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될놈될-94화 (94/219)

00094 4-7. 암살자를 찾아라 =========================

그란데 백작과 블랑코는 각자 번호표를 받은 후 저희들끼리 대화를 나누었다.

“백작님은 시드 번호이시군요.”

“당연한 것 아니겠느냐. 이 내가 예선전부터 참가하면 열심히 수련한 자들이 무기 한 번 못 휘둘러보고 귀향해야 할 것 아니냐.”

“그건 그렇다 쳐도 왜 참가하신 겁니까? 기사 작위나 영지가 필요하신 것도 아니면서.”

“모르는 소리! 무려 전하께서 개최하신 첫 대회 아니더냐. 이 그란데가 우승하여 전하께 다시금 충성심을 확인시켜드려야지. 전하의 처음은 이 그란데의 것이니라.”

“말씀하시는 게 뭔지는 알겠는데 단어 선택 좀 신중하게 하시면 안 될까요?”

“뭐? 나의 깊은 뜻을 그리 생각하다니 아직 수련이 부족한 모양이구나. 처음부터 다시 수련시켜주리?”

“그것만은 제발 봐주십시오.”

그란데 백작과 블랑코가 대화를 나누면서 로엘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단순히 왕궁으로 돌아가려고 걷는 것이었지만 카넨을 알아보고 말을 걸어오면 혹시나 로엘을 유심히 쳐다볼 수도 있었다.

그래서 로엘과 카넨은 그란데 백작과 블랑코를 등질 수 있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그란데 백작과 블랑코가 로엘의 뒤로 지나갔다.

아니, 지나가는가 했는데 그란데 백작이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음.”

“왜 그러십니까, 백작님?”

“이상하군. 이 근처에서 전하의 기품이 느껴져.”

“에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지금 전하는 레이아 공주님과 함께 있지 않으십니까.”

“기분 탓인 건가. 하긴 몸이 안 좋으시다는 분이 이런 곳에 있을 리 없지. 병문안을 하고 싶은데 레이아 공주님이 막으시니 원.”

“너무 충성심이 깊으셔서 항상 전하께서 옆에 계신 것처럼 느껴지시나 봅니다.”

“허허, 이제야 뭘 좀 아는 것 같구나. 수행이 아주 헛된 건 아니었군.”

“네, 그러니까 로엘 전하 일대기 암기 수행을 다시 시킨다는 말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그란데 백작은 기분 탓이라 여기며 로엘을 지나쳤다.

등을 지고 있던 로엘은 이마에 맺힌 진땀을 훔치며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블랑코도 고생이 많겠구만.”

듣기로는 그란데 백작의 제자로 들어가 이제 막 마나유저 초급이 되었다고 한다.

그란데 백작의 실력이야 인정하지만 한동안 계속 고생할 듯싶다.

로엘은 앞으로도 계속 고생할 블랑코를 위해 행운을 빌어주었다.

먼저 번호표를 받은 이들이 3시간 동안이나 기다려 지쳐갈 즈음이 돼서야 번호표 배분이 끝났다.

진행위원회는 기다린 자들을 위하여 바로 예선전 추첨에 들어갔다.

각 번호를 적은 쪽지가 든 상자를 여럿 준비하여 총 10개의 상자를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했다. 각 상자 뒤에는 커다란 칠판이 준비되었다.

상자 옆에 선 진행위원들이 예선참가자들을 향해 외쳤다.

“이제부터 대진표 추첨을 시작하겠습니다! 각 상자는 100개의 숫자가 들어 있으니 오른쪽부터 1~100, 101~200, 201~300순으로 상자 안에 들어간 숫자의 사람들끼리 대진표가 짜여 집니다! 참가자 여러분은 자신의 번호가 포함되어 있는 상자 앞에서 대진표 추첨을 확인하십시오!”

번호표 배부도 무작위, 대진표추첨도 무작위인지라 빠른 진행을 위해 100단위로 나눈 것이었다.

로엘은 101번부터 200번까지 들어가 있는 상자 앞으로 갔다.

로엘 이외에도 해당 범위 내에 속하는 참가자 100명이 상자 앞에 모여들었다.

걔 중에는 아까 보았던 민둥머리 용병도 섞여 있었다.

상자 앞에 선 진행위원이 번호를 뽑아 칠판 앞에 서있는 자에게 번호를 알려주었다.

“132!”

번호를 들은 칠판 앞 사내가 위에서부터 차례차례 숫자를 적었다.

‘ooo vs ooo’식으로 말이다.

칠판이 절반쯤 찼을 때 로엘의 번호가 불려졌다.

“156!”

로엘의 번호가 적힌 후 바로 옆에 189번이 적혔다.

다들 번호표를 주머니 속에 넣고 있는 터라 누구 번호인지 알 수 없었다.

로엘로선 상대가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타종족이면 실력을 가늠해볼 것이고, 인간이라면 재빨리 끝내버리면 그만이었다.

대진표 추첨이 끝나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대진표 추첨을 끝낸 진행위원은 곧바로 예선전을 알렸다.

“적힌 순서대로 예선전을 진행할 겁니다. 맨 처음에 불렸던 번호표 소지자들은 2번 간이 대결장으로 이동해주십시오. 나머지 분들은 다른 조 대결을 살펴보시거나 개인정비를 하셔도 상관없지만 자기 차례까진 2번 간이 대결장에 오시길 바랍니다. 늦으면 실격이니 주의해주십시오.”

로엘의 순서는 중간이니 차례가 돌아오려면 한참 걸릴 것 같았다.

로엘은 아침 일찍 나오느라 제대로 끼니도 못 먹었기에 배부터 채우고자 했다.

“카넨, 식사나 하고 오자. 탐색이든 뭐든 배는 채우고 해야지.”

식사하자는 말을 기다렸는지 카넨이 저택에서부터 계속 들고 있던 바구니를 들어보였다.

“혹시 몰라서 도시락을 싸왔는데 괜찮으시다면 드셔주시겠습니까?”

카넨의 요리실력이야 충분히 증명되었고, 도시락이 있다면 먹으면서 다른 타종족 대결을 지켜볼 수 있으니 좋은 제안이라 할 수 있었다.

로엘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센스 좋은데? 그럼 관전하면서 먹을 수 있는 자리를 찾아보자.”

“네.”

///

참가자들을 위해 예선장소 구석에 설치된 임시 화장실 안.

깊은 구덩이를 파놓고 그 위에 구멍을 뚫은 나무 판자를 얹어 볼일을 볼 수 있게 해두었다.

깊은 구덩이 안에는 여러 참가자들이 싸질러 놓은 분뇨가 가득 차 있었다.

거기에 황금 용병패를 지닌 용병이 들어오더니 나무판자 위에 쭈그려 앉아 바지를 내렸다.

용병은 볼일을 보며 자신의 번호표를 확인하였다.

그의 번호표는 189번이었다.

그는 이미 자신의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해뒀기에 실실 웃고 있었다.

“첫 상대는 실버급 용병이군. 일단 1차전은 무난하게 통과하겠구만.”

상대가 중년의 나이에 고작 실버급이기 때문에 무난하게 이길 거라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가 볼일을 보고 있던 중 천막 걷혀지며 민둥머리 용병이 발을 들였다.

천막 입구에 달린 ‘사람 있음’, ‘사람 없음’ 문구가 적힌 팻말을 ‘사람 있음’으로 돌려놓았는데도 무시하고 들어온 것이었다.

용병은 중간에 끊기도 뭐하여 쭈그려 앉은 채로 짜증을 내었다.

“야이 개자식아. 사람 볼일 보는 거 안 보여? 당장 꺼......”

민둥머리 용병은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가차 없이 도끼를 휘둘렀다.

사람 몸집만한 도끼가 용병의 머리를 베어냈다.

그와 동시에 민둥머리 용병이 그를 발로 차서 똥통으로 밀어 넣었다.

똥통 안은 온갖 잡다한 색이 섞여 있는 터라 피가 튀는데도 불구하고 티가 나지 않았다. 더하여 깊은 똥통 속으로 시체가 점점 가라앉아 보이지 않게 되었다.

민둥머리 용병은 기름 먹인 헝겊으로 도끼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도로 등 뒤에 걸쳤다. 그리곤 땅에 떨어진 189번 번호표를 주워들었다.

민둥머리 용병의 입에서 의미심장한 말이 튀어나왔다.

“조직에선 그 놈에게 기대를 걸고 있는 것 같다만 그렇다고 순순히 우승을 양보할 순 없지.”

원래 민둥머리 용병의 상대는 골드급 용병이었는데 이왕 싸울 거면 더 편한 상대랑 싸우는 게 좋지 않겠는가.

게다가 156번에게 제 주제를 알려줄 수 있고 말이다.

민둥머리 용병은 입꼬리를 밀어 올리며 천막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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