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될놈될-108화 (108/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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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멍멍이

파스텔 공작 가의 저택 안.

바람 드는 발코니에선 파스텔 공작이 담배파이프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파스텔 공작은 첫 모금을 마시지 않고 그냥 뱉어내며 뒤를 향해 말을 걸었다.

“위대한 존재께서 여기까진 어인 일이십니까.”

파스텔 공작의 뒤에는 녹색 머리카락을 지닌 미남이 서있었다.

그린 드래곤이자 현 드래곤 로드인 둠러스였다.

둠러스는 천천히 발걸음을 떼어 난간에 기대었다. 그리곤 몸을 뒤로 한껏 젖혀 파스텔 공작을 향해 익살맞게 웃어보였다.

“여전히 귀염성이 없구나.”

“제 나이가 마흔이 넘었습니다. 애교 떨 나이는 아니지요.”

“내 앞에선 40살이나 400살이나 거기서 거기란다. 유희 나온 김에 잘 지내나 보려고 들렀느니라.”

“그럭저럭 평범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거 다행이군. 영혼공유의 후유증은 없느냐?”

“네, 이미 10년 전에 후유증이 사라졌습니다.”

“녀석이 다른 공유자를 찾았다는 거군.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구나.”

“신경 쓰고 싶지 않은 거죠. 녀석의 영혼이 몸에 들어온 것 때문에 10년을 고생했습니다. 이제는 평범하게 살고 싶군요.”

파스텔 공작이 허공을 바라보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바람이 파스텔 공작의 기분을 고려하듯 잔잔하게 훑고 지나갔다.

저택 너머에서 잠을 설친 닭 한 마리가 오밤중에 울어대고 있는 가운데 둠러스가 난간에서 몸을 뗐다.

“그래도 방심하지 말거라. 한 번 스피릿 링크가 걸리게 되면 언제든지 육체를 빼앗길 수도 있으니까.”

“마계에서 얻은 힘은 전부 버렸습니다. 체력조차 없는 늙은 육체를 원할 리 없지요.”

둠러스는 20년 전보다 훨씬 얇아진 파스텔의 팔뚝을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게 네가 택한 길이면 아무 말하지 않도록 하지. 그럼 난 이만 가보마.”

“벌써 가시려고요? 술이라도 한 잔하시지요.”

“다음에 마시자구나. 이번 유희는 혼자 느긋하게 다닐 생각으로 나왔느니라.”

“그렇습니까. 그럼 다음에 또 들러주십시오.”

“그래.”

둠러스가 손가락을 튕기는가 싶더니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홀로 발코니에 남은 파스텔 공작은 파이프의 재를 털어내며 펜던트를 매만졌다. 그리곤 펜던트를 열어 안에 담긴 작은 초상화를 보며 중얼거렸다.

“네가 없는데 힘이며 지위며 무에 소용 있겠느냐.”

열린 펜던트 안에는 얼굴 없는 소형 인물화가 그려져 있었다.

펜던트 안 여인의 머리카락 색깔은 은색이었다.

///

마나대회 4강전이 진행 중인 원형 투기장.

투기장 12시 방향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왕족 전용 관람석에 로엘과 레이아가 앉아 있었다.

목적을 마친 로엘은 왕궁에 복귀하여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상에 합류했다.

로엘이 자리를 비운 며칠 동안 로엘이 왕궁 바깥에서 지냈다는 걸 눈치 챈 사람은 없었다.

원형 경기장 안에선 카넨이 뎁데브를 압도하고 있는 중이었다.

뎁데브의 속도는 도디와 싸울 때 이상으로 빨라져 있었지만 카넨은 능숙하게 뎁데브를 구석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하이엘프는 8강에서 떨어졌고 뎁데브도 마나유저 상급 수준의 힘이 한계인지 탈락하기 일보직전이었다.

로엘은 의자 팔걸이에 팔을 대며 턱을 괴었다.

“흐음.”

이미 암살자탐색 작전은 끝났지만 누가 암살자였는지 생각하고 있었다.

소거법을 적용하면 결국 장외로 탈락한 도디가 암살자였다는 게 된다.

도디가 어머니 때문에 대회에 참가했다는 건 이미 증명되었는데 어떻게 된 걸까.

아무래도 도디는 그저 조직에게 이용당하고 있었을 뿐이었던 모양이다.

도디의 어머니를 치료한 후 빌로스 왕국으로 데려오라고 해놓은 상태다.

그러니 도디가 어머니와 재회할 수 있게 데리고 있어 두고 싶었다.

이대로 놔두면 또 조직이 이용하려 들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대회에서 탈락한 다음에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로엘이 침음을 흘리자 레이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조직의 암살자가 누구였는지 생각하고 있었어.”

“이제 와선 딱히 의미 없잖아.”

“그렇긴 하지.”

레이아는 자신과 함께 있는데도 딴 생각을 하고 있는 로엘을 보며 볼을 부풀렸다. 그래서 일부러 로엘의 손을 깍지 끼듯 잡으며 힘을 주었다.

“나 여기 있거든?”

“그럼 있고말고. 누가 없데?”

“네가 딴 생각만 하니까 하는 말 아냐. 게다가......”

뭔가 말하려던 레이아가 민감한 주제인 듯 말꼬리를 흐렸다.

레이아는 혼자 발을 동동 구르며 고민하다가 우물쭈물거리며 말을 꺼냈다.

“게다가 난 하니온 왕국에 얼굴 비추러 가야하니까 당분간 못 보잖아.”

멋대로 하니온 왕국에서 벗어난 이후로 한 번도 울크에게 얼굴을 비추지 않았던 레이아다.

결혼을 하면 친정에 들리기 힘들기 때문에 결혼 전에 한 번 들렀다 올 생각이었던 거다.

그래서 떠나기 전까지 로엘 성분을 충전해두고 싶은데 로엘이 자꾸 딴 생각을 하니 심통난 것이었다.

로엘은 레이아의 뾰루퉁한 얼굴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가기 전에 얼굴 많이 봐둬야겠네. 어이쿠, 뾰루퉁한 표정이니까 없는 내내 이 표정만 생각나겠어.”

레이아는 못 당하겠다는 듯 피식 웃었다.

“하여간 심술쟁이라니깐.”

///

“흥흥흥~.”

루엔은 무표정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왕궁 뒷문을 향해 걷고 있었다.

메이아가 다소곳한 걸음걸이로 루엔을 따르는 중이었다.

뒷문을 지키고 있던 병사가 루엔을 보곤 경례자세를 취하였다.

“안녕하십니까, 루엔 님.”

루엔은 손을 번쩍 들며 인사에 응해주었다.

“안녕.”

“오늘은 마법진 실험을 하시려는 겁니까?”

“응. 문 열어줘.”

“알겠습니다.”

왕궁병사가 루엔이 나갈 수 있게 뒷문을 열어주었다.

루엔과 메이아가 먼저 뒷문을 통해 바깥으로 나갔고, 뒷문을 지키고 있던 4명의 병사 중 2명이 호위로 따라붙었다.

이전에 뒷산에서 마법진 실험을 하다가 습격당한 이후로 뒷산에 나갈 땐 무조건 2명 이상이 따라붙기로 했다.

루엔 일행은 항상 마법진 실험을 하는 산중턱 공터에 이르렀다.

왕궁병사 두 명은 루엔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공터 가장자리에서 창대를 들고 대기했다.

메이아는 루엔이 마법진 실험을 한 이후에 바로 티타임을 가질 수 있게 돗자리를 깔아두었다.

루엔은 혼자 공터 중앙에 서서 책 한 권을 바닥에 놓았다.

거기에 마법진수첩에서 찢어낸 종이 하나를 책에 붙였다.

그러자 책이 둥실둥실 떠오르면서 허공을 배회했다.

느리지만 생명체를 감지하여 우회하는 움직임을 가지고 있었다.

이전에 로엘에게 혼났던 도서정리마법진을 개량한 것이었다.

혼났던 게 계속 마음에 걸려 짬짬이 손을 본 끝에 개량에 성공하였다.

그런데 돌아갈 책장이 없다보니 책이 느릿느릿 움직이다가 수풀 쪽으로 이동했다.

루엔은 책을 잡기 위해 수풀 쪽으로 다가갔다.

수풀 바로 앞에서 책을 잡아낸 루엔은 한 번 더 실험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실험을 반복하면서 부유시간이나 지속시간, 또 다른 문제점이 없나 확인해봐야 했다.

돌아가려고 몸을 돌린 찰나.

수풀 사이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끼잉.”

루엔은 귀를 쫑긋 세우며 소리에 반응하였다.

소녀의 감성을 자극하는 애절한 울음소리에 수풀 쪽으로 다시 몸을 돌렸다.

수풀 너머로 고개를 내밀어보았는데 묘한 생물체가 엎드려 있었다.

몸길이 3미터는 될 법한 회색 늑대가 수풀 너머의 움푹 파인 지대에 엎드려 있는 게 아닌가.

회색 늑대의 입에서 작고 구슬픈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끼잉~.”

루엔은 반쯤 감겨 있는 눈꺼풀을 깜빡이며 회색 늑대를 살펴보았다.

그녀는 회색 늑대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로엘이 왕궁에 복귀한 이후 바깥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기 때문이었다.

분명 이름이 도디라 했었다.

“도디 맞지?”

도디는 고개를 들며 물기 어린 눈동자에 루엔의 모습을 담았다.

“나 도디 맞다. 어떻게 알았나?”

“로엘이 얘기해줬어.”

“로엘? 모르는 사람이다.”

“바깥에서 무슨 이름 썼다더라. 아, 로이엘.”

“로이엘은 안다. 좋은 친구다. 아닌가? 나쁜 친구였나. 모르겠다.”

“로이엘이 로엘이야. 로엘은 좋은 사람이고. 근데 너 왜 여기 있어?”

왕궁병사들이나 메이아가 보기에는 루엔이 수풀 근처에서 땅을 보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에 도디와 대화 중이라곤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도디는 엎드린 채로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했다.

아픈 어머니 때문에 마나대회에 참가했는데 탈락하여 어머니를 구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캉강이란 자가 있어야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데 그가 나타나지 않아 곤란해졌다고 한다.

사정을 들은 루엔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몇 번 흔들다가 무언가 기억났다는 듯 말을 꺼냈다.

“도디 이야기 알아. 로엘이 얘기해줬어. 도디 어머니 도와주려고 로엘이 의사 보냈으니까 괜찮아.”

이번에는 도디가 한참 동안 고개를 흔들다가 겨우 이해한 듯 밝은 표정을 지었다.

“진짜로?”

“진짜로. 로엘 착해.”

“로이엘이 로엘. 로엘은 국왕. 국왕은 착한 사람. 나쁜 사람 아니라 착한 사람이었다.”

기뻐하던 것도 잠시, 도디는 큰 잘못이라도 한 양 낙담하였다.

도디의 귀와 꼬리가 아래로 접히는 것을 본 루엔이 의문을 표했다.

“왜 그래?”

“나 이 나라 국왕 나쁜 사람이라고 들었다. 그래서 마나대회 우승한 다음에 죽이려 했다. 근데 착한 사람이었다.”

“이상하네. 로엘이 암살자 건은 끝났다고 했는데.”

“착한 사람 죽이려 했으니까 벌 받아야 한다. 로엘한테 사과하고 벌 받을 거다.”

도디가 자수하기 위해 일어나려 하자 루엔이 수풀 안으로 손을 쑤욱 집어넣어 머리를 눌렀다.

“기다려.”

도디는 본능적으로 엎드리면서 기다려 자세를 취했다.

자기 명령대로 움직이는 동물을 본 루엔은 묘한 달성감을 느꼈다.

불쌍한 동물이다.

내가 지켜줘야 해.

지켜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 생각하자 도디가 자수하게 놔둘 수 없었다.

루엔은 도디를 대기시킨 후 메이아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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