘이 떨어진 공간은 바닥, 벽, 천장 모두가 새하얀색으로 이루어진 곳이었으며 다른 구조물은 하나도 없었다. 바닥, 벽, 천장을 구분하는 검은선이 없었다면 원근감마저 희미해졌을 거다.
로엘이 하얀 공간에 떨어지길 기다렸다는 듯 허공에서 보랏빛 뿔을 가진 보랏빛 피부의 사내가 나타났다.
키는 로엘과 비슷한 정도일까.
사내의 눈매는 부리부리한데다 새빨간 눈동자가 번뜩이고 있었으며, 하체는 털인지 주름진 가죽인지 모를 것으로 덮여있었고, 가슴팍에는 사선으로 기다란 흉터가 남아있었다.
전체적인 인상은 카리스마를 지닌 강인한 타입이었다.
일단 마족에 속하는 자인 것만은 확실했다.
나타난 마족은 로엘을 확인하자마자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 드디어 나의 육체 될 자가 도달하였구나. 애송아, 나의 조각들을 모으느라 고생했겠지만 이만 내게 몸을 넘기거라.”
다짜고짜 마족 한 놈이 나타나 몸을 넘기라고 한다.
그렇다고 순순히 네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할 로엘이 아니었다.
로엘은 언짢은 티를 팍팍 내며 말했다.
“이봐, 기뻐하는 와중에 미안한데 일단 나도 사정은 알아야 하지 않겠어?”
“이놈 봐라? 당돌하기 짝이 없는 놈이로구나. 하긴 내 영혼 조각의 선택을 받은 놈답긴 하군.”
“영혼 조각? 반영구 회로를 말하는 건 아니겠지?”
“정확히는 내 영혼 조각을 반영구 회로의 형태로 변형한 것이지. 애송아, 나를 위해 조각을 모아왔으니 궁금증 정도는 풀어주마. 짐은 마계의 왕 아도로스이니라.”
“마왕이란 소리야?”
“그래, 너희들이 무서워하고 공포에 떨었던 그 마왕이니라.”
이미 용마전쟁은 500년 전의 일이라 로엘에겐 딱히 마왕의 힘이 어떤 건지 실감 나지 않았지만 정보를 위해 맞장구 쳐주었다.
“그 대단한 마왕이 왜 영혼 조각을 다른 자에게 심었지?”
“짐은 용마전쟁 이후 마계에서 인간계로 가는 길이 막혔음을 알고 아예 다른 차원의 정복을 노렸단다. 하지만 거기서도 패하고 말았지. 다른 차원의 전쟁에서 죽기 전에 영혼 조각을 퍼트려 부활의 때를 기다린 것이란다.”
“아~, 그러니까 네 영혼 조각은 5조각으로 나뉘어서 부활을 이뤄줄 수 있는 숙주에게 스며든 거군.”
“이런 명석한 아이를 봤나. 부활하기 위한 재료만 아니면 내 군대의 참모 자리 정도는 주고 싶구나. 명색이 부활을 노리는데 멍청한 녀석에게 들러붙어서야 되겠느냐. 내가 사용할 육체를 강하게 만들고 반영구 회로를 모을 정도의 머리를 가진 자에게 붙었어야 했지. 대륙통일을 앞둔 너는 딱 좋은 재료였단다.”
지금 마왕이 말한 것에 의하면 로엘에게 반영구 회로가 붙은 건 첫 번째 생애 대륙통일 직전이라는 게 된다.
나뭇가지에서 잔가지가 돋듯 로엘의 의문도 마구 생겨났다.
“잠깐 기다려. 그렇다면 왜 회귀 시점이 스물 살이었던 거야? 그리고 왜 대륙통일 시점이 회귀지점이었던 거고?”
“그 정도는 알고 있을 거라 여겼는데 모르는가 보군. 회귀지점을 너무 일찍 잡으면 네 수명이 먼저 다할지도 모르니까 적정시점을 잡은 것이겠지. 회귀의 시작점과 회귀지점은 내가 정하는 게 아니라 반영구 회로의 회귀능력 마법진이 측정하는 거란다.”
“대충 알겠군. 반영구 회로의 특이현상은 반영구 회로 자체의 효과, 그 외의 것은 네놈의 능력이었군.”
환생-그림자 군단
차원이동-시체술
영혼공유-마기전환
불사-44개의 목숨
회귀-??
왼쪽의 것은 반영구 회로 자체의 효과이고, 오른쪽의 것은 마왕의 능력이었다.
그래서 맹약을 새길 때 특이현상과 관련된 것이 아닌 마왕 본연의 능력이 로엘에게 주어졌던 거다.
로엘이 마왕의 능력을 모두 모은 후 마왕에게 육체를 넘길 수 있도록.
로엘의 분석이 들어맞았는지 마왕은 송곳니가 드러나도록 기다린 조소를 품었다.
“질문 시간은 끝났단다. 이제 짐의 부활에 일조하도록 하여라.”
“부활이라 해봤자 내 몸을 차지하는 거잖아. 내가 순순히 넘겨줄 것 같아?”
“이곳은 짐을 위한 공간이니라. 짐의 허락 없이는 마계로도, 인간계로도 갈 수 없는데 어떻게 도망칠 생각이더냐?”
“도망칠 생각은 없어. 이 자리에서 널 없애버리면 그만이니까.”
다른 곳과 격리된 공간이라 해도 상관없다.
이곳에 육체가 통째로 전송된 거라면 몸 안의 힘도 그대로 남아있다는 게 된다.
비록 검은 들고 있지 않지만 마나 익스퍼트 수준의 마나 건틀릿 정도는 만들 수 있었다.
로엘은 양쪽 주먹을 말아 쥐며 도디의 싸움방식을 떠올렸다.
‘분명 주먹을 감싸는 방식으로......’
이내 곧 로엘의 양쪽 주먹에 마나 건틀릿이 생성되었다.
로엘로서도 처음 시도해보는 거지만 한 번에 성공했다.
마나만 있다고 되는 게 아니라 천부적인 마나운용능력까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로엘이 마나 건틀릿을 만들어냈건만 마왕은 예상범주 내라는 듯 태연하게 대응했다.
“어리석구나. 힘을 가진 자가 순순히 힘을 주지 않으리란 것을 내가 예상치 못했을 것 같으냐?”
마왕의 손등이 위로 향하도록 주먹을 쥐더니 검지만 뻗어 아래로 까딱였다.
그러자 보이지 않는 바위가 올라탄 듯 로엘의 몸 전체에 강한 압박이 주어졌다.
로엘의 무릎이 서서히 굽혀지기 시작했다.
로엘은 이를 악물며 무릎만은 꿇지 않으려 하였다.
“으윽!”
“헛된 기대를 품고 있다면 일찌감치 접거라. 반영구 회로의 효과에 회귀자가 내 의지에 복종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으니라.”
반영구 회로의 모든 효과는 시전자인 마왕을 위해서 짜여져 있었다.
지금 두 사람이 있는 회로의 방에서만큼은 반영구 회로 시전자와 반영구 회로 숙주의 관계는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5초가 흐르고, 10초가 흐르고, 1분 즈음 흘렀을 때.
마왕은 이상함을 느꼈다.
억제력을 가한지 1분이 넘었건만 로엘은 바닥에 엎드리긴커녕 무릎이 땅에 닿지조차 않았다.
오히려 반쯤 굽혀졌던 무릎이 조금씩이나마 펴지고 있었다.
로엘의 자세가 점점 높아지고 있음을 감지한 마왕이 놀란 기색을 띠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반영구 회로 숙주가 회로의 속박을 이겨내고 있단 말이냐!”
얼마 지나지 않아 로엘의 무릎이 완전히 펴졌다.
600년 치 마나? 마나운용능력?
그것과는 별개인 단순한 개인의 정신력만으로 버텨내고 있는 것이었다.
로엘은 다시 마나 건틀릿을 만들어내며 말했다.
“너 역시 왕이라면 알겠지. 왕은 무릎 꿇지 않는다는 걸.”
로엘을 누르고 있는 억제력은 어디까지나 반영구 회로 시전자인 마왕의 정신력에 의한 것이었다.
로엘이 억제력을 이겨냈다는 것 때문에 역으로 마왕의 정신력이 흐트러졌다.
그와 동시에 로엘을 누르던 억제력이 약해졌다.
몸이 가벼워짐을 느낀 로엘은 때를 놓치지 않고 힘껏 뛰어 마나 건틀릿으로 마왕의 가슴팍을 강하게 후려쳤다.
우드득!
검흔이 깊이 파여 있는 곳에 마나 건틀릿이 깊숙하게 파고들며 내장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마왕의 허리가 깊게 꺾임과 동시에 하얀벽을 향해 튕겨져 나갔다.
분명 마왕은 육체 없는 사념체였지만 로엘이 그의 영혼 조각 대다수를 지니고 있었기에 공격이 먹혀든 것이었다.
부활을 꾀할 수 있는 수법이었던 대신 억제력이 먹히지 않을 경우 약해질 대로 약해진 마왕의 몸이 반격을 버틸 수 없었다는 게 이 방법의 유일한 약점이었다.
정상적인 상태였다만 마나 익스퍼트급 쯤이야 우습게 받아냈을 거다. 하지만 약해질 대로 약해진 마왕의 사념체가 마나 익스퍼트급의 공격을 받아낼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단 한 번의 공격만으로도 충분했다.
로엘의 일격을 맞은 마왕의 사념체는 힘을 잃고 발끝부터 가루가 되어 흩날리기 시작했다.
마왕은 흩날리기 시작한 자신의 몸을 보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반영구 회로의 억제력이 통하지 않는 독종이라니... 왕에 대한 집착이 강한 놈이로구나.”
“몇 번이나 통일을 앞두고 실패해봐. 싫어도 몸부림칠 수밖에 없어.”
“이딴 식으로 일이 수틀릴 줄이야. 오냐, 그렇게까지 마왕이 되고 싶다면 마계로 보내주겠다. 나는 이미 틀렸으니 차라리 내 조각을 얻은 네놈이라도 왕이 되는 게 낫겠지. 빌어먹을 마계 7기둥이 왕이 되는 꼴을 볼 바엔......”
마왕이 말하는 다른 차원에서의 패전이 마계 7기둥과 관련이라도 있는 듯 증오가 가득 피어나왔다.
그것과 별개로 로엘의 귀에는 오로지 ‘마계로 보내준다.’는 말밖에 들리지 않았다.
로엘로선 인간계로 돌아가야 하는데 웬 마계인가 싶었다.
“마계가 아니라 인간계야. 난 마왕이 될 생각 없어.”
“훗, 자신을 가져라. 짐의 억제력을 버텨낼 정신력에 짐의 능력까지 지녔지 않더냐.”
“아니 그게 아니라 이제 진짜로 대륙통일......”
“육체를 빼앗기지 않고 짐을 쓰러뜨릴 줄은 몰랐군. 원래 회귀 현상에 깃든 능력은 내 사념체를 유지하던 영혼조각에 남아있었지. 능력이라기 보단 2대 마왕 킹 아도로스임을 증명하는 표식에 불과하니 지금 남아있는 내 수하들에게 나의 대체자임을 증명하는 용도로는 충분할 것이다.”
“마계가 아니라 인간계로 보내달라고!”
로엘이 악을 쓰며 외쳐보았지만 킹은 이미 사라졌으며 마계로 통하는 통로가 열린 후였다.
로엘의 발밑에 구멍이 생겨나면서 적색 땅과 보랏빛 구름이 가득한 지대가 나타났다.
어찌할 겨를도 없었다.
구멍은 가차 없이 로엘을 빨아들였다.
발판 자체가 통로가 된 탓에 로엘은 그대로 통로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로엘은 마계로 통하는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며 고래고래 외쳤다.
“사람 말 좀 들으란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