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될놈될-134화 (134/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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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될놈될

울크는 침묵했다.

승전보를 가져다줄 거라고 믿었던 바카스 공작이 사망했다.

샤이닝 기사단은 절반으로 줄었고, 6천의 병사 중 4천 명만이 살아 돌아왔다.

그나마 시모나 다리를 끊어서 적이 추격하지 못했기에 망정이지 끝까지 싸웠다면 전멸했을지도 몰랐다.

침묵한 건 울크뿐만이 아니었다.

하니온 왕궁의 모든 신하들이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이 나라의 안전을 위해, 국왕의 안전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이였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묵념의 시간이 이어졌다.

묵념을 마친 울크가 슬픔을 가슴 한 켠에 밀어 넣으며 말을 꺼냈다.

“놈들의 이동경로에 속하는 모든 지역의 백성들을 피신시키게. 일주일의 시간을 벌었으니 경로 이외의 지역으로 피신시킬 시간은 충분할 걸세. 그리고 샤이닝 기사단의 기사들이여.”

샤이닝 기사단의 기사들은 일제히 한 쪽 무릎을 꿇었다.

“네, 말씀하십시오.”

“그대들은 왕하 직속 기사단에 합류하도록. 그리고 남은 병사들도 분할하여 수도방위군으로 배치시키게.”

아예 길을 열어 혈마란 자가 수도에 오게끔 하려는 것이었다.

결전은 수도에서 벌일 생각이었다.

샤이닝 기사단은 명령을 행하기 위해 즉각 해산하였다.

하니온 왕궁의 신하들은 울크에게 시선을 모으며 말했다.

“전하, 수도방위군 총지휘자로는 누굴 택하실 겁니까?”

원래 수도방위군 총사령관이었던 바카스 공작이 사망했으니 후임자를 정해야했다.

적임자는 여러 명이 있으나 현재로선 하니온 왕국의 유일한 마나 익스퍼트가 된 크라넬에게 맡기는 게 나아보였다.

신하들이 크라넬을 추천했으나 울크의 생각을 달랐다.

“짐이 직접 지휘하도록 하지. 놈이 원하는 건 나라고 했으니 나를 미끼삼아 놈을 칠 수 있는 대형을 짜도록.”

지금 혈마란 자를 공략할 유일한 방법은 그가 가지고 있는 높은 자신감뿐이다.

울크가 성벽에 선다면 필시 울크부터 노릴 게 분명했다.

게다가 바카스 공작의 죽음으로 떨어진 사기를 다시 끌어올리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다.

신하들도 그걸 알기에 울크의 명을 받들었다.

그런데 레이아가 끼어들며 울크의 뜻을 반대하고 나섰다.

“절대 안 될 일이에요. 명을 거두세요, 아바마마.”

울크는 평소와 달리 엄격함이 담긴 눈빛으로 레이아를 응시하였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레이아?”

“분명 아바마마께서 성벽에 오르시면 적은 아바마마를 노리겠죠. 하지만 상대는 그랜드 마스터라고요. 마나 마스터만 하더라도 온갖 계책이 통하지 않는 경지인데 그 위의 경지를 상대로 미끼 역을 맡겠다니요. 절대 안 될 일이에요.”

레이아의 말에는 울크에 대한 걱정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그녀로선 울크를 말려야만 했다.

전장에 나서면 반드시 죽는다.

한 명의 딸로서, 한 명의 백성으로서 울크 ‘국왕’을 살려야만 했다.

레이아는 현 상황에서 가장 현명한 선택지를 읊어주었다.

“샤이닝 기사단 보고에 따르면 놈의 혈강시는 죽이면 폭발한다고 했어요. 아마 폭발능력은 공성전에서도 유효하겠죠. 뭉치면 오히려 피해만 가중돼요. 부대를 잘게 쪼개서 여기로 오는 경로 곳곳에 배치하고 아바마마는 서쪽 국경으로 몸을 피하시는 게 가장......”

가만히 듣고 있던 울크가 몸을 피하라는 대목에서 사나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묵직한 목소리로 레이아의 말허리를 끊었다.

“지금 내게 수도를 버리고 도망가라는 것이냐?”

울크가 레이아에게 이토록 화낸 적은 처음이었다.

원래라면 레이아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을 거다.

하지만 수도를, 수도의 수많은 백성을 등지고 혼자 도망치는 것만큼은 용납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성벽 안에 웅크려 있는 건 하책 중의 하책인데도 말이다.

울크의 사나운 모습을 처음 접하는 레이아인지라 한순간 움찔하고 말았다.

그래도 지금은 명예보다 실리를 취할 때였다.

레이아는 자세를 가다듬으며 꿋꿋하게 울크를 설득하려 했다.

“제 말대로 하세요. 여기서 적을 맞이하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어요.”

“레이아 너 역시 왕족이니 알 것이라 믿는다. 등을 돌린 왕은 왕이라 할 수 없느니라. 그리고 아직 패배를 단정하기엔 이르지. 내겐 1만이 넘는 병력과 수도의 성벽이 있지 않느냐.”

“그렇다면 차선책이라도 들어주세요. 최소한 킬더 왕국의 지원군이 올 때까지만이라도......”

“더 이상 말하지 마라. 내 반드시 수도의 성벽 아래에 놈을 묻을 터이니. 크라넬, 레이아를 별궁으로 데려가라.”

크라넬이 왕명을 거역하지 못하고 레이아의 옆에 다가섰다.

차마 그녀를 억지로 끌고 가지는 못하겠기에 조곤조곤 돌아갈 것을 권했다.

“공주님, 돌아가시지요. 울크 전하께선 이미 마음을 굳히셨습니다.”

레이아가 방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다른 기사들을 시켜서라도 돌려보낼 분위기였다.

레이아는 답답함에 옷자락을 꽈악 쥐며 억지로 인사를 올렸다.

“소녀는 물러나보겠습니다, 아바마마.”

///

울크의 명령을 따라 물러나긴 했다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레이아가 아니었다.

남은 시간은 일주일.

가장 먼저 올 수 있는 킬더 왕국의 지원군이 올 때까지 열흘 남은 걸 감안하면 사흘의 시간  차가 있었다.

상대가 그랜드 마스터라면 최소한 카넨 정도는 있어야 한다.

카넨에 크라넬, 성벽까지 모두 활용해도 막을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야 했다.

레이아는 방 안에서 원 모양으로 빙글빙글 걸으며 머리를 굴렸다.

생각해라. 수도를 버리지 않고도 적의 진군을 늦출 방법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레이아가 자신의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손등에는 드라고라의 혈청으로 만든 맹독의 인장이 새겨져 있었다.

맹독의 인장과 베나티아에게 배운 맹독 마법을 잘만 이용하면 시간을 끌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현재 레이아는 30년 치 마나를 지니고 있었고, 독물 마법 수준도 2써클 밖에 되지 않지만 맹독의 인장을 능력을 활용하면 그 이상의 힘을 낼 수 있었다.

레이아는 일단 시도라도 해볼 생각으로 종이 한 장을 꺼내 목록 하나를 적어 내렸다. 그리곤 크라넬을 불렀다.

“크라넬.”

“네, 부르셨습니까.”

“의무부로 가서 여기 적힌 것들을 가져와줘.”

크라넬은 종이에 적힌 목록을 확인하곤 눈을 번쩍 떴다.

전부 강력한 독성을 지닌 독초들뿐이었다.

“이 독초들을 가져다 어디에 쓰실 생각이십니까?”

레이아가 맹독의 인장이 새겨져 있는 자신의 손등을 쓸어내렸다.

“먹을 거야.”

크라넬도 레이아가 맹독의 인장을 가지고 있고 베나티아에게서 독물 마법을 배운 걸 알고 있다.

독초를 먹으면 맹독의 인장을 독을 흡수하여 레이아가 마음대로 쓸 수 있게 해준다.

레이아의 능력을 알고 있기는 한데 어디에 쓸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설마 공주님도 성벽에 나가 싸우실 생각은 아니겠죠? 울크 전하께서 절대 허락지 않으실 겁니다.”

“그게 아니라 시간을 끌러 나갈 생각이야. 지금 병력구성으로는 혈마를 막을 수 없어. 최소한 카넨은 있어야 해. 카넨만 있어도 로엘과 베나티아 언니가 올 때까진 버틸 수 있을 거야.”

“시간을 끌기 위해 독이 필요하다는 거군요.”

“그렇지. 아직 혈마의 병력은 하류로 내려가는 중이야. 몰래 왕궁을 빠져나가서 배를 타자. 녀석들이 오는 경로에서 독 연기를 쬐게 할 거야.”

“그랜드 마스터에겐 독이 통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혈강시란 것들에겐 통하겠지.”

혈강시도 어느 정도 독에 면역을 가지고 있는 걸로 추정된다.

그렇다 해도 완전히 면역인 건 아니다.

독살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마비독으로 하루에서 이틀 정도만 발을 묶어둘 생각이었다.

왕궁 의무부에 있는 독초 중 마비효과가 있는 독초를 싹 다 먹어다가 독 연기를 만들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몰래’ 가야한다는 게 중요했다.

울크는 수도의 성벽과 1만이 넘는 병사라면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레이아를 보내줄 리 없었다.

크라넬은 몰래 나갈 경우 데리고 갈 수 있는 인원에 한계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몰래 나가면 호위는 저밖에 없습니다.”

“아무래도 그렇게 되겠지.”

“이번만큼은 저도 지켜드릴 수 있을지 장담 못합니다.”

“바람 계산해서 독 연기만 날리고 바로 빠질 거야. 요는 안 들키면 만사해결이란 거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이대로 하책 중의 하책이 실행되는 꼴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크라넬이 따르지 않는다고 하면 레이아 혼자서라도 갈 기세였다.

크라넬은 하는 수 없이 독초 목록을 가지러 문 밖으로 나갔ㄷ.

헌데 별궁 입구에 들어올 때까지만 하더라도 없던 병사들이 창대를 들고 서있었다.

병사들은 절대 보낼 수 없다는 듯 서로의 창대를 교차했다.

“지금부터 레이아 공주님, 크라넬 경, 궁녀 메이아는 별궁에서 지내주셔야겠습니다. 왕명이니 따라주십시오.”

혹시나 레이아가 따로 움직일까 싶어 울크가 미리 조치를 취한 것이었다.

크라넬은 머리가 지끈거림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까지 하실 줄은 몰랐군. 이거 공주님이 참다못해 폭발할 게 분명한데 어쩐다.’

///

망자섬 토벌을 마친 로엘은 오는 길에 마도섬에 들렀다가 본스마 항으로 돌아왔다.

막 본스마 항에 도착한 로엘은 한 통의 서신을 전해 받게 되었다.

전해준 이가 말하길 진한 화장을 한 여인이 전해주라고 했다 한다.

로엘은 코르네가 보낸 것임을 알고 서신을 열어보았다.

[혈마라는 자가 지저감옥을 탈출해서 하니온 왕국을 점령하려고 합니다. 실력이 그랜드 마스터급이라 하니 베나티아 님과 함께 급히 와주셔야겠습니다. -코르네 올림-]

서신을 본 로엘은 기억을 더듬었다.

‘혈마. 혈마라.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은데......’

로엘의 옆에 서있던 베나티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무슨 서신이길래 그리 고민을 해?”

“하니온 왕국에 일이 생긴 것 같아서 가야봐 할 것 같네요.”

“급한 일이야?”

“잠시만요. 전에 이 일을 겪었던 것 같은... 아!”

로엘은 전생과 전전생에서 겪었던 일을 떠올렸다.

분명 전생과 전전생에서도 혈마란 자가 지저감옥을 탈출하여 하니온 왕국을 궁지에 몰아넣은 적이 있었다.

그때 그 사태가 어떤 결말을 가져왔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로엘은 베나티아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지금 당장 하니온 왕국으로 날아가죠.”

“그냥 말해본 건데 진짜 급한 일이었나 보네.”

“급한 일까지는 아니고 느긋하게 날아가면 됩니다. 가는 길에 소오호 호수가 있으니까 거기 들러서 관광이나 좀 하다가 가죠.”

“무슨 일인데 그래? 느긋하게 가든 빨리 가든 이유는 알아야 할 거 아냐.”

로엘이 서신을 접어 품 안에 넣으면서 피식 웃었다.

“축제나 보고 빵이나 얻어먹을 일이 생겼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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