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7 5-3. 끄나풀 =========================
검은로브 사내 쪽도 이름을 밝히고 싶진 않은지 유연하게 대처했다.
“의뢰인이라고 해두지요.”
“이름을 밝히지 않는군. 꺼림직한 일이라도 맡길 생각인가 보지?”
“제가 아까 좋은 이야기를 가져왔다고 했을 텐데요? 이걸 보시면 로이엘 씨도 대화를 하고픈 마음이 들 것입니다.”
검은로브 사내가 품 안에서 반으로 찢어진 책자를 꺼냈다.
책자의 표지 부분이 얼핏 보였다.
표지 부분에 대륙공용어, 고대어가 아닌 아예 새로운 문자가 적혀 있었다.
로엘이 책의 정체를 바로 알아차리지 못하자 검은로브 사내가 설명을 덧붙였다.
“검황의 마나호흡법이 담긴 책입니다. 이제 대화를 나눌 생각이 드셨나요?”
검황의 마나호흡법이라면 로엘도 들어본 적 있었다.
그 누구도 해석할 수 없었고, 그 누구도 도달한 적 없다는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로 가는 비법이 담긴 책자 아니던가.
생쥐가 제 발로 찾아온 것도 모자라 쥐구멍 안에 감추어져 있던 보물까지 들고 나왔다.
로엘은 일부러 놀란 표정을 지어주며 대화에 응하는 척했다.
“재미있는 물건을 들고 왔군. 들어와라.”
검은로브 사내가 방 안에 들어왔고 로엘이 방에 놓인 탁자를 끌어다 자리를 만들었다.
로엘은 자기가 앉을 의자를 침대 옆에 놓았고 검은로브 사내가 앉을 의자는 불씨가 남아있는 화로 옆에 놓았다. 그리곤 자연스럽게 화로 옆에 놓인 의자를 권하며 입을 열었다.
“어디 한 번 용건을 들어보도록 하지.”
“복잡한 사정은 건너뛰고 단도직입으로 말하도록 하죠. 대회 우승 이후에 로엘 국왕을 암살해주십시오.”
로엘은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암살 대상에게 암살 의뢰를 하는 꼴 아닌가.
가까스로 태연함을 가장하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로엘 국왕을? 이유를 물어도 될까?”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검황의 책자를 교섭용으로 쓸 정도로 말입니다. 받아들이신다면 책의 후반부를 드리겠습니다. 전반부는 암살 성공 이후에 마저 드리도록 하죠. 암살에 성공하시면 저희 쪽에서 빼내드리겠습니다. 그 부분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난 아직 의뢰를 받아들인다고 하지 않았어.”
“검황의 책자입니다. 마나 익스퍼트를 뛰어넘어 전설의 경지에 도전해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확실히 검황의 책자는 매력적이지. 하지만 로엘 국왕은 자신을 암살하러 오기 보단 그쪽을 잡아달라는군.”
“네?”
검은로브 사내가 무슨 말인지 몰라 잠깐 당황했을 때.
로엘이 탁자 아래로 발을 뻗어 검은로브 사내의 의자 옆에 있는 화로를 차올렸다.
화로가 튀어 오르면서 담겨 있던 불씨와 재가 검은로브 사내를 덮쳤다.
아래에서 위로 튄 것이기 때문에 후드 안쪽으로 불씨가 한가득 들어갔다.
검은로브 사내는 얼굴 가득 번지는 열기에 얼굴을 감싸 쥐며 몸을 비틀었다.
“크아악!”
그와 동시에 로엘이 탁자 위로 몸을 날려 검은로브 사내를 덮쳤다.
로엘이 검은로브 사내의 몸을 밀면서 의자가 뒤로 밀려 넘어졌고, 그대로 그의 위에 올라타면서 검을 뽑아들었다.
로엘은 미스릴 검이 검은로브 사내의 손등을 찍어 눌렀다.
미스릴 검의 날카로운 검 끝이 검은로브 사내의 손등을 관통하여 나무바닥에 박혔다.
콰직!
“끄헉!”
미스릴 검에 의해 검은로브 사내의 손이 바닥에 고정되었다.
로엘은 양쪽 무릎으로 검은로브 사내의 양쪽 어깨를 눌러 상위 포지션을 점하곤 변장도구를 벗었다.
중년사내의 모습에서 본래의 미청년 모습으로 돌아왔다.
고통에 몸부림치던 검은로브 사내가 로엘의 모습을 확인하곤 입을 뻐끔거렸다.
놀라서 말조차 나오지 않는 상태였다.
설마 왕이, 국왕이라는 작자가 자기자신의 목숨을 미끼로 함정을 팠단 말인가.
그것도 모자라 안락한 왕궁 안의 생활을 뒤로 하고 왕궁 바로 코앞에서 일반인처럼 지냈다고?
일부러 모욕을 받기 쉬운 실버급 용병으로 분장해가면서?
검은로브 사내가 허둥지둥하는 사이 로엘은 깊게 눌러 쓴 후드를 뒤로 넘겼다.
후드가 뒤로 넘어가며 검은로브 사내의 얼굴이 드러났다.
새파란 핏줄이 비칠 정도의 창백한 피부, 붉은 눈동자와 날카로운 송곳니.
뱀파이어였다.
로엘은 손을 뻗어 침대 옆에 걸쳐 두었던 철검을 집어 들었다.
검을 뽑아 마나를 부여한 후 검은로브 사내의 목에 대었다.
“시간은 많으니까 차근차근 얘기를 해보자고. 이름부터 읊어봐.”
“내가 말할 것 같으... 으윽!”
아직 저항의 기미가 남아있는 걸 본 로엘이 철검으로 미스릴 검의 검면을 가볍게 두드렸다.
미스릴 검이 좌우로 흔들리면서 상처를 더욱 벌렸다.
검날이 손 안의 뼈를 까득까득 긁어대었기에 고통은 몇 배로 불어났다.
“크아아악!”
이만큼 비명소리가 울려 퍼지면 여관 안의 다른 사람들이 반응할 수밖에 없다.
가장 먼저 로엘의 방에 찾아든 건 카넨이었다.
“전하! 무슨 일이십니까?”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 온 카넨은 로엘이 어떤 사내를 제압한 걸 보게 되었다.
로엘은 소란이 생길 것을 염려하여 재빨리 카넨에게 명령을 내렸다.
“카넨. 사람들을 통제해줘. 지금부터 이놈에게 이것저것 물어볼게 많거든.”
“네, 알겠습니다.”
검은로브 사내는 로엘이 명령을 내리느라 잠깐 한눈을 판 사이를 노려 달아나려 했다.
‘지금 달아나야 한다!’
뱀파이어는 선천적으로 안개, 박쥐, 그림자로 변할 수 있다.
손이 검에 꿰뚫려 있다 해도 그림자로 변하면 빠져나올 수 있었다.
검은로브 사내는 그림자로 변하여 로엘의 아래에서 탈출하려 했다.
그러나 누르고 있는 감각이 사라지자마자 로엘이 반응하였다.
“어딜 도망가려고!”
로엘은 들고 있던 철검을 둥글게 휘둘렀다.
검은로브 사내가 둥근 그림자가 되었는데 그림자 주변의 바닥이 잘리면서 바닥이 아래로 꺼졌다.
아래는 창고였기에 둥글게 잘린 바닥이 나무상자가 쌓여 있는 곳에 떨어지면서 나무상자가 부서졌다.
더하여 로엘은 화로를 맨손으로 집어 들며 잘린 바닥을 통해 아래로 떨어졌다.
뱀파이어의 약점은 열기다.
열기를 쬐면 변신이 풀려버린다.
그래서 로엘은 집어든 화로를 그림자 위에 죄다 쏟아 부었다.
처음보다 훨씬 많은 불씨를 뒤집어쓰게 되면서 그림자 변신이 풀렸다.
아까는 얼굴에만 가벼운 화상을 입었었는데 지금은 불씨와 재를 한껏 뒤집어쓰면서 심한 몰골이 되었다.
로엘은 얼굴을 감싸 쥐며 뒹굴고 있는 검은로브 사내를 보며 아까와 다른 쪽 손에 검을 박아 넣었다.
괜히 도망가려다가 상처만 늘린 꼴이 되었다.
로엘은 웃음기가 가신 얼굴로 검은로브 사내의 멱살을 잡으며 말했다.
“도망칠 테면 도망쳐봐. 밤새도록 반복할 수 있으니까.”
더 이상 도망은 무의미하다 여긴 검은로브 사내는 고개를 추욱 늘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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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로엘은 카넨과 함께 크라넬의 숙소로 자리를 옮겼다.
크라넬은 아예 집 하나를 통째로 빌렸기 때문에 남의 눈 신경 쓰지 않고 얘기하기에 좋았다.
혹시 몰라 왕궁에서 대기 중이던 바보삼형제를 숙소 바깥에 배치하여 도주경로까지 완벽하게 차단하였다.
크라넬의 숙소 안에서 로엘의 질문이 시작되었다.
물론 처음 몇 번의 질문엔 거짓 대답을 하였으나 로엘이 몇 번이나 손을 쓴 덕에 곧바로 순순히 대답하게 되었다.
검은로브 사내의 이름은 고우트이며 조직의 연락책 및 현장관리를 맡고 있다고 한다.
중요한 건 바로 조직의 정체였다.
로엘은 조직의 정체에 대해 물었다.
“너희들 조직에 대해 말해봐. 거짓말은 통하지 않은 거 알지?”
로엘의 손에는 검이 꽂혀 있는 검집이 들려 있었다.
고우트가 조금이라도 거짓을 고하는 기미가 보이면 검집이 고우트의 몸 어딘가를 가격할 것이다.
무려 마나 마스터가 휘두르는 검집이다.
로엘의 손에 들려 있는 건 검집이 아니라 묵직한 둔기라도 봐야 옳았다.
이미 몇 번의 타격을 받은 터라 고우트는 검집만 봐도 몸서리가 쳐질 정도였다.
고우트는 사시나무처럼 떨며 로엘의 질문에 대답했다.
“조직은... 대륙의 힘을 빼놓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혼란을 일으키려 한 거였군. 어디 누가 대륙정벌이라도 꿈꾸고 있나 보지?”
“망자섬의 그 분이 대륙정벌을 노리고 있습니다.”
“망자섬?”
대륙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지형이나 특색을 기억하고 있는 로엘이다.
그런 로엘조차도 처음 듣는 지명이었다.
고우트의 말에 의하면 수백 년 전 용마전쟁 이후 마계로 돌아가지 못한 마족들이 있었다고 한다.
여기까진 로엘도 안다.
뱀파이어란 종족도 그 중 일부이나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면서 에메랄드 산맥에 틀어박힌 거니까.
다만 나머지 마족들은 인간에게 쫓겨 가이아 대륙을 뜰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도망친 곳은 가이아 대륙에서 남쪽으로 한참 가야 겨우 도달할 수 있는 안개 낀 섬이었다.
마족들은 빈 섬에 망자섬이란 이름을 붙이고 숨죽이며 살고 있었다.
그런데 10년 전쯤에 인간의 모습을 한 고위마족 한 명이 나타나 대륙을 차지하잔 제안을 해왔다.
인간계에 남은 고위마족은 없던 터라 사실상 살아남은 마족 중 가장 강한 힘을 가진 자나 마찬가지였다.
그를 구심점으로 마족들이 뭉쳤고 가이아 대륙 5왕국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대륙 내에 조직을 만들어 갖은 공작을 펼쳤던 것이다.
원래라면 인간들끼리 수많은 피를 흘리고 있어야 했으나 로엘에 의해 번번이 실패하여 조직의 입지가 많이 줄어든 상태였다.
로엘이 조직의 계획을 저지할 때마다 조직도 차츰차츰 힘이 깎여나가고 있던 것이었다.
현재 망자섬의 고위마족은 조직의 무능함을 탓하며 암중공작 작전을 폐지하기 직전이라고 한다.
흑막이 용마전쟁의 잔재였음을 알게 된 로엘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살려주지. 돌아가서 고위마족이란 작자에게 전해. 허튼 수작을 한 대가는 톡톡히 치르게 될 거라고.”
로엘이 검집에서 검을 뽑아 고우트를 묶어둔 사슬을 잘라내었다.
고우트는 정말 살려주나 싶어 눈만 끔뻑였다.
믿지 못하는 고우트를 향해 로엘이 재차 말을 꺼냈다.
“못 들었나? 살려준다니까.”
타박상 투성이지만 박쥐로 변해 돌아갈 정도의 기력은 남아있었다.
고우트는 로엘의 눈치를 보며 박쥐로 변하였다.
정말로 살려주는 건지 농락인지 몰라 날아오르길 주저하고 있는 가운데 로엘이 창문까지 열어주었다.
“가봐.”
살려준다는 말이 진짜임을 깨달은 고우트는 허겁지겁 날갯짓을 하여 창문 바깥으로 날아갔다.
고우트가 나간 걸 확인한 로엘은 곧장 바보삼형제를 불렀다.
“삼형제.”
천장에서 검은 옷을 입은 세 명의 사내가 떨어져 내리며 착지와 동시에 한 쪽을 무릎을 꿇었다.
“네. 말씀하십시오.”
“놈을 따라가서 정확하게 망자섬이 어디 있는지 알아봐.”
“네.”
망자섬이라는 게 있었다면 용왕 블라스크가 진작에 말해줬을 거다.
블라스크조차 몰랐던 곳이라면 용왕의 권능이 닿지 않는 멀고 외진 곳에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고우트가 보고를 위해 돌아가는 것을 쫓아가 망자섬의 위치를 알아낼 생각이었다.
바보삼형제가 쏜살 같이 달려 나가며 고우트를 미행하기 시작했다.
방 안에는 로엘과 카넨, 크라넬만이 남게 되었다.
카넨과 크라넬은 마족이니 뭐니 하는 게 실감되지 않아 멍하니 서있었다.
로엘은 두 사람 쪽으로 몸을 돌리며 기다란 미소를 지었다.
“일단 바보삼형제가 망자섬 위치를 알아올 때까진 대기해야겠구만. 이제 둘 다 어떻게 할 거야? 난 목적을 이뤘으니 기권을 할 생각이야.”
처음부터 조직의 끄나풀을 잡기 위해 연 마나대회이니 더 이상 로엘이 마나대회에 참가할 이유는 없었다.
크라넬도 로엘을 돕기 위해 참가한 것이라 기권하기로 했다.
다만 카넨은 마나대회를 끝까지 소화하기로 하였다.
이참에 오명 반납을 넘어 자신과 킬더 왕국의 명예를 드높일 수 있는 기회니까 우승까지 노려보기로 했다.
다음날 그란데 백작을 쓰러뜨린 다크호스가 기권함으로서 테헤란에 온갖 소문이 나돌았지만 카넨이 새로운 우승주역으로 주목 받으며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카넨의 미모와 실력은 마나대회의 인기요소로 자리 잡기에 충분했고, 여전히 마나대회가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 로엘은 검황의 책자를 품은 채 왕궁으로 복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