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될놈될-117화 (117/219)

00117 5-6. 카넨, 공인 받다. =========================

“이 물건은 뭐야?”

“사실 웨어울프 마을을 떠나기 직전에 마을 근처에서 카우르가 나타났습니다. 전하께 고기를 바치고 싶어서 사냥하러 나섰는데 사냥 직후에 수풀 사이에서 이 물건을 발견했습니다. 처음에는 보존마법 대신으로 쓰기 좋겠다 여겨 챙겼는데 오는 길에 샹데르에 들러 감정해보니 고룡의 거울이라는 것이더군요.”

“그래서 효과는?”

“거울을 가져다대면 어떤 언어든 고대어로 비친다 합니다.”

“!”

어떤 언어든 고대어로 바꾸어 비춰준다면 검황의 책자를 해석할 수 있을지 몰랐다.

고대어라면 정식사전이 있으니 얼마든지 해석가능 했다.

로엘은 잘 됐다고 여김과 동시에 이만한 물건이 바닥에 있었다는 것에 의문을 느꼈다.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고 했지?”

“정확히는 바위틈에 끼여 있더군요. 제가 아니었다면 못 찾았을 겁니다. 예전부터 안 사람이 장난삼아 제 물건을 숨겨놓는 경우가 있어서 틈 사이에 끼워져 있는 건 잘 찾는 편입니다.”

“흐음, 그랬군.”

“네? 뭐가 따로 하실 말씀이라도?”

“아니 아무 것도 아니야. 다들 수고했어. 나중에 포상을 내리도록 하지. 오늘은 둘 다 들어가서 쉬도록 해.”

그란데 백작과 블랑코가 허리를 깊게 숙이며 물러났다.

두 사람을 돌려보낸 로엘은 벽에 있는 이동식 책장을 옆으로 밀었다.

겹쳐져 있는 두 개의 책장을 밀어젖히자 금고 하나가 나왔다.

금고 안에는 달랑 검황의 책자 하나만 있었다.

로엘은 검황의 책자를 꺼내 책 표지에 고룡의 거울을 가져다대었다.

그러자 여태껏 해석하지 못했던 표지의 글자가 고룡의 거울에 고대어의 형태로 비춰졌다.

[일연신공]

책표지를 열어젖혀 서장에도 고룡의 거울을 비춰보았다.

빽빽하게 적힌 언어가 한 문장 한 문장 고룡의 거울에 비춰졌다.

서장의 첫 머리는 이랬다.

[나의 생은 무로 점철되어 있다. 무를 위해 재산도 버리고, 명예도 버리고, 여인도 버렸다. 산 속에서 지낸지 어언 30년째. 깨달음은 지난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갑자기 찾아온다 하였는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자연이란 무엇인가. 무릇 자연이라 하면 산과 바다, 하늘을 이른다. 삼재를 이르는 천지인의 인은 어디에 두고 왜 따로 분류하는가. 자연과 인간의 집단을 구분하는 건 인간의 오만이니라. 황제께서 머무르는 황궁도, 무인들이 머무르는 무관도, 온갖 사람들이 오다니는 시장도 자연의 일부 아니던가. 만물은 흘러가는 대로 지낼 뿐 스스로의 절기를 구분하지 않거늘 어찌 이를 구분하여 말하려 하는가. 모든 것은 하나로 통한다 하는 게 이런 것이리라. 자연이 곧 무이며 무가 곧 자연이니 구분 지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니 심산이 평안하고 모든 기운이 나의 것 같느니라.]

검황이 이 책을 보고 그랜드 마스터가 되었다고 했다.

책 저자 자체는 검황이 아닌 것 같았다.

당장은 서장을 읽어도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깨달음은 주고받는 게 아니라 오고가는 것이라 했으니 남의 깨달음이 곧 자신의 깨달음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었다.

서장 부분을 넘기자 화경이니 현경이니 하는 경지에 대한 설명이 나왔다.

가이아 대륙의 경지로 치면 화경이란 경지가 마나 마스터의 경지이고, 현경이란 것이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인 것 같았다.

아무래도 검황은 가이아 대륙이 아닌 전혀 다른 곳에서 온 모양이었다.

좀 더 읽어보니 현경, 그러니까 그랜드 마스터에 오르는 조건에 대해 나왔다.

기본적으로 600년치 이상의 마나가 필요하다고 한다.

현재 로엘의 마나량은 450년에 이르렀다.

해저섬 때부터 늘어난다 여겼는데 그 뒤로도 계속 늘어나 지금에 이른 것이다.

600년치까지 늘어나 준다면 로엘도 그랜드 마스터가 될 최소한의 조건은 충족하는 셈이다.

하지만 그 전에 책자를 모두 읽고 이해하는 게 먼저였다.

책자에는 깨달음에 대한 조언 외에도 독특한 방식의 마나호흡법이 기록되어 있었다.

로엘은 아예 왕궁수련장으로 자리를 옮겨 실제로 수련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엘로나도 왔으니 저녁때까지만 있다 와야겠군.”

중얼거리면서 그란데 백작이 먹어보라고 한 생고기를 한 입 베어 먹었다.

로엘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생고기를 내려다보았다.

“백작이 기를 쓰며 가져온 이유를 알겠군.”

///

그날 밤, 로엘과 엘로나는 함께 침실에 들어갔다.

엘로나는 침대 위에서 로엘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두르며 그의 품에 안기듯 누웠다.

로엘이 너무나도 그리웠던지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은은한 미소를 띠었다.

“이 편안한 기분. 정말 오랜만이에요.”

“루엔이랑은 친해졌어?”

“조금은 친해진 것 같아요. 근데 너무 친근하게 대했더니 거리를 두려하더라고요.”

“그 정도면 충분히 친해진 거야. 레이아랑은 하루가 멀다 하고 투닥거리고 있거든.”

“후후, 한 번 보고 싶네요. 레이아도 귀엽잖아요.”

“레이아도 제법 어른스러워졌어. 가끔씩 뾰투룽해지긴 하지만.”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이제 궁녀를 시켜서 로엘에 대한 걸 알아내는 건 그만뒀는지 이제야 안심한 듯 어깨에 힘을 빼는 엘로나였다.

약간의 물기가 남아있는 머리카락이 로엘의 팔에 쓸려 뒤로 넘어갔다.

로엘은 드러난 목선과 그 아래로 이어지는 쇄골라인을 보며 천천히 엘로나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포개었다.

밤하늘의 구름이 눈을 가리듯 어린 초승달 앞을 지나면서 어둠이 한층 깊어졌다.

///

다음날, 로엘은 할 일이 있다며 왕궁수련장에 들어갔고 홀로 남은 엘로나는 카넨을 불렀다.

아직 테헤란 시내의 숙소에 남아있던 카넨은 부랴부랴 빌로스 왕궁에 들어왔다.

엘로나에게서 미리 언질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깜짝 놀라 다급히 온 것이었다.

카넨은 별궁 발코니에 있던 엘로나를 찾아가 냉큼 한 쪽 무릎을 꿇었다.

“트라켄 겐 카넨이 여왕님을 뵙습니다.”

“우승 축하해요, 카넨. 킬더 왕국의 위상을 높여줘서 고마워요.”

“응당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나저나 오시기 전에 제게 미리 말씀이라도 해주시지 그랬습니까.”

“로엘을 놀라게 해주고 싶었거든요. 대회를 치르는 동안 잘 지냈나요?”

“염려해주신 덕분에 무척 잘 지냈습니다.”

“이리 와서 앉으세요. 마나대회 때 어떻게 지냈는지 자세히 듣고 싶네요.”

“네, 알겠습니다. 차를 내오라 할까요?”

“이미 내오라고 했어요.”

카넨과 엘로나는 피식 웃으며 마주보고 앉아 티타임을 가졌다.

막 궁녀가 차와 과자를 가져왔을 때.

하늘에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지는가 싶더니 이내 곧 사람 하나크기로 바뀌었다.

그림자는 점점 발코니로 다가왔고 이상한 낌새를 느낀 카넨과 엘로나가 위를 바라보았다.

위에서 베나티아가 떨어지고 있었다.

베나티아는 공중에서 한 바퀴 돌더니 발코니에 가뿐히 착지하였다.

착지하자마자 꺼낸 첫마디는 상당히 공격적이었다.

“로엘 어디 갔어? 나한테 단단히 혼날 준비하라고 해.”

엘로나는 영문을 알 수 없어 일단 인사부터 하고 봤다.

“안녕하세요, 베나티아 언니.”

이제야 엘로나인 걸 확인했는지 베나티아가 씩씩거리던 걸 멈추고 인사를 받아주었다.

“어라? 엘로나네. 언제 왔어?”

“어제 왔어요. 언니는 어떠세요? 건강에 이상이 생긴 것 같다고 들었는데 잘 해결되셨나요?”

“잘 물어봤어. 내 말 좀 들어봐 봐. 내가 무슨 문제가 있었냐면 마나호흡을 할 때마다 꽉 차지 않고 일부가 덜 찬 듯이 허전했었어.”

베나티아의 증상을 들은 카넨이 무의식중에 반응했다.

“어? 저도 지금 같은 증상 겪고 있어요.”

순간적으로 베나티아의 고개가 카넨 쪽으로 홱 돌려졌다.

베나티아는 카넨의 몸매를 훑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흐음, 잘 빠지긴 했네. 할만도 해.”

“네? 무슨 의미이신지?”

“너도 로엘이랑 하룻밤 보냈지?”

다소 완곡하게 표현하긴 했으나 무슨 말인지 못 알아먹을 여인들이 아니었다.

엘로나가 설마 하는 눈빛으로 카넨을 쳐다보았다.

한쪽에선 베나티아가 흥미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다른 한쪽에선 엘로나가 쳐다보고 있으니 카넨으로선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카넨은 너무도 갑작스러운 나머지 긍정하는 거나 다름없는 대답을 내뱉었다.

“어떻게......”

베나티아가 어깨를 으쓱이며 현재 증세의 전말을 설명했다.

어떤 경위로 로엘의 지속흡수능력이 각성했고, 그로 인해 그와 관계를 맺은 여자들은 마나호흡을 할 때마다 지속적으로 마나를 흡수당하고 있다 말하였다.

베나티아의 말을 듣는 동안 카넨의 이마에 점점 식은땀이 생겨났다.

거기에 엘로나가 확인사살에 준하는 말을 더했다.

“이전에 카넨 야크트 마을에서 제법 머무른 적이 있어요.”

“아하, 이제야 전부 이어지네. 어디 보자 시기로 따지면 작년 말부터 시작됐으니까... 너랑 로엘이랑 수련여행 갔을 때구나.”

여기까지 왔는데 발뺌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카넨은 의자에서 내려와 두 무릎을 털썩 꿇으며 엘로나에게 사죄의 말을 올렸다.

“죄송합니다, 여왕님. 더 이상 여왕님을 뵐 면목이 없습니다.”

엘로나로선 당황스럽긴 해도 화가 난 건 아니었다.

카넨을 잘 알기에 사정이 있을 거라 여겨 차분한 반응을 보였다.

“괜찮으니까 진정하고 도로 앉으세요. 자, 차 한 모금 마시고 차분하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해주세요.”

카넨은 엘로나가 시키는대로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수련여행 때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미약효과에 절어 어쩔 수 없이 로엘의 도움을 받았으나 그 이후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고 설명했다.

설명을 들은 엘로나는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카넨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한 가지만 물을게요. 정말 마음이 없는 건가요?”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며 묻는 질문에 거짓으로 대답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제겐 너무 과분한 분입니다.”

충분한 대답이었다.

엘로나는 카넨의 옆자리로 자리를 옮겨 그녀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었다. 그리곤 다정한 목소리로 카넨을 다독였다.

“난 카넨이 충분히 훌륭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어요. 언제나 나와 킬더 왕국을 위해 힘써줘서 고마워요.”

“여왕님.”

“예전에 대륙회담 때 시작도 전에 주눅 들면 안 된다고 한 게 누구였죠?”

엘로나가 로엘에게 대시할 때 옆에서 갖은 조언을 해주었던 카넨이다.

카넨이 했던 말이 그녀 본인에게 되돌아온 셈이었다.

엘로나는 카넨의 손에서 손을 떼며 그녀의 등을 강하게 두드렸다.

“여왕으로서, 친구로서 허락할게요. 난 더 이상 카넨에게 상처가 생기지 않았으면 해요.”

잠자코 듣고 있던 베나티아가 다리를 꼬며 엘로나의 의견을 거들었다.

“꾸물거리면서 참아봤자 너도 손해고, 로엘도 손해고, 너네들 왕국도 손해야. 참고 있다가 공과 사 구분 못해서 망가지는 사람 여럿 봤어. 그냥 해치워버려.”

“그래요.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오늘 자리를 만들어줄 테니까 얘기를 진행하는 게 좋겠네요. 듣자하니 마나대회 우승상품을 현금화해서 받기로 했다면서요? 그거 대신으로 다른 걸 요구하면 되겠네요.”

“오호라, 엘로나 너 이제 보니까 책사기질이 있는 걸?”

“후후, 폼으로 여왕 자리에 앉아 있는 게 아니랍니다.”

남의 연애사로 즐거워하는 소녀들 마냥 하하호호 떠들기 시작한 두 여자였다.

카넨으로선 엘로나가 좀 더 상심할 줄 알았는데 되러 즐거워하기 시작하니 갈피가 안 잡혔다.

카넨이야 아직 로엘의 여인 속에 포함된 게 아니라 모르고 있는데 어차피 로엘의 여인들은 한 명이 늘어나나 두 명이 늘어나나 거기서 거기였다.

이미 5명이나 붙어 있는데 한 명쯤 더 늘어난들 어떤가.

하지만 카넨은 신분차이 때문에 망설였다.

레이아는 일국의 공주, 엘로나는 일국의 여왕, 루엔은 마탑수장의 손녀, 셸리는 해저섬의 공주, 베나티아는 뭐... 말할 것도 없다.

일개 귀족(?) 출신인 카넨이 그 대열에 끼는 게 오히려 누가 되지 않을지 걱정이었다.

“역시 전......”

또 카넨이 밍기적거리자 베나티아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검지를 까딱였다.

“다 큰 여자가 꾸물거리기는. 답답한 소리 그만하고 따라와.”

“네? 어디로 가시게요?”

“어디 가긴. 로엘에게 가야지. 우리도 주는 만큼은 받아내야 할 거 아냐.”

베나티아는 아예 카넨의 손목을 확 낚아채어 끌고 갔다.

카넨이 엘로나에게 도움을 청하는 눈길을 보냈으나 엘로나는 화사하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 뿐이었다.

///

햇살이 들어오고 있는 왕궁수련장 안.

햇살 때문에 떠다니는 먼지 한 올 한 올이 눈에 보이는 수련장 안에선 로엘이 검을 든 채로 서있었다.

현재 로엘의 집중력은 극에 달해 있었다.

허공에서 깐족거리는 먼지의 움직임이 느껴질 정도였다.

‘팔, 가슴, 다리... 첫 바퀴는 배 아래에서 끝내고, 두 번째는 심장에서, 세 번째는 머리에서.’

검황의 책자에 적힌대로 마나호흡을 하는 중이었다.

기본적으로 마나호흡법은 마나가 없는 자가 마나를 모으기 위해 익히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된 게 책자의 마나호흡법은 최소 300년치 이상의 마나를 지니고 있어야 시작할 수 있었다.

기존에 있는 마나를 더욱 밀도 높게, 깨끗하게 정제해주는 마나호흡법이었다.

마나의 밀도가 높아지면서 몸 안에 더욱 많은 마나가 쌓일 수 있게 해주는 것이었다.

다른 마나호흡법과 병행하면서 쓰도록 만들어진 것 같았다.

마나호흡을 마치고 마나를 갈무리한 로엘은 검을 늘어뜨리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후우, 확실히 효과가 있군.”

마나호흡을 마친 로엘은 수련장 바닥에 앉아 명상의 시간을 가졌다.

책자에서 말하길 책자의 구절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라고 하였다.

명상을 하며 구절을 하나하나 되짚어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막 눈을 감으려던 찰나.

수련장 문이 열리면서 베나티아와 카넨이 들어왔다.

로엘은 베나티아가 돌아온 것을 보고 그녀를 반겼다.

“돌아오셨습니까, 누님. 일은 잘 해결됐습니까?”

“아직 해결 안 됐어.”

“그거 유감이군요.”

“당연히 유감이지. 모든 원인은 너였으니까.”

“엥? 제가요?”

베나티아는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로엘의 팔목을 덥썩 잡아 터프하게 일으켜 세웠다.

“일단 침실로 따라와.”

도저히 무슨 일인지 파악이 안 되는 가운데 로엘은 끌려가다시피 침실로 갔다.

그런데 침실에는 베나티아 뿐만 아니라 카넨도 함께 들어왔다.

그게 의미하는 건 하나뿐이었다.

“설마 이대로 진행하자는 건 아니겠죠?”

베나티아가 카넨의 어깨를 잡아 침대로 밀어붙이며 눈빛을 반짝였다.

“왜 아니겠어?”

///

일를 치른 뒤, 베나티아는 옷을 입고 카넨과 함께 복도로 나섰다.

평소처럼 지칠 때까지 한 게 아니라 개운해질 정도로만 했기에 걸음걸이가 흐트러지진 않았다.

베나티아는 옆에서 조신하게 걷고 있는 카넨에게 한 마디 날렸다.

“드래곤이든 여왕이든 다 똑같지?”

괜히 카넨까지 함께 침실로 들어간 게 아니었다.

로엘의 여인들이 지닌 직위 때문에 카넨이 주눅 든 것 같아 모두가 똑같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 충격요법을 쓴 것이었다.

확실히 한 번 같이하고 나니 지고한 곳에 있는 줄 알았던 베나티아나 엘로나가 좀 더 가깝게 느껴졌다.

카넨은 베나티아의 배려에 깊은 감명을 받으며 딱딱했던 얼굴을 풀고 편하게 웃었다.

“고맙습니다, 베나티아 님.”

“언니면 됐어.”

“베나티아 님이라 부르는 게 편합니다.”

“마음대로 해.”

“생각 이상으로 자상하신 분이시군요.”

“뭐? 웃기고 앉았네. 다른 사람이 들으면 드래곤들 다 착한 줄 알겠다 야. 쓸데없는 소리 말고 엘로나한테 제대로 보고해둬. 난 자러 가련다. 에고고, 그 녀석은 정말 괴롭힘 당한 만큼 돌려준단 말이지. 못된 녀석.”

자상하단 말이 쑥스러운지 괜히 로엘을 탓하며 자기 침실로 가는 베나티아였다.

그런 베나티아의 뒷모습을 보던 카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