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39 6-7. 통일을 향한 걸음 =========================
6-7. 통일을 향한 걸음
망자섬 토벌에 이어 하니온 왕국에 지원까지 갔던 로엘은 하니온 왕국 수도에서 며칠 머물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로엘을 맞이하는 울크의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어색했다.
레이아는 로엘이 하니온 왕궁에 들어서자마자 남들 눈 의식치 않고 와락 안겨 들었다.
“로엘.”
로엘은 몸으로 레이아를 받아주며 그녀를 품 안 가득 안아주었다.
“본의 아니게 데리러 온 꼴이 되었네.”
“후후, 생각보다 일찍 와줘서 다행이야. 망자섬 토벌 직후라 지쳤을 텐데.”
“그렇게 지치진 않았어.”
혈마와 파이오르가 부딪칠 시간에 맞추기 위해 일부러 관광지에서 하루 쉬었다 왔지만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레이아가 로엘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한껏 숨을 들이쉬며 배시시 웃었다.
둘만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가만히 있던 울크는 스킨십이 너무 길어지자 헛기침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흠흠, 딸아이와 사이가 좋아보여서 다행이군. 오랜만일세, 사위.”
원래라면 로엘 국왕이라 부르며 어느 정도 격식을 차리던 울크인데 이상하게 친근한 호칭으로 불러오고 있었다.
레이아가 품 안에서 키득키득 웃고 있는 걸로 보아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로엘은 울크의 체면을 위해 호칭을 맞춰주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장인어른.”
의외로 장인어른이란 울림이 마음에 들었는지 울크가 호탕하게 웃었다.
“허허허, 먼 길 오느라 고생했는데 얼른 안으로 들도록 하지. 할 이야기가 많기도 하니 말일세. 그리고 그쪽 분은......”
로엘의 뒤에 서있던 베나티아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로엘과 함께 있는 푸른 머리칼의 여인이라면 한 사람밖에 없기에 말꼬리를 흐리는 것이었다.
베나티아는 귀찮다는 의미로 늘어져라 하품을 해댔다.
“푸아암~, 인사 안 해도 되니까 침실이나 하나 내줘. 요즘 따라 계속 날기만 해서 어깨 결려 죽겠어.”
“그럼 목욕물과 잘 곳을 준비해놓겠습니다. 사위는 어떻게 하겠는가?”
“뒷수습을 거들도록 하죠. 킬더 왕국에도 지원요청을 했다 들었습니다. 그들이 왔을 때 현장의 일을 마무리한 제가 직접 설명하는 게 빠르겠죠.”
“먼 길 왔으니 나머지 일은 우리에게 맡기게.”
“딱히 지치진 않았으니......”
“자자, 레이아도 자네를 기다렸으니까 따로 자리를 가지게나. 장인의 마음씀씀이라 여기고 푹 쉬어주게.”
“뭐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편히 쉬도록 하겠습니다.”
레이아가 로엘의 손을 잡아 이끌며 별궁으로 안내했다.
베나티아는 오로지 자고 싶은 생각뿐인지 하니온 왕궁 궁녀의 안내를 받으며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그래서 로엘과 레이아 단 둘이서 느긋하게 별궁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침실로 들어선 레이아는 교태를 부리던 표정을 싹 바꾸며 진지하게 말했다.
“일단 앉아. 논의해야 할 게 많아.”
로엘은 침대에 걸터앉으며 레이아가 업무태세에 들어갔음을 직감했다.
“이제 막 한 건 끝났는데 긴장 좀 풀지 그래? 너도 은근히 일중독이더라.”
“지금이니까 더더욱 다음 일을 염두에 둬야 해. 이번 일로 국면이 아주 많이 바뀌었어.”
국면이 바뀌었다.
레이아의 말 대로였다.
침묵하고 있던 브리니아 왕국이 스스로 침공당할 명분을 만들어 주었다.
이 다음에 빌로스 왕국이 어떻게 나서느냐에 따라 대륙의 정세가 바뀌리라.
로엘은 누우려던 자세를 고쳐 똑바로 앉았다.
“많이 바뀌긴 했지. 하니온의 입장은 어때? 공식적으로 브리니아 왕국에 선전포고라도 한데?”
“하니온 왕국 단독으로 선전포고하는 건 무리야. 이번 일로 요새 3개가 무너지고 병력이 줄어들었어. 브리니아가 1만의 병력을 잃었다지만 아직 본국에는 4만 대군이 대기하고 있으니까 현재의 하니온 왕국으론 무리지.”
“하지만 하니온 왕국이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위상이 한없이 추락하겠지. 근데 너 방금 하니온 왕국 ‘단독’으로는 불가능하다 했잖아. 내 왕국이나 킬더 왕국의 병력을 끌어들일 셈이야?”
“역시 내 낭군이네. 눈치가 빨라서 좋다니까.”
현재의 하니온 왕국으로는 브리니아 왕국을 공격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순 없다.
현 상황에서 하니온 왕국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뿐이었다.
빌로스 왕국과 킬더 왕국을 끌어들이는 것.
두 왕국의 병력이 가세하면 브리니아 왕국을 칠 수 있다.
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점령까지도 가능하다.
국왕을 잃어 구심점이 없어진 나라를 치는 건 일도 아니었다.
빌로스&킬더 연방국과 하니온 왕국은 동맹관계니까 동맹국이 침공 당했다는 명분으로 병사를 파견할 수 있었다.
로엘도 막 반영구 회로를 다 모은 참이니 거리낄 게 없었다.
다 모았다고는 해도 지금 당장 반영구 회로를 발동시킬 수는 없었다.
맥셀의 말에 의하면 모든 회로를 몸에 새겨야만 로엘의 영혼에 새겨진 것과 이어진다 하니 빌로스 왕국으로 돌아가 루엔에게 새겨 달라 해야만 모든 게 마무리되었다.
원래 주제로 돌아와서 로엘로선 얼마든지 병력을 파견할 의향이 있었다.
“빌로스 왕국에 돌아가면 병력을 새로 편성하겠어. 그란데 백작이 좋아하겠군. 처음부터 전쟁전쟁 노래를 불렀으니.”
“멋대로 얘기 끝내지마. 이제부터가 본론이니까.”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레이아의 표정은 점점 더 진지해져 갔다.
야심이 충만한 여인의 모습.
마치 로엘에게 빠지기 전의 레이아를 보는 듯했다.
그렇다.
원래 레이아는 가슴 속에 야심을 품고 있는 여인이었다.
그런 레이아의 입에서 본론이 튀어나왔다.
“브리니아 왕국을 점령하기 전에 황제 대관식을 치르도록 해.”
로엘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황제가 되라는 거야?”
“그래.”
“황제는 대륙통일 이후에 제국을 세운 다음 올라도 늦지 않아.”
“아니, 그때 가서 하면 늦어. 브리니아 왕국 점령 이후에 하니온 왕국을 칠 생각인 건 아니지?”
생각해보니까 대륙통일을 하려면 하니온 왕국을 쳐야만 한다.
하지만 그건 도리에 어긋나는 짓이었다.
장인의 나라를 치는 게 되어버릴 테니까.
반영구 회로가 모여 대륙통일을 행하는데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이 없어졌다 한들 장인의 나라를 공격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레이아는 거기까지 생각했는지 말을 이었다.
“브리니아 왕국을 치기 전에 아예 제국 선포를 해버려. 이참에 물렁하게 대처했던 3공국도 제대로 흡수해야 해. 연방국가 설립을 제국으로 바꾼 다음 하니온 왕국을 제국령으로 둬. 그러면 브리니아 왕국을 공격할 때 연합군이 아니라 제국군으로서 공격할 수 있을 거야.”
“잠깐, 생략은 삼가자. 결국 네 말은 하니온 왕국을 속국으로 삼으라는 거잖아. 장인어른이 받아들일 리 없어.”
차라리 위상이 떨어지더라도 왕국으로 남고 말지 제국의 속국으로 들어올 리가 없었다.
그러나 레이아는 할 수 있다는 듯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받아들이게 할 거야. 이번 사태를 보고 확신했어. 하니온의 안전을 위해선 울타리가 필요해.”
로엘 즉위 전까지만 하더라도 5왕국의 힘은 겐크-브리니아-하니온-빌로스-킬더 순으로 강했었다. 그런데 어느새 빌로스가 최상위로 치고 올라갔고, 킬더 왕국이 카넨이란 마나 마스터를 소유하게 되면서 관계가 역전되었다.
3공국이야 어차피 빌로스의 속국이니 제외한다 치면 빌로스-킬더-브리니아-하니온 순이 되어버렸다.
이대로 빌로스 왕국이 브리니아 왕국까지 얻으면 빌로스의 휘하에 들지 않은 유일한 왕국이 된다.
그리 되면 하니온 왕국은 내내 불안에 떨어야 한다.
장인의 나라이기 이전에 대륙통일을 위한 마지막 나라이니까.
대륙통일이란 이름 앞에서 장인과 사위가 서로 의심하게 되어 버린다.
굳이 로엘의 대에서 대륙통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후손이 하니온 왕국을 멸망시킬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레이아로선 그 꼴을 볼 바에는 차라리 하니온 왕국이 속국으로 들어와 대륙통일에 일조하는 나라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로엘은 대륙통일을 이루려면 레이아의 말대로 하는 게 낫겠다 여겼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레이아가 울크를 설득하지 못할 경우에 발생할 일이다.
자칫 잘못하면 오명을 뒤집어 쓸 수도 있었다.
남자에게 홀려 나라를 팔아넘기려하는 공주란 오명을 말이다.
“설득할 땐 나도 동참하겠어. 네게만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할 순 없지.”
로엘도 도우려 했으나 레이아가 고개를 저었다.
“이 경우엔 네가 돌아가는 게 나아. 뭘 걱정하는지는 알겠는데 걱정할 거 없어. 내가 누군지 잊은 거야?”
“기운 넘치는 레이아 공주님이지.”
“잘 아네. 하니온 왕국을 설득하는 건 내게 맡겨두고 빌로스로 돌아가. 내가 반드시 널 통일제국 황제로 만들어줄 테니까 염려 붙들어 매.”
레이아의 야심은 아직 살아 있었다.
대륙 최고로 거듭난다는 것이 바로 그녀의 야심이었다.
다만 옛날과 달라진 게 있다면 로엘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대륙 최고로 거듭나긴 하되 레이아 본인이 올라서는 게 아닌 로엘을 최고로 올려주는 것으로 바뀌었다.
로엘은 프로포즈라도 받은 심정인지라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진짜 여기에 꽃다발까지 있었으면 금상첨화였겠는 걸?”
“거기에 네가 울기까지 하면 더 가관이겠지.”
“그럼 넌 날 울린 유일한 여자가 되겠군.”
로엘과 레이아는 농담으로 대화를 마무리 지으며 촛대의 불을 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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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엘은 이틀 정도 하니온 왕궁에 더 머무르다가 귀환길에 올랐다.
하니온 왕국에 올 때는 베나티아를 타고 왔지만 돌아갈 땐 마차를 타고 돌아가기로 하였다.
사전에 얘기했던 대로 레이아는 남기로 했다.
떠나기 전에 로엘은 메이아를 불렀다.
메이아 역시 레이아의 시중을 위해 한동안 하니온 왕궁에 남을 것이기에 그녀를 불러다 당부의 말을 전했다.
“타지라서 불편하겠지만 레이아를 위해서 수고 좀 해줘.”
“미천한 몸이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미천이란 말을 빼.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 없으니까.”
“네, 전하. 아, 그리고......”
“따로 할 말이라도 있어?”
“아뇨, 아무 것도 아녜요. 돌아가는 길에 몸조심 하세요.”
“메이아도 몸조심 해.”
인사를 마친 로엘은 하니온 왕궁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빌로스 왕국으로 떠났다.
메이아는 멀어져 가는 마차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이제부터 레이아가 할 일에 대해선 미리 언질을 받았다.
레이아가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빈틈없는 편의를 제공하는 것.
그게 메이아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다만 조금 아쉬운 게 있다면 로엘이 한 가지 잊어버린 게 있다는 점이었다.
정확히 내일이 메이아의 생일이었기에.
작년까지는 매년 챙겨줬었는데 올해는 아무래도 큰 사건이 많이 터져서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그래도 메이아는 딱히 주눅 들거나 하지 않았다.
이게 당연한 것이기에.
‘바쁘신 분인데 나까지 신경 쓰게 만들 순 없지. 나는 나대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자.’
메이아는 허리띠를 꽉 졸라매며 기합을 단단히 넣었다.
그런데 레이아가 있는 별궁으로 돌아가기 전에 하니온 왕궁의 궁녀 한 명이 다가와 작은 선물상자 하나를 건넸다.
“메이아 양. 로엘 전하께서 주문하신 물건인데 메이아 양이 받기로 되어 있었다네요. 받으세요.”
“제게요?”
“네.”
메이아는 선물상자를 받아 끈을 풀렀다.
안에는 생일축하카드와 함께 머리핀 하나가 담겨 있었다.
생일축하카드에는 이리 적혀 있었다.
[생일 축하해, 메이아. 항상 안 보이는 곳에서 힘써줘서 고마워. 머리핀이 낡은 것 같아서 새 걸 주문했어. 새로 살 때도 된 것 같은데 정말 마음에 드는 모양인가봐? 그래서 똑같은 걸로 제작해 달라 했는데 마음에 들지 모르겠네.]
원래는 내일 도착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착오가 있어 지금 도착한 모양이었다.
항상 로엘이 메이아를 지켜봐주고 있었다는 것에서 메이아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메이아는 금이 가서 몇 번이나 고쳐 쓰고 있는 머리핀을 떼어내곤 로엘이 준 새 머리핀을 머리에 꽂았다.
마음에 드는 모양이라 계속 쓴 게 아니지만... 뭐 상관없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