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0 6-8. 대관식을 앞두고 =========================
6-8. 대관식을 앞두고
빌로스에 복귀한 로엘은 가장 먼저 신하들에게 ‘황제 대관식’과 ‘제국 선포’를 하겠다고 말했다.
빌로스의 신하들이 반대할 리 없었다.
자신이 모시는 국왕이 황제로 격이 높아지는 것이니까.
충심 가득한 그들 입장에선 두 손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브리니아 왕국과 하니온 왕국 사이의 일 역시 전해 들었기에 신하들도 국면이 바뀌었음을 감지하고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 로엘이 제국 선포를 하겠다는 건 대륙통일의 야심을 드러내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즉위 초기에 로엘이 대륙통일에 대한 야심이 없어 보여 내심 아쉬웠었는데 지금이라도 다시 야심을 가져주어 기쁘기 그지없었다.
특히 그란데 백작은 기뻐하다 못해 감격에 겨워했다.
로엘이 야심을 되찾은 것은 좋으나 현재 상황에서 제국 선포를 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다.
그 전에 몇 가지 전제조건을 충족시켜야만 했다.
현재 제국 선포를 위해 필요한 건 두 가지가 있다.
1. 브리튼 교의 승인
2. 킬더 왕국과의 협의
왕국 설립에 대한 허가나 국명 개명 등의 일은 브리튼 교의 공식 승인이 있어야만 유효하다.
브리튼 교의 승인을 받지 못하면 정당성을 부여 받지 못한다.
정당성을 얻지 못한 채로 제국 선포를 행하면 로엘은 독재자 이미지를 뒤집어쓰게 될 것이며 심할 경우 브리튼 교에서 제명당할 수도 있다.
말만 들으면 브리튼 교가 각 왕국을 쥐어 잡을 수 있는 권한을 들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예로 든 건 어디까지나 브리튼 교를 무시하고 일을 행할 경우일 뿐이다.
정해진 절차를 밟고, 행위의 목적이 도리에 어긋난 일만 아니라면 어지간해선 승인해준다.
이번 제국 선포의 경우 명분은 충분했다.
브리니아 왕국을 치기 위해선 빌로스 왕국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
빌로스 왕국이 브리니아 왕국을 점령하고 나면 하니온 왕국이 고립되고 말 것 이라는 것.
빌로스 왕국이 단독으로 마족을 소탕했다는 것.
여태까지의 공적을 감안하면 빌로스 왕국은 충분히 격을 높일 자격이 있었다. 더하여 앞으로 벌어질 일의 뒷감당을 위해선 빌로스 왕국이 빌로스 제국으로 올라서는 게 가장 간편하고 효율적인 선택지였다.
로엘은 빌로스 왕궁회의를 열었다.
돌아오는 길에 케시어에 들렀다 왔기에 신하들에게 브리튼 교의 갈레오리 교주와 나눈 대화를 들려주었다.
“갈레오리 교주와 제국 선포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어. 브리튼 교로선 반대할 이유가 없다더군.”
신하들의 얼굴에 화색이 띠었다.
제국 선포를 위한 두 가지 조건 중 하나는 충족되었다.
기뻐하는 신하들을 보던 로엘이 손을 휘저으며 웅성거림을 가라앉혔다.
“아직 기뻐하긴 일러. 갈레오리 교주는 한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고 오라 했어. 그 조건만 충족시킨다면 언제든지 대관식을 준비해주겠다고 하더군.”
눈치 빠른 라이너리 백작이 손을 반쯤 들며 말했다.
“혹시 킬더 왕국을 설득하는 일입니까?”
“그래. 우리와 킬더는 연방국가를 세우기로 했었지. 이제 수도 이전만 하면 마무리되는 단계까지 왔어. 이제 와서 제국 선포로 바꾸면 가만히 있지 않겠지.”
“엘로나 여왕님이 많이 곤란해 하시겠군요.”
킬더 왕국은 빌로스 왕국의 속국이 되던가, 제국의 한 덩어리가 되던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어느 쪽을 택하든 로엘과 엘로나가 같이 가이아 대륙 서부 전체를 다스리는 건 똑같다.
엘로나나 기존 킬더 왕국 귀족들의 업무도 이어갈 생각이었다.
직위 자체는 제국의 격에 맞춰 상승시킬 거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킬더 왕국은 로엘의 제국 선포가 달갑지 않을 것이다.
수백 년 동안 이어진 킬더 왕국의 역사를 이어가느냐 마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에.
심할 경우에는 킬더 왕국이 기존에 계획되어 있던 연방국가 설립을 취소하고 빌로스를 적대국으로 여길지도 몰랐다.
로엘로선 엘로나와 척을 지는 일은 없었으면 했지만 이 또한 대륙통일을 위해선 겪어야 할 일이었다.
로엘은 과감하게 결단을 내렸다.
“킬더 왕국에 사신을 보내도록 하지. 우리 뜻은 제국 선포로 굳어졌다고 전해.”
“사신은 누굴 보낼까요?”
“드리안 공작을 보내도록 해. 건준위에 속해서 킬더 왕국과 친분이 두터우니까 내가 직접 가는 것보단 부드럽게 받아주겠지.”
“알겠습니다. 드리안 공작님께 공문을 보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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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로나는 이미 샹데르로 이주를 마쳐 로엘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상태였다.
그런데 별안간 드리안 공작이 찾아왔다.
평소처럼 건준위 소속으로 온 것이 아니라 빌로스의 사신 신분으로 찾아온 것이었다.
드리안 공작은 엘로나를 비롯한 킬더 왕국의 귀족들에게 로엘의 뜻을 전하였다.
빌로스 왕국의 제국 선포 의향을 전해들은 엘로나는 침묵에 잠겼다.
엘로나를 대신하여 킬더 왕국의 귀족들이 반발의 말을 토해냈다.
킬더 왕국의 귀족들은 여자 비율이 높기 때문에 곳곳에서 높은 톤의 불만이 터져 나왔다.
“제국 선포라니 절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애초에 연방국가 설립을 목표로 여기까지 온 것이잖습니까.”
“준비도 거의 킬더 왕국에서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제국 선포라니요.”
“빌로스 왕국은 처음부터 킬더 왕국을 흡수할 생각으로 일을 진행시켰던 거였습니까? 드리안 공작님, 대답을 해주십시오.”
예상했던 대로 반대의 물결이 요동쳤다.
드리안 공작은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엘로나만 보았다.
아군이었던 자들이 끊임없는 적의를 보내왔지만 여기서 그가 흔들리면 빌로스의 뜻이 흔들리는 거나 마찬가지기에 굳건히 자세를 유지했다.
생각에 잠겨 있던 엘로나는 가녀린 손을 앞으로 뻗었다.
엘로나의 손짓에 웅성거림이 멎어들었다.
엘로나는 킬더 왕국의 귀족들을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킬더 왕국을 노렸다니 말도 안 되는 얘기죠. 먼저 로엘에게 다가간 건 저랍니다.”
“그거야 그렇지만......”
“상황을 좀 더 냉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어요. 드리안 공작, 빌로스 왕국에선 킬더 왕국을 어떻게 보고 제국 선포를 마음먹을 거죠?”
“로엘 전하께선 빌로스 왕국이 제국이 되는 게 아니라 빌로스&킬더 연방국가가 제국으로 바뀐다고 생각하고 계십니다.”
비슷한 것 같지만 두 가지는 매우 다르다.
빌로스 왕국이 킬더 왕국을 흡수하는 게 아니라 빌로스 왕국과 킬더 왕국이 함께 제국으로 거듭나는 걸 원하는 것을 의미했다.
엘로나의 질문은 이어졌다.
“만약 킬더 왕국이 제국 선포에 동의한다면 제 직위는 어떻게 되죠?”
엘로나가 당장이라도 동의하기라도 할 것처럼 보였기에 킬더의 귀족들에게서 반발이 터져나왔다.
“안 됩니다, 여왕님!”
“빌로스 왕국의 농간에 놀아나시면 안 됩니다!”
엘로나는 다시 손을 뻗어 그들을 진정시켰다.
“아직 결정한 건 아니니까 가만히들 계세요. 한 번만 더 대화를 끊었다간 가만히 있지 않겠어요.”
엘로나의 위엄에 킬더 왕국의 귀족들이 맥을 못추고 입을 다물었다.
귀족들은 내심 놀라고 있었다.
이전의 엘로나에겐 이만한 카리스마가 없었다.
말하는 대로 휘둘리는 여왕이었었는데 언제 이리 위엄을 갖추게 되었는가.
엘로나는 차분한 모습으로 드리안 공작과의 대화를 재개했다.
“신하들이 무례를 저질렀군요.”
“아닙니다. 저라도 같은 반응이었을 겁니다.”
“다시 묻죠. 제국이 설립되면 제 직위는 어떻게 되죠?”
“로엘 전하께선 공동통치를 원하고 계십니다. 직위는 유지하되 격을 높여 황제, 여제로서 나라를 다스리시게 될 겁니다.”
“그랬다간 족보가 꼬일 텐데요?”
“두 분의 자식이 후계자가 되면 해결될 일입니다. 거기서부터 제국의 역사는 시작되고 두 분은 역사 위에 서게 되시는 거죠.”
“드리안 공작도 상당한 달변가로군요. 말이 쉽지 자손이 많아지면 그만큼 말이 많아지는 법이에요.”
베나티아는 드래곤이니 딱히 자식을 황제로 만들고 싶어 하진 않을 거다.
루엔도 권력에 욕심내는 부류는 아닌데다 로엘도 당장에 그녀와 일을 치를 생각은 없으니 상관없다.
카넨이야 로엘이나 엘로나에게 충성하도록 교육시키면 시키지 분쟁을 일으킬 생각은 하지 않을 거다.
셸리도 뭍의 권력보단 해저섬 후계자가 더 급하니 그쪽으로 양성시킬 거고 말이다.
문제는 레이아다.
레이아도 상당한 야심가인 만큼 후에 아들을 낳게 되면 자기 자식을 황태자로 만들고 싶어질 거다.
혹시 모른다.
로엘과 같이 지낸 만큼 레이아가 먼저 아들을 낳게 될지도 몰랐다.
그리 되면 상당히 복잡해진다.
드리안 공작은 엘로나의 반응을 예상이라도 한 듯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엘로나 여왕님. 귀족들을 물려주십시오. 이 이야기는 엘로나 여왕님만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뭔가 중대한 사항이 있음을 느낀 엘로나가 귀족들에게 물러나란 명령을 내렸다.
킬더 왕국의 귀족들은 불만을 느끼면서도 왕명에 따라 바깥으로 나갔다.
넓은 회의장에 엘로나와 드리안 공작만 남았다.
드리안 공작은 주위에 듣는 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몇 번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나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
“엘로나 여왕님, 이 사실은 로엘 전하께도 비밀로 해주십시오.”
“무슨 일인데 그러시죠?”
“약속해주십시오. 저 역시 공주님 스스로 로엘 전하께 전할 때까지 비밀로 해둘 생각입니다.”
“비밀로 할게요. 그러니 말하세요.”
일주일 전, 드리안 공작이 드리안 공작령을 떠나기 직전에 크라넬이 찾아와 이 사실을 전해주었다.
즉, 현재까지 비밀을 아는 자는 레이아 본인과 크라넬, 드리안 공작뿐이라는 소리였다.
이제 엘로나까지 추가될 예정이었다.
드리안 공작은 애통한 감정을 담아 레이아의 비밀을 밝혔다.
“레이아 공주님께선 아이를 가지실 수 없는 몸이라 합니다.”
말을 듣는 순간, 엘로나는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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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니온 왕궁의 기다란 성벽 위.
올해는 유달리 여름이 빨리 찾아오려는 건지 강렬한 뙤약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레이아는 양산을 든 채로 홀로 성벽 위에 서있었다.
하염없이 수도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데 성벽 아래에서 크라넬이 올라왔다.
레이아의 명령에 따라 드리안 공작령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크라넬은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지금 막 복귀했습니다.”
레이아는 여전히 시가지 풍경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풍경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은 공허하기만 했다.
“드리안 공작에겐 제대로 전했어?”
“네.”
“수고했어.”
“공주님.”
“왜?”
“언제 아신 겁니까?”
“마나대회가 끝날 즈음에 알았어.”
하니온 왕국에 오기 전에 메델에게 가서 진찰을 받았었다.
꽤 오랫동안 로엘과 지내며 많은 관계를 맺었으니 혹시 생기지 않았나 싶어 진찰을 부탁했다.
결과가 나왔을 때 메델이 말하길 선천적으로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었다고 하였다.
받아들일 수 없었으나 메델을 다그친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메델도 어찌할 수 없는 부류의 일이었다.
당시에는 울지 않았다.
로엘에게 걱정 끼치기 싫었으니까.
대신 하니온 왕국으로 오는 마차 안에서 울었다.
메이아까지 바깥에서 걷게 한 채 안에서 혼자 흐느꼈다.
모든 슬픔과 울분은 그때 다 흘려버렸다.
흘려보내야만 했다.
그러지 않으면 무너질 것 같았으니까.
남들과 같은 행복이 허락되지 않은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한 가지뿐이었다.
내가 가장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만 허락된 이상 그 사람만이라도 최고의 영광을 누리게 해주리라.
그 일념 하나로 레이아는 움직이고 있었다.
레이아는 양산을 내려 얼굴을 가리곤 말을 꺼냈다.
“내가 그를 최고의 자리에 올려놓을 거야. 반드시.”
크라넬은 제 일인 것처럼 가슴이 찢어지는 것을 느꼈으나 감정을 억지로 삼키며 대답을 꺼냈다.
“끝까지 따르겠습니다, 공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