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2 5-5. 산맥에 들어간 자들 =========================
그란데 백작이 튀는 피를 피해 트롤의 품 안으로 파고들며 트롤의 무릎을 디딤대 삼아 뛰어올랐다. 그와 동시에 검을 휘둘러 트롤의 목을 베어 넘기곤 뒤로 넘어지는 트롤을 착지대 삼아 우뚝 섰다.
쿠웅!
그란데 백작은 절명한 트롤의 몸 위에서 검에 묻을 피를 털어내며 말했다.
“죽이든 먹든 둘 다 가당치도 않은 일이니라.”
어느새 아래에 있던 메델과 블랑코가 좁은 길을 지나 절벽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백작님, 괜찮으십니까?”
“괜찮긴 하다만 아직 성가신 것들이 남아있구나.”
그란데 백작의 시선이 수풀 너머로 향했다.
수풀 너머의 그늘진 곳에서 묵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쿵쿵쿵쿵
발소리는 여러 겹으로 중첩되어 있었다.
다가오는 이가 한둘 아니라는 증거였다.
블랑코도 발소리를 감지했기에 짊어진 나무약통을 내려놓고 검을 뽑아들었다.
“의원님, 제 뒤에 서계십시오. 아무래도 근처에 트롤 부락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메델이 약통을 끌어안으며 블랑코의 뒤에 자리를 잡았다.
잠시 후, 수풀 사이에서 트롤 열댓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3~4미터짜리 중형 몬스터가 한가득 몰려오니 그 압박감이 장난 아니었다.
트롤들은 동족의 시체가 그란데 백작의 발치에 깔려 있는 것을 보고 광분했다.
“쿠오오! 인간이 트롤 죽였다.”
“죽이자! 죽이자!”
“세 놈이나 있다. 세 놈 전부 죽여 버리자.”
코앞에서 트롤 무리가 광분하고 있었지만 그란데 백작은 침착하게 한 걸음 물러섰다.
후퇴의 의미를 담은 물러섬이 아니었다.
트롤 무리를 한 눈에 들어오게 하려고 한 걸음 물러난 것이었다.
트롤 무리의 대부분이 그란데 백작에게로 달려들었다.
블랑코 쪽에도 2마리의 트롤이 달려들고 있었지만 도울 필요는 없었다.
아직 마나유저 초급이지만 트롤 정도에 당할 정도로 약하게 가르치진 않았다.
그란데 백작은 검을 늘어뜨리며 가장 먼저 달려오는 트롤부터 베려했다.
허나 그란데 백작과 트롤 무리가 격돌하기도 전에 절벽 아래쪽에서 새로운 무리가 나타났다.
몸 전체가 갈색 털로 덮여 있는 웨어울프 집단이 우르르 올라와선 측면에서부터 트롤 무리를 공격하였다.
스무 명쯤 되는 웨어울프 집단 중에서 유달리 눈매가 사납고 누런빛 발톱을 가진 이가 공격명령을 내렸다.
“저들을 구해라! 트롤들의 다리부터 노려!”
웨어울프들은 산개하여 트롤 무리 사이로 섞이며 손톱을 기다랗게 세웠다.
웨어울프의 손톱으로 트롤의 두꺼운 몸을 절단하는 건 힘들기에 먼저 다리를 노려 넘어뜨린 후 머리를 일제히 공격하려는 것이었다.
웨어울프들의 움직임은 날렵하면서도 호흡이 척척 맞아서 트롤들은 힘도 못 써보고 하나둘씩 쓰러졌다.
트롤 무리는 숫자에서 밀리고 힘에서도 밀리기에 겁을 먹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늑대 놈들이다! 저놈들은 못 이겨!”
“도망치자!”
열댓 마리 중 절반이 쓰러졌고, 남은 절반은 부리나케 도망갔다.
갑작스런 웨어울프 집단의 가세 덕분에 그란데 백작은 불필요한 힘 낭비 없이 습격을 넘길 수 있었다.
트롤 무리를 몰아낸 웨어울프들은 그란데 백작을 포함한 세 사람을 둘러쌌다.
둘러쌌다고는 해도 적대적인 분위기는 아니었다.
리더로 추정되는 눈매 사나운 웨어울프가 그란데 백작에게 다가서며 말을 붙였다.
“어서 오시오.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소.”
기다리고 있었다는 투로 말하는 웨어울프였다.
빌로스 왕국에선 따로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알고 기다렸단 말인가.
그란데 백작은 의문이 들어 질문을 날렸다.
“내가 올 걸 알고 있었소?”
“그쪽이 오늘 온다 하지 않았소. 몬스터 시체를 사러 온 상인들 아니오?”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이었다.
원래 웨어울프 마을에 상인이 찾아오기로 했고, 그란데 백작을 포함한 세 사람을 상인으로 착각한 것이었다.
그란데 백작은 검을 검집에 집어넣으며 오해를 풀었다.
“난 빌로스 왕국에서 온 그란데 백작이오. 빌로스의 국왕께서 도디의 어머니를 위해 의원을 파견하셨소.”
“도디? 아! 그 아이는 어떻게 지내고 있소? 인간의 대회에 참가한다던데 정말로 우승했소?”
“우승은 못했다오. 대신 국왕 전하께서 도디의 사정을 헤아려 우리를 보낸 것이오.”
“그랬구려. 이쪽으로 오시오. 에밀라에게 안내하겠소. 그녀의 손님은 우리의 손님이니 늑대무리라 하여 어려워하지 말고 편히 지내주시오.”
웨어울프들은 사납고 드센 성격을 지니고 있다 알려져 있는데 직접 보니 그런 것도 아니었다.
보름달 뜨는 밤 이외에는 순진한 마을 사람들이나 마찬가지였다.
전투능력이 높은 마을 사람이랄까.
그란데 백작과 대화를 나눈 이는 크왈루란 자로 현재 웨어울프 마을의 촌장이었다.
그란데 백작은 크왈루와 함께 마을로 향하며 입을 열었다.
“웨어울프도 생각보다 인간과 많이 교류하는가 보구려.”
상인과 약속한 것처럼 보이기에 한 말이었다.
헌데 그란데 백작의 말을 들은 크왈루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원래는 외지인과 교류를 하지 않는 편이오. 이번에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소.”
“사정?”
“도디가 치료방법을 찾아올 때까지 그녀가 버틸 수 있게 돈을 모아 암시장의 뱀파이어 피를 사려한 것이오. 우리가 돈을 벌 방법이라면 몬스터 사냥밖에 없으니 말이오.”
“에밀라 한 명을 위해 마을 전체가 나선 것이구려.”
“우리에겐 당연한 일이오. 마을이 주민이며 주민이 곧 마을이요.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소.”
늑대는 고독한 동물이라지만 이들은 늑대가 아니라 웨어울프다.
인간의 끈끈한 정과 늑대의 강인함을 동시에 지닌 자들이었다.
마을 전체가 한 사람을 위해 힘써주는 건 분명 보기 좋은 일이다.
허나 네메리아 산과 이어진 듀란델 산에 뱀파이어의 마을이 있는 걸로 알고 있다.
그들에게서 피를 얻을 수는 없는 건가.
그란데 백작은 의문을 표했다.
“뱀파이어 마을에선 피를 얻을 수 없는 거요?”
“무리요. 오래 전부터 우리 웨어울프와 뱀파이어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오. 작은 분쟁들이 계속 쌓이면서 현재에 와서는 서로 원수처럼 대하고 있소. 그들의 입장에서 에밀라는 단순한 배신자이니 절대 피를 내주려 하지 않고 있소.”
뱀파이어 마을과 전투를 벌여 포로를 잡은 후 피 공급원으로 쓴다는 방법도 있긴 하다.
하지만 그건 너무 비인간적이다.
아무리 그래도 거기까지 손을 댈 정도로 웨어울프들은 독하지 못했다.
길이 없는 수풀 사이를 헤치며 나아가자 오두막집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숲 속의 마을이 나타났다.
오두막집마다 사냥한 몬스터나 산짐승의 가죽을 손질하거나, 삼삼오오 모여 북슬북슬하게 난 털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해먹을 만들어 낮잠을 자는 이도 있었고, 간조차 하지 않은 육포를 간식 삼아 질겅거리며 노니는 자들도 있었다.
형태만 다를 뿐 인간의 마을과 다를 바 없었다.
빌로스에서 온 세 사람으로선 좀 더 야생적인 마을을 생각했던 터라 의외라 여겼다.
더욱 더 의외인 것은 좀처럼 인간과 교류하지 않는 웨어울프들이 외지인을 보고도 별 관심을 안 보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자세히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얼마 전, 도디를 데려가기 위해 조직에서 파견한 용병들이 왔다갔으니까 그들과 연관이 있는 자들이라 여겨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이었다.
물론 그란데 백작은 조직의 존재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괜히 도디나 마을사람들이 속았다고 말하여 혼란을 주고 싶지 않았기에.
웨어울프 마을을 가로지르는 사이 트롤 사냥에 나섰던 웨어울프들이 하나둘 흩어졌다.
최종적으론 크왈루만 남아 세 사람을 안내했다.
크왈루는 마을 가장 구석자리에 있는 오두막집 앞에서 멈췄다.
다른 오두막집보다 2배는 큰 오두막집이었다.
도디의 몸집이 커질 때마다 고쳐 지은 흔적이 남아있었다.
누가 봐도 에밀라와 도디의 집임을 알 수 있었다.
크왈루가 문에 다가가 노크를 하였다.
똑똑
“에밀라. 크왈루일세.”
얼마쯤 기다리자 문이 열리면서 창백한 피부를 지닌 뱀파이어 여인이 나타났다.
하얀색 상의와 다홍색의 긴 치마, 회색 숄더 가디건을 걸친 여인이었다.
겉보기에는 슬림한 타입의 중년 여인처럼 보이지만 뼈만 남은 손목과 눈 아래가 짙은 그늘이 드리워진 것만 봐도 상당히 쇠약해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나마 웨어울프들이 뱀파이어의 피를 조달해주었기에 집 안에서나마 활동할 수 있는 것이었다.
에밀라는 쇠약해진 와중에도 밝게 웃어 보이며 크왈루를 맞이해주었다.
“어서 오세요, 크왈루 씨.”
“몸은 좀 어떤가?”
“어제보다 조금 좋아졌어요. 옆에 계신 분들은 손님이신가요?”
“빌로스 왕국에서 온 그란데 백작과 메델 의원, 블랑코 군일세. 도디에게서 이야기를 듣고 자네를 살펴보러 와주신 분들이지.”
에밀라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그란데 백작 일행에게 인사를 하였다.
“저 때문에 먼 길 오시게 해서 죄송해요.”
“괜찮소. 우리가 도움이 되면 좋겠구려.”
“도디는 잘 지내고 있나요?”
“지금쯤이면 전하께서 거두어주셨을 겁니다. 잘 지내고 있을 것이니 걱정마시오.”
“다행이네요. 워낙에 순수한 아이라서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거든요. 어머, 먼 곳에서 손님이 오셨는데 서계시게 해버렸네요. 들어오세요.”
그란데 백작 일행과 크왈루는 에밀라의 집으로 들어갔다.
집은 주인의 성격을 반영한다고 집 안은 에밀라의 나긋나긋한 성격을 닮아 편안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가구마다 세월의 흔적이 남아있었으며, 바닥에는 무두질한 곰가죽이 카펫처럼 깔려 있었고, 흔들의자 위에는 뜨개질 중이던 뜨개바늘과 털실뭉치가 놓여있었다.
누가 들어와도 제 집처럼 여겨 금방 늘어질 것 같은 분위기였다.
에밀라는 대접할 거리를 찾으려고 선반을 뒤적거리다 미안한 듯 어깨를 늘어뜨렸다.
“뭐라도 대접해드려야 할 텐데 대접할 만한 게 없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요리라도 배워두는 거였는데.”
평소에 에밀라의 식사는 동물의 피였고, 도디는 사냥한 동물을 날 것으로 먹었었다.
조리한 음식을 먹을 필요가 없으니 불을 이용한 차라던가 과자 같은 것이 준비되어 있을 리 없었다.
그란데 백작은 크게 신경 쓰지 않으며 메델의 등에 손을 얹어 앞으로 내세웠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되오. 그보다 바로 진찰을 했으면 하오. 메델, 부탁하네.”
“부인, 침대에서 진찰 받는 게 편하실 텐데 괜찮겠습니까?”
“네, 상관없어요. 잘 부탁드립니다.”
“다른 분들은 여기서 대기해주시오. 블랑코, 약통을 침실에 놔둬주게.”
블랑코가 침실에 약통을 놔두며 바깥으로 나왔고, 메델과 에밀라가 침실에 들어가며 문을 닫았다.
검사를 하다보면 옷의 일부를 들춰야 하는 경우도 생기기에 에밀라를 배려하는 차원에서 격리된 공간에서 검사하는 것이었다.
메델이야 왕궁에서 항상 궁녀들을 진찰하는 경우가 많았으니 여성을 진찰하는 일에 익숙한 편이었다.
기다리는 동안 크왈루가 바깥에 나가더니 고깃덩이 몇 개를 들고 들어왔다.
최상급 육우라도 되는 양 선명한 육질에 적절한 지방이 박혀 있었고, 생고기임이 분명한데도 사과향이 솔솔 풍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