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5 5-2. 시끌벅적 본선 =========================
‘저 어리버리한 건 진짜인가. 아니면 방심시키기 위한 수작인 건가.’
너무 어리버리해서 제대로 싸울 수나 있을까 싶었다.
그러나 도디가 예선전에서 5분 이상 넘긴 시합이 없다는 걸 알아냈기에 고민될 수밖에 없었다.
어리버리한 척하면서 방심을 유도하는 거거나, 어리버리함을 보충하고도 남을 힘을 지니고 있거나.
뎁데브로선 차라리 전자였으면 했다.
전자라면 뎁데브 본인이 방심하지만 않으면 되는 거니까.
이윽고 더프가 동전을 튕겼으며 동전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시합이 시작되었다.
뎁데브는 단검 두 개를 각각 양손에 거꾸로 쥐며 도디를 쳐다보았다.
시합 시작 직후의 도디를 본 순간 뎁데브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시합 전의 어리버리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투쟁심 가득한 야수 한 마리가 서있는 게 아닌가.
반드시 이기고 말겠다는 집념이 도디의 전의를 한껏 끌어올리고 있었다.
뎁데브를 보는 눈은 시합 상대를 보는 게 아니라 야생 속 사냥감을 보는 듯 야성이 넘쳐났다.
더하여 도디의 양팔에 마나가 둘러졌다.
도디는 무기가 아닌 자신의 팔에 마나를 부여하여 싸우는 타입인 마나유저였다.
자신의 신체를 무기로 쓰는 만큼 부상의 위험은 높아지지만 무기에 마나를 부여하는 것보다 훨씬 쉽기 때문에 마나는 있는데 마나운용능력이 떨어지는 자들이 쓰는 방법이었다.
도디가 땅을 쿵쿵 밟으며 뛰어와선 주먹을 냅다 내리꽂았다.
떨어지는 주먹의 기세가 예사롭지 않음을 느낀 뎁데브는 마나를 끌어올리며 옆으로 빠져나갔다.
소닉 고블린 특유의 속도가 발휘되면서 잔상이 남을 정도의 움직임이 펼쳐졌다.
뎁데브가 유유히 옆으로 빠져나가면서 그가 서있던 자리에 도디의 주먹이 떨어졌다.
쿵!
이것이 과연 주먹이 떨어진 거라 할 수 있을까.
도디의 주먹이 땅바닥을 치면서 땅바닥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생겨났다.
흡사 주먹 크기의 철구가 떨어진 것 같았다.
주먹에 씌운 마나의 강도는 동급 마나유저의 무기 정도는 버텨낼 수 있으니 사실상 단순 무력 하나 만큼은 마나유저 상급 중에 최고라 할 수 있었다.
도디를 이기려면 아예 마나의 밀도에서 앞서거나 한 번도 공격에 맞지 않아야만 했다.
뎁데브는 후자를 골랐다.
‘내가 가진 건 속도밖에 없어. 전부 피한다는 생각으로 싸우는 수밖에.’
뎁데브가 속도를 높이며 쉴 새 없이 도디의 주변을 어지럽혔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잔상을 넘어 아예 뎁데브가 여러 명으로 늘어난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할 정도였다.
도디는 사방으로 뛰어다니는 뎁데브를 잡는다고 뎁데브의 잔상이 나타나는 곳마다 주먹을 휘둘렀다.
“여기다!”
쿵!
“아니 여긴가?”
쿵!
“잡았다!”
쿵!
뎁데브가 서있는 자리마다 주먹을 내리꽂아보았지만 번번이 빈 땅만 두드리는 도디였다.
도디의 공격이 빗나갈 때마다 뎁데브의 단검이 도디의 몸을 긁었다.
드그그그!
뎁데브의 단검이 휘둘러 질 때마다 돌 긁는 듯한 마찰음이 새어나왔다.
도디의 몸에도 일정 수준의 마나가 부여되어 있어 안 그래도 두꺼운 가죽에 단단함까지 더해졌다.
그래서 단검이 파고들지 못하고 애꿎은 회색털만 잘라냈다.
‘이래서야 끝이 없겠어. 단단하지 않은 부분이라면 얼굴 쪽인데...... 하지만 대회 규정상 얼굴은 노릴 수가 없으니 곤란하군.’
이대로 속도와 힘의 대결을 유지하며 장기전으로 끌고 갈 수밖에 없었다.
헌데 두더지 잡듯 뎁데브를 쫓아다니던 도디가 문득 동작을 멈추었다.
도디는 멈춰 서선 두 손을 땅바닥에 짚었다.
그런가 싶더니 그 거대한 몸집을 그대로 지닌 회색늑대로 변하는 게 아닌가.
웨어울프는 보름달이 뜨는 밤에만 늑대로 변하게 된다.
그런데 도디는 자의로 늑대의 모습을 갖출 수 있는 것이다.
뱀파이어의 피와 웨어울프의 피를 반반씩 물려받은 도디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안개, 박쥐, 그림자로 변할 수 있는 뱀파이어의 변신능력 중 ‘자유자재로 변신’하는 특성과 보름달이 뜨는 날 밤 ‘늑대’가 되는 웨어울프의 특성이 합쳐져 ‘자유자재로 늑대로 변신’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된 것이다.
웨어울프는 늑대로 변하면 모든 신체능력이 3배로 증가한다.
도디는 낮게 으르렁거리며 가느다란 눈동자를 움직였다.
전후좌우로 움직이던 뎁데브를 보다가 한순간을 노려 옆으로 몸을 날렸다.
정확히 뎁데브가 뛴 방향이었다.
뎁데브는 자신에게 따라붙은 도디를 보곤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말도 안 돼! 내 속도를 따라오고 있다고?’
곰보다 큰 회색늑대가 번개 같은 속도로 따라붙은 상황이었다.
뎁데브가 아무리 방향을 틀어도 개과 특유의 유연함을 이용하여 쉽게 방향전환을 하는 도디였다.
이윽고 완전히 뎁데브와 동일선상에 서게 된 도디는 마나가 부여된 앞발을 휘둘렀다.
이미 도디의 앞발에는 날카로운 발톱이 튀어나와 있어 변신 전이 일반 철구였다면 지금은 가시 철퇴나 마찬가지였다.
도디의 앞발이 뎁데브의 몸에 닿으려던 찰나.
뎁데브가 경기장 내벽에 발을 디디며 턴을 하듯 방향을 틀었다.
도디도 똑같이 하려고 벽을 박차려던 찰나.
도디의 몸이 3시 방향 입구에 부딪치면서 입구의 쇠창살문이 박살났다.
콰지직! 쿵!
뎁데브는 내벽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는데 도디는 3시 방향 입구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기에 생긴 일이었다.
뎁데브의 속도를 따라 잡으려고 몸에 한껏 가속도를 붙인데다 공격을 위해 뎁데브만 보고 있던 터라 인지하지 못하고 말았다.
경기 규정상 원형 경기장 바깥으로 나가면 장외로 판정되었다.
더프는 냅다 경기장 안으로 들어와선 도디의 위치를 확인했다.
도디의 몸은 쇠창살문을 뚫고 통로 안쪽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있었다.
전투에 집중하다 보니 생긴 일이라지만 규정은 규정이었다.
지형지물과 상황을 잘 이용하는 것도 마나대회의 일부다.
뎁데브가 의도한 거라면 그가 영리한 것이고, 의도하지 않았다면 운이 좋았다고 볼 수 있었다.
어느 쪽이든 재고의 여지가 없는 상황이었다.
더프는 헐레벌떡 경기장으로 돌아오는 도디를 보며 안타까운 표정으로 판정을 내렸다.
“장외! 승자는 뎁데브! 도디 씨 안타깝게 되었습니다.”
캉강은 탈락 이후 여관방에 틀어박혀 덜덜 떨고 있었다.
설마 자신이 64강에서 탈락할 줄은 몰랐다.
있는 돈 없는 돈 털어 꼼수까지 준비했는데 전부 무용지물이었다.
돈이 아까워 죽겠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이 떨어진 다음에 곧바로 도디까지 떨어지고 만 것이다.
분명 조직에서 셋 중 한 사람은 반드시 우승해야 한다고 했었다.
캉강이 탈락하더라도 도디가 우승하여 로엘 암살에 성공한다면 조직도 최소한의 목적은 달성했으니 캉강이나 리비노가 떨어졌다 해서 뭐라 하진 않았을 거다.
허나 셋 다 탈락하면 얘기가 다르다.
셋 다 탈락했으니 바로 조직의 처분이 시작될 것이다.
현재 리비노는 부상 때문에 옆방에서 죽은 듯이 누워 있고, 도디는 실의에 빠져 테헤란 뒷산에 틀어박혀 있었다.
리비노는 이미 용병으로선 죽은 거나 마찬가지이니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일 테고, 도디는 조직에 대해 전혀 모르는데다 단순히 제 어미 때문에 나선 것이니 활용가치가 있다 여겨 살려둘 지도 몰랐다.
하지만 캉강은 달랐다.
사지멀쩡한데다 신비의 베일을 도로 팔면 자금도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다.
아직 죽고 싶지 않았다.
도망칠까?
조직이 세 명의 탈락소식을 언제 전달 받을지 모르니 도망칠 거면 지금밖에 없었다.
그러나 캉강이 생각을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싸늘한 느낌이 목덜미를 타고 흘렀다.
언제 나타났는지 검은로브 사내가 뒤에 서있었다.
코까지 푹 눌러쓴 후드 아래로 스산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전원 탈락했더군.”
“흐억! 고우트 님!”
고우트라 불린 사내는 로브 안쪽에서 작은 낫을 꺼냈다.
그가 손으로 낫을 한 번 빙글 돌리자 낫이 커지면서 섬뜩한 무기가 되었다.
고우트는 기다란 낫을 캉강의 목에 드리우며 말했다.
“네놈들이 우승하지 못하면 최소한 도디라도 밀어주라고 했을 텐데?”
“허, 허억! 사, 살려주십시오. 어, 어쩔 수 없었습니다. 대회의 수준이 너무 높아서......”
변명을 하면 할수록 고우트의 낫이 캉강의 목에 점점 더 가까워졌다.
날 끝이 캉강의 목 피부에 살짝 닿으면서 그의 목에 붉은 금이 생겨났다.
캉강의 목을 베려던 고우트는 잠깐 뜸을 들이다가 낫을 거두어들였다.
캉강은 새파랗게 질린 안색으로 겨우 숨을 내쉬며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허어허어.”
고우트가 쓰러진 캉강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확실히 예상 이상으로 대회수준이 높은 모양이더군.”
“알아주시는 겁니까?”
“하지만 네놈이 무능하다는 건 변함없지. 대안을 준비해왔으니 네가 쓸모 있는 놈이라는 걸 증명해봐라.”
살아남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캉강은 발이라도 핥을 기세로 넙죽 엎드렸다.
“뭐든 시켜야만 주십시오. 그런데 대안이라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대안입니까?”
“아직 대회에 참가하고 있는 녀석들을 매수한다. 대회에 남아있는 놈들 중 우승후보를 읊어라.”
조직에서도 셋 다 탈락할 줄은 몰랐기 때문에 소식을 듣자마자 부랴부랴 온 것이었다.
그래서 고우트도 도디가 탈락할 정도의 수준 높은 대회라고 추측만 하고 있었을 뿐 참가선수에 대한 건 자세히 알지 못했다.
준비한 암살자를 투입하는 것보다 위험부담이 크고, 매수조건이 까다로워져서 출혈이 커지는 방법이라 최후의 방법으로 쓰려 했는데 이리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지금 기회를 놓치면 언제 또 로엘을 암살할 수 있을지 몰랐다.
이놈의 빌어먹을 빌로스 신하들은 매수조차 통하지 않는 놈들이라 사실상 이런 돌발 행사가 유일한 구멍인데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캉강은 모처럼의 만회찬스인지라 알고 있는 정보란 정보는 죄다 읊어댔다.
“지금 가장 유력한 우승후보는 로이엘이란 자입니다. 본선에서 그란데 백작에게 이겼습니다. 무기는 장검을 사용하고 검술은 대부분 흘려내는 방식을 사용한지라 정확하게 어떤 검술인지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다음 후보로는......”
“됐다. 그 로이엘이란 녀석에 대해서 좀 더 말하도록.”
“네? 매수할만한 사람은 좀 더 있습니다.”
“지금 내 말에 토를 단 건가?”
“아, 아닙니다! 로이엘이란 자는 실버급 용병입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오래 전에 제작된 실버 용병패를 소지하고 있다 합니다. 은거하고 있다가 경지를 끌어올려 세상에 나온 것 같습니다.”
캉강이 내뱉는 정보를 듣고 있던 고우트가 생각을 정리하며 낫을 도로 작게 만들었다.
그가 다시 입을 연 건 낫을 로브 안쪽으로 밀어 넣은 후였다.
“세상에 나오자마자 마나대회에 참가한 건가. 어지간히 튀고 싶었나보군. 그런 녀석일수록 이런 물건이 잘 먹히는 법이지.”
낫을 넣고 품에서 새로운 물건을 꺼냈는데 책자 하나가 딸려나왔다.
책자 표지에는 획을 정확하게 긋는 형식의 문자가 적혀 있었는데 대륙의 언어가 아닌지라 알아볼 수 없었다.
캉강은 조심스럽게 책자의 정체를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