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35 6-6. 될놈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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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니온 왕국에는 서쪽에서 동쪽을 가로지르는 기다란 강이 있다.
유크로나 강이라 불리는 이 강은 하니온 왕국 동쪽 바다까지 이어진다.
유크로나 강과 바다가 맞닿는 지점에 작은 항구 마을이 있는데 항구 마을에 매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갸리스터 남작님. 아침에 매 한 마리가 날아들었습니다.”
“어디서 보내온 매던가?”
“빌로스 왕국에서 온 매입니다.”
“빌로스 왕국에서? 서신을 줘보게.”
갸리스터 남작은 병사에게서 서신을 낚아채듯 받아들며 안에 담긴 내용을 읽어 내렸다.
[조만간 동쪽 바다를 통해 다수의 함선이 들이닥칠 예정이다. 함선이 나타나도 당황하지 말고 지나가게 놔두도록. 왕궁을 거쳐 전달하면 늦을 것 같아 하니온 왕궁과 그쪽에 동시에 보내는 것이니 의심치 마라. -빌로스의 국왕 엘리오스 킨 로엘-]
다른 사람도 아니고 국왕 로엘이 직접 보내온 서신이었다.
다만 조금 의아한 건 빌로스 국왕의 인장 대신 본스마 항을 다스리는 귀족 가의 인장이 찍혀 있다는 점이었다.
갸리스터 남작은 울크의 명이 아닌 이 명령을 따라야 하나 고민했다.
“정말 로엘 국왕인지 의심스럽군. 타국의 책략인 건 아닐지.”
“제 생각엔 본인이 맞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본스마 항에 빌로스 군이 귀환했다고 하니까요. 급해서 본스마 쪽 귀족의 인장을 쓴 게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겠군. 일단 본스마의 인장인 건 확인되었느냐?”
“도장부를 확인해보니 정확히 일치했습니다.”
“다수의 함선이 온다라. 성군이라 불리는 분의 생각이니 다 뜻이 있겠지. 일단 경계를 늦추지 말도록.”
갸리스터 남작이 막 서신을 보관함에 넣어두려던 차에 또 다른 병사가 뛰어 들어왔다.
“남작님! 큰일입니다!”
병사가 절차를 무시하고 방 문을 벌컥 정도의 일이라면 보통 일이 아닐 터.
갸리스터 남작은 방금 서신에 적혀 있던 내용이 먼저 떠올랐다.
“무슨 일이더냐? 설마 해안에 다수의 함선이라도 나타났느냐?”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브리니아 왕국의 함선 서른 척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크기는 전부 대형 함선급입니다.”
“서른 척!”
대형 함선 서른 척이면 최소 1만은 되는 대군이었다.
대륙회담 이후로 계속 숨을 죽이고 있던 브리니아 왕국이다.
순순히 군비축소조약을 따를 리 없다 여겼지만 언제 저만한 함선을 준비했단 말인가.
유크로나 강의 깊이와 너비를 생각하면 대형 함선 서른 척이 아슬아슬하게 지나갈 수 있었다.
그걸 감안하고 준비한 거라면 여태껏 하니온 왕국 침공을 위해 많은 준비를 해온 셈이었다.
갸리스터 남작은 항구로 나가 몰려오는 대형 함선 무리를 보며 중얼거렸다.
“브리니아는 빌로스부터 노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가.”
빌로스 왕국과 브리니아 왕국은 원수지간이다.
무슨 짓을 해도 빌로스 왕국에 할 줄 알았는데 하니온 왕국부터 노릴 줄이야.
병사들이 경계태세를 갖추며 갸리스터 남작의 지시를 기다렸다.
“남작님! 지시를!”
갸리스터 남작은 막상 눈앞의 적을 보니 투쟁심이 끓어올랐다.
적이 상륙할지 안 할지 확신할 수 없기에 이왕 공격할 거면 지금부터 시작해야했다.
하지만 서신의 내용이 갸리스터 남작의 마음에 고민을 불러 일으켰다.
고민하던 갸리스터 남작은 로엘의 서신을 믿기로 마음먹었다.
“전 병력을 뒤로 물려라.”
“괜찮은 겁니까?”
“그건 나도 모른다. 로엘 전하의 서신을 믿을 수밖에.”
항구로 다가온 브리니아의 함대는 그대로 강으로 들어서며 마을을 지나쳤다.
함선 갑판 위에서 금박을 입힌 갑옷을 입은 자가 싸늘한 표정으로 갸리스터 남작과 눈을 마주쳤다.
갸리스터 남작은 금빛 갑옷을 입은 자를 보곤 완전히 얼어붙었다.
‘저 자는!’
갸리스터 남작이 먼저 공격하지 않자 브리니아의 함대는 그대로 마을을 지나쳐 상류로 나아갔다.
함대가 지나간 후에야 갸리스터 남작은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후우, 설마 저 자가 직접 올 줄이야.”
“누구를 보았길래 그러십니까?”
“브리니아의 국왕, 파이오르가 배 위에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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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류로 갈수록 텅텅 비어있는 마을이 늘어났다.
갑판 위에 서있던 파이오르에게 브리니아의 귀족들이 다가와 말을 붙였다.
“하류에 있던 그 마을 하나 빼고는 전부 피난 간 모양입니다.”
“상관없다. 계속 상류로 향하도록.”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한심한 나라로군요. 고작 탈옥수 따위에게 나라 전체가 흔들리다니 말입니다.”
“방심하지 마라. 탈옥수라 해도 우두머리가 그랜드 마스터란 소리가 있으니.”
“훗, 정말 역사에 길이 남을 시대를 살고 있는 셈이군요. 어디 왕은 마나 마스터고, 어디 탈옥수는 그랜드 마스터니 말입니다.”
파이오르는 건틀릿 낀 손을 꽈악 쥐었다가 펴며 무덤덤한 투로 한 마디 내뱉었다.
“이대로 하니온 왕국 수도까지 올라가도록.”
마나 마스터니 그랜드 마스터니 하는 단어에도 흔들림 한 점 없이 계획대로 움직이는 파이오르였다.
그 누가 상대이든 이길 수 있다는 듯.
파이오르의 모습은 귀족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수도 옆의 영지까지 올라가 대기토록 하겠습니다.”
브리니아 왕국은 대륙회담 이후부터 군비축소조약을 무시하고 몰래 함선을 늘려왔다.
겉으로는 빌로스 왕국과의 적대관계를 유지하는 척하며 하니온 왕국부터 점령할 생각이었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와중에 하니온 왕국이 흔들리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탈옥수 무리 하나를 막지 못하고 고전 중이라 하는 게 아닌가.
조만간 탈옥수 무리가 수도에 도달할 거란 소식을 접했기에 강을 타고 상류까지 올라갈 생각이었다.
강은 하니온 왕국 수도의 옆 영지까지 이어진다.
거기서 대기하고 있다가 하니온 왕국의 수도군과 탈옥수 무리 양측의 힘이 빠질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리고 힘이 빠진 양측을 모두 쳐서 하니온 왕국의 수도를 차지하고 울크의 목을 친다.
여기까지가 파이오르의 계획이었다.
그런데 강을 타고 올라가던 중 의외의 무리와 마주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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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마는 하류를 우회해서 하니온 왕국의 수도로 향하는 중이었다.
계산상으로는 일주일 정도 더 소모하게 된 셈이었으나 실제로는 그 이상의 시간을 소모할 수밖에 없었다.
고로나 벌판에서 얻은 시체 중 쓸 만한 자들을 혈강시로 만드는 시간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낮에는 이동하고 밤에는 혈강시 제조를 하느라 그만큼 이동속도가 늦어졌다.
특히 바카스 공작이란 자는 마나 익스퍼트급이기에 좀 더 공을 들여서 만들어야만 했다.
그래서 고로나 벌판을 지난지 일주일이 지났건만 아직 수도까진 사흘거리가 남아있었다.
혈마는 강가에 혈강시 부대를 대기시켜놓고 수통에 물을 채워 벌컥벌컥 들이켰다.
‘시간이 너무 지체 됐군.’
혈강시 제조에 생각 이상으로 시간을 투자해버렸다.
오늘 밤이면 바카스 공작의 혈강시 제작이 끝나니 속력을 높일 수 있겠지만 그래도 사흘이 걸린다는 건 변함없었다.
게다가 하니온 왕국이 어떤 대책을 세워두고 있는지 아무런 정보를 접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원래 계획은 마을을 훑으면서 사람들을 굴복시켜 정보원, 잡일꾼 등으로 만들려 했는데 어찌 된 게 거쳐 온 마을마다 사람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힘만 있으면 다른 부분은 알아서 해결될 줄 알았는데 이쪽 세계 사람들도 제법 머리를 쓸 줄 아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상관은 없겠지. 어차피 이쪽 세계에서 본좌를 이겨낼 자는 없을 터이니.’
지저감옥에서 맨 아래층에 갇혀 있던 그는 성기사들에게 발견되어 위층으로 옮겨졌다.
사람이 없을 터인 맨 아래층에 사람이 있으니 그 경위를 조사할 필요가 있었다.
성기사들은 혈마의 정체가 확실해질 때까지 중간층에 가둬두기로 했으며 혈마는 다른 범죄자들과 한 방에서 생활하며 이쪽 세계에 대한 정보를 많이 접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가장 많은 정보를 준 자는 아지스란 자였는데 혈마에게 힘이 있다면 하니온 왕국부터 치라고 했었다.
빌로스 왕국이란 곳만 믿고 있는 느긋한 족속들이라 점령하는데 있어 어렵지 않을 거라면서 말이다.
그래서 혈강시라는 것을 만들 수 있다 하니 그 힘으로 군대를 만들라고 하지 않는가.
아지스는 하니온 왕국 점령 이후에 3공국이란 곳을 점령해서 자신에게 맡겨달라고 했었는데 나오기 전에 죽여서 혈강시로 만들었다.
어차피 처음부터 점령한 것을 다른 이에게 나눠줄 생각은 없었기에.
혈마는 수통을 허리에 차며 바카스 공작에게 행하던 작업을 마무리하러 돌아가려 했다.
그런데 강 하류 쪽에서 물살 헤치는 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푸르스름한 달빛 사이로 커다란 배가 몰려왔다.
여기까지 오면서 배라고는 한 척도 발견하지 못한 혈마다.
거쳐 온 마을마다 사람들이 배를 부순 후에 도망가 버렸기 때문이다.
배가 있다면 좀 더 빨리 하니온 왕국의 수도에 도달할 수 있다.
사흘이 아닌 내일 당장이라도 도착할 수 있을 터.
게다가 지금 몰려오는 배의 숫자라면 혈강시를 모두 태우고도 남았다.
혈마는 이게 웬 떡이냐 싶었다.
“큭크크, 어디의 지원군이라도 부른 모양이군. 어리석은 것들. 제 스스로 배를 갖다 바친 꼴이 되었구나.”
하니온 왕국이 다른 왕국에 지원군을 불렀고, 그 지원군이 배를 타고 온 거라 여겼다.
혈마는 대기하고 있던 혈강시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나의 혈강시들아. 가서 모조리 몰살시키고 배를 빼앗거라.”
혈강시들의 피부가 달빛을 받아 번들거리나 싶더니 하나둘 물속으로 잠겨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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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라 갑판 위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브리니아 왕국의 병사들은 기다란 하품을 해댔다.
“이곳이고 저곳이고 전부 빈 마을뿐이구만. 전쟁을 온 건지 뱃놀이를 온 건지 모르겠군.”
“아직 탈옥수 무리가 수도에 도착하지도 않은 것 같아. 녀석들끼리 싸울 때까지 또 기다려야 할 걸?”
“차라리 대놓고 싸우는 게 낫지 않아? 이거야 원 좀이 쑤셔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싸우러 왔는데 정작 싸움은 한 번도 못한 탓에 병사들의 긴장이 풀어져 있었다.
수도에 도착할 때까진 싸울 일이 없다 확신하기에 더더욱 그랬다.
헌데 하품을 하던 병사들 앞에 피칠을 한 듯한 손 하나가 불쑥 난간 아래에서 솟아났다.
턱!
난간을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더니 피칠을 한 듯한 모습을 한 자가 갑판 위로 올라왔다.
깜짝 놀란 병사가 창대를 휘둘러 피칠을 한 자의 가슴을 후려쳤다.
“허억! 이놈 뭐야!”
창대에 맞은 자는 뒤로 밀리긴커녕 거뜬히 창대를 버텨냈다. 그리곤 갑판 위로 올라와 병사의 투구를 후려쳤다.
빠각!
투구에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으면서 병사의 목이 홱 돌아갔다.
뿐만 아니라 올라온 자는 한 명이 아니었다.
어느새 난간 가득 피칠을 한 듯한 손이 턱턱 걸리기 시작했다.
괴담의 한 장면처럼 말이다.
같이 보초를 서던 병사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야습이다! 적이 난간을 타고 올라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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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에서 오밤중의 전투가 시작되려던 때.
강가 마을에 위치한 헛간 안에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시신 한 구가 뉘여져 있었다.
혈강시 완성 직전이라 아직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시신이었다.
시신의 양허리에는 혈강시가 된 이후에 쓰라고 달아둔 적룡검과 청룡검이 달려있었다.
원래는 온몸에 특수한 약초를 섞은 걸쭉한 피를 바르고 혈마의 기운을 불어넣어야 일어날 수 있었으나 적룡검과 청룡검이 주인을 깨우듯 스스로 기운을 뿜어냈다.
적룡검과 청룡검의 기운이 시신의 표면을 타고 흐르다가 배에 이르렀다.
혈마가 배에 그려 놓은 강시 술법에 기운이 스며들었다.
잠시 후, 시신이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