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5 4-7. 암살자를 찾아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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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니온 왕궁 안의 루엔 공방.
공방 안에선 루엔이 밀폐용기에 담긴 마력의 결정을 살펴보고 있었다.
저녁 6시와 자정에만 루엔이 마나를 불어넣고, 아침잠이 많은 루엔을 위해 레이아가 아침 9시에 들러 마나를 불어넣는 식으로 로테이션을 돌리는 중이었다.
현재 8할쯤 완성되었으니 조만간 완성될 것 같았다.
루엔은 밀폐용기를 보자기로 감싸 아디만티움 금고에 넣었다.
드워프에게 맡긴 아디만티움의 일부로 만든 금고였다.
루엔이 금고를 닫고 한숨 돌리려는데 메이아가 찾아왔다.
루엔의 식사시간이라 식사를 가져온 것이었다.
메이아는 샌드위치 바구니를 빈 탁자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루엔 님, 식사시간이에요.”
“오, 샌드위치. 오늘은 누구 작품?”
“오늘 샌드위치는 제가 직접 만들었어요.”
“메이아 샌드위치 좋아해. 내가 좋아하는 거 잔뜩 넣어주니까.”
“항상 맛있게 드셔주니까 만드는 보람이 있네요. 마실 건 레모네이드랑 우유 중에 뭘로 하시겠어요?”
“레모네이드.”
루엔이 쪼르르 달려와 탁자 앞에 앉았다.
바구니 안에는 식빵 귀퉁이를 자른 두꺼운 샌드위치가 들어있었다.
레몬즙을 섞은 벌꿀을 바른 후 얇게 썬 스모크 햄과 부드러운 달걀부침, 삼각형으로 자른 치즈를 넣어 만든 샌드위치였다.
루엔의 요리리스트 중 랭킹 2위를 차지하는 음식이었다.
루엔은 샌드위치 모서리부분부터 크게 베어 물며 벌꿀과 스모크 햄의 조화를 실컷 음미했다.
“우물우물, 맛있어.”
“여기 레모네이드요. 차게 식혀뒀어요.”
“따뜻한 방에서 차가운 레모네이드. 엄청난 사치.”
“후후, 그렇네요.”
사치라고 할 만한 건 아니지만 루엔에겐 커다란 행복인지 연신 다리를 흔들어대고 있었다.
메이아는 루엔의 식사를 보조하기 위해 계속 옆에 서있었다.
막 한 개째를 먹어치운 루엔은 문득 메이아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걱정이라도 있어?”
“네?”
“평소보다 기운 없어 보여.”
“그냥... 전하께서 식사는 제대로 하고 계실지 걱정돼서요.”
왕궁 안에서 로엘이 자리를 비운 걸 아는 자는 레이아, 크라넬, 루엔, 메이아뿐이었다.
메이아로선 로엘 혼자 밥은 잘 챙겨 먹는지, 잠자리는 좋은 곳을 잡았는지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루엔은 두 개째 샌드위치를 오물거리며 말했다.
“돈 있으니까 알아서 잘 먹겠지.”
“의외로 길거리 음식 같은 걸 선호하시더라고요. 가끔씩 먹는 거야 상관없는데 삼시 세끼를 길거리 음식으로 드실까봐 걱정되네요. 어디서 지내는지도 궁금하고.”
현재 로엘이 어디서 지내는지 아는 사람은 크라넬 뿐인데 그 크라넬도 왕궁 바깥에서 따로 활동하고 있어서 물어볼 수가 없었다.
메이아의 고민을 들은 루엔이 간단한 해결책을 꺼내들었다.
루엔은 아직 샌드위치가 가득 담겨 있는 바구니를 번쩍 들며 말했다.
“이거 전해주고와.”
“네? 하지만 어디 있는지 모르는데요.”
“예선 중일 거야.”
“뭐 이제 막 예선전이 시작됐다고는 하는데......”
“대기 중일 테니까 찾기 어렵지 않을 거야. 다녀와. 메이아 기운 차려야해.”
로엘을 위한 것도 있지만 메이아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한 제안이기도 했다.
메아이로서도 옷을 갈아입고 도시락 하나 전해주는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았다.
가는 김에 식사 잘 챙기라는 말도 전하고 말이다.
메이아는 오랜만에 평상복을 입고 왕궁 바깥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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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엘은 카넨이 준비해온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간이 대결장을 돌아다녔다.
로엘의 차례까지 한참 남았으니 간이 대결장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실력을 살펴볼 생각이었다.
아직까진 눈에 띄는 용의자가 없는 가운데 5번째 간이 대결장이 눈에 들어왔다.
401번부터 500번의 번호표를 소지한 자들이 예선전을 펼치고 있는 곳이었다.
지금 막 블랑코가 간이 대결장 위에 올라선 상태였다.
블랑코의 대련이 시작될 참이었던 것이다.
한 쪽 팔을 잃은 이후 나름대로 결심을 하고 그란데 백작의 제자로 들어간 블랑코다.
그가 얼마나 성취를 이루었을지 궁금했다.
블랑코가 간이 대결장 위에 올라서자 다른 참가자들이 그를 보며 수군거렸다.
“외팔이 오크잖아. 정말 별의별 놈이 다 참가하는구만.”
“그래도 마나를 사용할 수 있으니까 참가한 거니까 체크해둬야겠지.”
“아서라 아서. 상대가 도돈이잖냐. 저 오크도 대진운이 꽝이구만. 하필 1차전부터 도돈을 만날 줄이야.”
블랑코의 맞은편에서 도돈이라 불리는 자가 간이 대결장 위로 올라섰다.
적발에 각진 턱, 오크 못지않은 근육량을 지닌 사내였다.
도돈의 팔에는 무수히 많은 5줄짜리 빗살 모양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게다가 그가 들고 있는 무기는 클레이모어를 개조하여 만든 거대한 톱날검이었다.
그는 대형몬스터 토벌의뢰만 받는 골드급 용병이며 대형몬스터를 잘게 썰어버리는 싸움방식 때문에 ‘몬스터분쇄기’란 별명을 지니고 있었다.
도돈은 팔뚝을 불끈거리며 십 수 개의 빗살 문양 문신이 앞으로 향하게 하였다.
“외팔이 녀석아. 이게 무엇인줄 아나? 바로 내가 썰어버린 대형몬스터 숫자란다. 험한 꼴 당하기 전에 미리 기권하는 게 어떻겠느냐?”
위협적인 무기와 살벌한 문신 앞에서도 블랑코는 태연하기만 했다.
“팔은 낙서하라고 달려 있는 게 아니지.”
겁주려다 되러 한 방 먹은 도돈은 팔뚝근육을 움찔거리며 톱날검을 앞으로 내세웠다.
“팔이 없어 겁대가리도 상실한 모양이구나. 본때를 보여주마.”
대회의 특성상 상대를 죽이면 실격이기 때문에 상대를 죽이지는 못한다.
대신 비웃음거리가 되도록 농락하는 것정도는 가능했다.
도돈은 골드급 용병인 자신이라면 외팔이 오크 한 명 정도는 가볍게 농락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진행위원이 간단한 주의사항을 말해준 후 곧바로 시작신호를 보냈다.
“상대를 죽이거나, 결투장 바깥으로 나가거나, 허용된 무기 이외의 것을 쓰면 실격입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진행위원이 물러나면서 블랑코와 도돈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시작하자마자 거칠 것 없이 블랑코에게로 돌격하였다.
도돈의 톱날검에 마나유저 중급 수준의 푸른 마나막이 둘러졌다.
반면 블랑코의 검은 평범한 길이를 지닌 철제 장검이었다.
블랑코가 검에 마나를 불어넣으면서 장검의 검날 주위로 옅은 마나막이 둘러졌다.
색깔이 파란색이라기 보단 하늘색에 가까웠다.
마나유저 초급이라는 증거였다.
그란데 백작에게 검을 배우면서 마나유저에 들어섰다 했는데 배운 기간이 길지 않은 만큼 아직 초급 수준에 불과했다.
블랑코의 검에 둘러진 마나를 본 도돈이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 주둥이를 나불거리더니 고작 초급 수준이었더냐.”
블랑코는 도돈이 조종하든 말든 어깨너비로 다리를 벌리며 검을 늘어뜨렸다.
구경꾼 사이에 섞여 대결을 지켜보던 카넨이 블랑코의 자세를 알아보았다.
“저건 전하의......”
자연스러우면서도 중심을 똑바로 잡는 발 위치와 힘을 뺀 상태에서 단숨에 가속도를 붙일 수 있는 자세.
로엘의 검술 기본자세와 너무나도 비슷했다.
그러는 사이 도돈이 톱날검을 위로 들며 아래로 내리치려 하였다.
“흐럇!”
기합을 터뜨리며 검을 휘두르려 한 것까진 좋았으나 블랑코의 검이 움직이는 게 더 빨랐다.
블랑코는 검을 위로 휘두르며 톱날검이 속도를 붙이기 전에 경합하였다.
카강!
체중이 실리기 직전에 블랑코의 검이 부딪쳐 왔기에 먼저 휘두른 도돈이 오히려 반걸음 밀려나게 되었다.
도돈은 주춤하더니 이번에는 톱날검을 옆으로 내밀어 가로로 그으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블랑코가 도돈의 톱날검이 속도를 붙이기 직전에 경합하여 반 수 이상의 우위를 점하였다.
어차피 마나유저의 싸움이라는 게 마나량 싸움인 터라 중급과 초급이 싸운다 해도 무기가 잘려나갈 정도의 차이가 나진 않는다.
경합 순간의 타격력이나 속도에서 차이가 날뿐.
다만 검을 휘두르기 직전에 힘을 주는 순간, 그 한순간은 무게중심이 뒤로 쏠리기 때문에 그 순간만 잘 포착하여 경합할 수 있다면 마나량에서 차이가 나도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물론 마나유저 상급과 초급 정도의 격차였다면 타격점이고 뭐고 블랑코가 밀렸겠지만 말이다.
카넨은 자세뿐만 아니라 로엘과 똑같은 기술을 쓰고 있다는 것에 놀랐다.
상대의 공격이 가속도를 붙이기 전에 경합하는 것.
수련여행 때 로엘이 카넨에게 썼던 기술과 완전히 똑같지 않은가.
“그란데 백작이 가르쳤다 하지 않았었나요? 그런데 어떻게 전하의 기술을......”
“아, 저거 원래 그란데 백작 가의 검술이야. 저번에 썼던 건 한 번 써보고 싶어서 써봤던 거고.”
로엘의 말에 카넨이 한 번 더 놀랐다.
이번에는 로엘의 센스 때문에 놀란 것이었다.
딱 봐도 쉬운 기술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데 그걸 즉흥적으로 떠올려서 썼던 것이었는가.
카넨은 혹시나 싶어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혹시 제 검술도 따라할 수 있으신 건 아니죠?”
“카넨의 검술이라면 뱅크스 검술이지? 하려면 못할 것도 없지.”
“저 검술만 익히는데 6년 걸렸어요.”
“많이 노력했네. 그 덕분에 지금의 자리에 오른 거겠지.”
“아니, 칭찬 들으려는 게 아니라 그게... 에휴.”
“왜?”
“아뇨,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나저나 너무 수비지향적인 것 같네요. 한 번도 먼저 공격한 적이 없어요.”
현재 십수 번의 경합이 오갔지만 그 중에서 블랑코가 먼저 공격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디까지나 도돈의 공격에 맞춰 반 수 빠른 경합을 이룬 후 밀어내고 있을 뿐.
검알못들은 도돈이 제 공격의 반동으로 밀려나는 거지 블랑코가 밀어낸다 생각하지 않았다.
“어이, 도돈! 가지고 노는 건 그쯤하고 얼른 끝내버리라고!”
“외팔이 오크 녀석아! 방어연습하러 나왔냐!”
허나 로엘만은 블랑코가 어떤 검술을 지향하고 있는지 알아볼 수 있었다.
“블랑코 녀석 남자구만.”
카넨도 슬슬 눈치 챘는지 로엘의 말에 동의했다.
“네, 좋은 전사네요. 한 번도 등 뒤로 검이 흘러가게 한 적이 없어요.”
블랑코는 대결 시작 이후 처음 위치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더하여 상대의 공격이 등 뒤로 지나가게 하지도 않았다.
현재 블랑코는 등 뒤에 지켜야할 누군가가 있음을 상정하고 싸우고 있는 것이다.
서른이 다 되어 검을 배우기 시작했기에 별다른 샛길을 통하지 않는 이상 특출나게 강해지진 못할 거다.
하지만 지키고 싶은 것이 있기에 최소한 자기보다 강적을 만나더라도 등 뒤의 것은 지킬 수 있는 스타일로 수련한 것이었다.
로엘은 타격점 선점 수법을 쓰고 있는 블랑코를 주의 깊게 쳐다보았다.
블랑코의 눈빛은 최후까지 버티자고 생각하는 자의 눈빛이 아니었다.
“한 방에 끝내겠군.”
로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블랑코가 도돈의 톱날검을 옆으로 쳐내며 그의 목에 검을 대었다.
“패배를 인정하겠나?”
마냥 수비만 하는 게 아니라 막아내면서 단 한 방에 적을 보낼 수 있는 기회를 노리고 있던 것이었다.
그야 말로 역습형 검술의 정석이라 할 수 있었다.
도돈은 자신이 마나유저 초급, 그것도 외팔이 오크에게 졌다는 게 믿기지 않는지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질 리 없다고 생각하는 건 망상이지만 목에 드리워져 있는 검은 현실이었다.
목에 겨누어진 검을 보던 도돈이 눈을 질끈 감았다.
“설마 초급 따위에게 질 줄이야.”
“숫자 세는 방법이 달랐던 거지. 자네도 쓰러뜨린 숫자보다 지킬 숫자를 세어보는 게 어떻겠는가?”
“흐음, 잘 모르겠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군. 네 승리다. 패배를 인정하마.”
항복선언이 나왔으니 결과가 정해진 셈이었다.
진행위원이 간이 결투장 위로 뛰어 올라와 블랑코의 승리를 선언했다.
블랑코에게 야유를 퍼붓던 구경꾼들은 이번엔 도돈에게 야유를 퍼부었다.
“야이 자식아! 마나유저 중급씩이나 되는 놈이 초급따위한테 지냐!”
“내 돈 물어내 임마!”
“당장 용병패 반납해라 쓰레기야!”
“검 만드는데 쓴 철이 아깝다! 대장간에 가서 녹여버려!”
워낙에 시끄러워 대부분이 알아듣지 못했지만 중간에 ‘내 돈 물어내’란 말이 섞여 있었다.
누군가가 대결승패를 가지고 도박을 한 것이다.
분명 대회를 개최할 때 참가자들의 승패로 도박하는 걸 금지했었다.
그런데 암암리에 도박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로엘은 남은 샌드위치를 입에 우겨 넣으며 말했다.
“우물우물, 카넨. 방금 돈 물어내라고 말한 녀석 잡아놔. 난 일단 예선전 참가하고 올게.”
“네, 알겠습니다.”
암암리에 도박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순간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로엘은 증인확보를 카넨에게 맡겨두고 제2 간이 대결장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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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로엘과 카넨의 모습을 계속 지켜보고 있던 이가 있었다.
평상복을 입고 챙이 넓은 리본모자를 쓴 메이아였다.
그녀 역시 로엘이 분장한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 알기에 애타게 찾은 끝에 로엘을 발견할 수 있었다.
허나 로엘에게 말을 걸지는 않았다.
메이아는 로엘의 옆에 카넨이 있다는 것, 로엘이 잘 만들어진 샌드위치를 입에 넣는 것을 봤기에.
그냥 뭐......
괜한 걱정을 한 것 같다.
돌아갈까.
터벅터벅
왕궁으로 돌아가는 걸음 속에서 메이아의 팔에 걸쳐진 따뜻한 바구니가 맥없이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