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될놈될-92화 (92/219)

00092 4-6. 유인책 =========================

어리둥절해 하던 카넨이 일단 주변의 이목을 피해 로엘을 안으로 들였다.

고급 여관답게 방 하나가 아예 가정집처럼 거실, 침실, 식사방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카넨은 침실에 있던 가장 푹신한 의자를 끌고 오며 변장한 로엘을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저기... 로엘 전하인 거 맞죠?”

로엘이 가발을 벗으며 자신임을 확인시켜주었다.

“응, 맞아.”

“왜 변장을 하고 계셨어요? 엘로나 여왕님 때처럼 서프라이즈라도 하러 오신 거예요?”

“아니, 카넨이랑 만난 건 단순한 우연이야. 오히려 질문은 내가 하고 싶어. 테헤란엔 대체 언제 온 거야? 왔으면 왔다고 하지.”

“아까 인사드리러 갔는데 안 계셔서 레이아 공주님께만 인사드리고 왔어요.”

로엘이 왕궁에서 나왔을 때 카넨이 왕궁에 들리면서 길이 엇갈린 것 같았다.

그 뒤에 투기장에서 대회신청 할 때 마주친 것이었다.

“엇갈린 거였군. 엘로나는 없어?”

“네, 개인적으로 온 거예요. 엘로나 여왕님은 지금 샹데르에서 개국 준비를 하고 계세요.”

“나도 조만한 한 번 들려야겠군. 그나저나 카넨이 참가할 만한 대회는 아닌데 뭐 때문에 참가하려는 거야?”

이미 카넨은 엘로나의 기사인데다 상품으로 걸린 영지보다 더 큰 영지를 가지고 있다.

모름지기 기사는 한 주군만 섬기는 게 당연한지라 카넨이 우승해봤자 기사 작위를 받지 못한다.

물론 땅 정도는 받을 수 있겠지만 그마저도 카넨에게 유용한 상품은 아니었다.

이미 트라켄 영지라는 넓은 땅을 가지고 있는데 기껏해야 마을 하나 수준의 땅을 받아서 어디 쓰겠는가.

관리하는 게 더 귀찮을 거다.

그러나 카넨은 나름대로 참가할 이유가 있었다는 듯 사정을 설명했다.

“저 같은 경우 옛날부터 인스턴트 마나 인스퍼트란 소리를 들으며 다녀야했죠. 마나 마스터가 된 후에도 실력을 알릴 기회가 안 잡히더라고요. 그래서 이참에 힘을 보여서 인스턴트 꼬리표를 떼어내려고 참가했어요.”

카넨 성격에 아무데서나 검 휘두르며 ‘나 마나 마스터요~.’라고 자랑하고 다닐 리 만무하니 이번 마나대회를 통해서 인스턴트 익스퍼트 꼬리표를 떼어낼 생각이었던 거다.

그녀가 오랜 시간동안 오명을 짊어진 채로 지내야 했던 걸 감안하면 상품에 관계없이 참가할 가치가 있는 대회였다.

로엘은 납득하면서 의자에 편하게 몸을 파묻었다.

테헤란 시내의 별 네 개짜리 고급 여관답게 가구 역시 상당한 고급품이었다.

방 안의 가구를 둘러보던 로엘은 문득 의문이 솟아났다.

“근데 뭐 하러 따로 여관까지 잡은 거야? 카넨이라면 얼마든지 왕궁에서 지내게 해줄 텐데.”

“그게 말이죠. 개인적으로 온 건데 왕궁 신세지는 건 아니다 싶어서요.”

“섭한 소리하네. 누가 들으면 모르는 사이인 줄 알겠어. 아무튼 간에 잘 됐네. 대회기간 동안 지낼 곳을 찾아야 했는데 여기서 지내면 되겠어.”

“네?”

“아, 아직 설명을 안 했구나. 실은......”

로엘은 조직의 끄나풀을 솎아내기 위해 개최한 대회임을 알려주었다.

카넨도 이전에 녹색유령 사건을 같이 겪었었기에 금방 상황파악을 끝마쳤다.

“조직의 인물을 잡기 위한 거였군요. 그런 거라면 저도 협조하겠습니다.”

“카넨이 도와주면 나야 든든하지. 안 그래도 기밀유지 때문에 사람을 많이 쓰기 애매했거든.”

그란데 백작이나 라이너리 백작 같은 경우 계획을 듣자마자 너무 의욕적으로 일을 벌여 다 들키게 움직일 것이 뻔하기에 말하지 않았다.

소수정예로 자연스럽게 대회에 참가하여 조용히 용의자들을 간추내볼 생각이었다.

카넨으로선 로엘의 작전을 도움과 동시에 인스턴트 익스퍼트 꼬리표를 떼는 것이 목표가 되었다.

카넨은 이곳에서 지낸다는 로엘의 말을 ‘이곳 여관’에서 지낸다는 뜻을 받아들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밑에 내려가서 빈 방이 있나 알아볼게요.”

로엘이 말했던 건 ‘카넨의 방’이었던지라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로엘은 카넨이 잘못 알아들었다는 걸 깨닫곤 다시 말을 꺼냈다.

“여기에 방 많은데 뭐 하러 또 빌려. 딱 봐도 침실이 3개는 되어 보이구만.”

“이 방에서 지내신다는 뜻이었어요?”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

“그게 아니라... 아, 알겠습니다. 편안히 지내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잘 부탁할게.”

호실마다 방이 여러 개 있어서 실질적으로는 ‘다른 침실’에서 자게 되겠지만 그래도 호실로 따지면 ‘한 방’에서 자게 되는 셈이었다.

수련여행 이후 극심하게 로엘을 의식하게 된 카넨이다.

일부러 로엘과 거리를 두려고 따로 여관을 잡았는데 오히려 같이 지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지금 이 상황은 좋은 상황인 건가, 나쁜 상황인 건가.

카넨 본인도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복잡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로엘은 느긋하게 가발을 다듬을 뿐이었다.

///

양초 하나만이 켜져 있는 어두운 방 안.

양초 너머에선 호두 굴리는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호두를 굴리던 사내가 손을 멈추며 말했다.

“마나대회인가. 엘리오스 킨 로엘, 화려한 행사를 계획했군.”

“어떻게 할까요? 놈이 조직의 존재를 감지하고 있다면 함정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 놈은 왕이다. 왕이란 작자들은 누구보다 오래 살고 싶어 하지. 제 몸을 미끼로 삼을 리가 없어. 단순한 세력과시용 대회일 테니 실력 좋은 자들을 암살자로 투입해라.”

조직은 독살 시도 이후 몸을 사리고 있었다.

독약을 쥐여 보냈던 테이서가 되러 독약을 먹은 것.

그것을 로엘의 경고라 여겨 한동안 빌로스 왕국만큼은 건들지 않고 있었다.

허나 마나대회를 연 걸로 보아 로엘의 머릿속에서 조직은 완전히 잊혀진 것이 분명했다.

“혹시 몰라 일단 조직원들에게 테헤란에서 대기하라 일러두었습니다. 총 3명이 대기 중입니다.”

“누구를 선정했느냐?”

“세간에 마나 익스퍼트임이 알려지지 않은 하프종족 한 명과 마나유저 상급에 달하는 다이아급 용병 두 명을 보냈습니다.”

“나쁘지 않군. 대회수준을 생각하면 마나 익스퍼트로도 충분히 우승 가능하겠지.”

“목숨을 걸고 우승하라 해뒀습니다.”

어둠 너머의 사내는 재차 호두를 굴리며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좋은 소식을 기대하도록 하지.”

///

마나대회 기간 동안 로엘과 함께하게 된 카넨.

그녀는 지금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3개의 침실 중 가장 큰 침실을 로엘에게 내주고 자신은 중간크기 침실을 쓰기로 하였다.

그녀가 중간크기의 침실에서 쉬고 있었는데 갑자기 로엘이 찾아와 이리 말하는 게 아닌가.

‘나중에 내 침실로 와.’

정확히 10분 전에 한 얘기였다.

카넨은 방 안에서 왔다갔다하며 심각하게 고민하였다.

“침실로 오라는 건 역시 그런 뜻이겠지? 아니야, 아닐 수도 있잖아. 지금이라도 가서 제대로 물어볼까? 근데 물어봤는데 정말로 그런 뜻이면 서로 민망해지잖아.”

솔직히 로엘이 요구하면 카넨으로선 거부할 수가 없었다.

설인의 마을에서 냉기마나 때문에 죽을 뻔했던 그녀를 살려준 것도 모자라 만년 인스턴트 익스퍼트였던 그녀를 마나 마스터로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이미 로엘과 카넨은 수련여행 때의 일은 불문에 부치기로 했었다.

그때 일은 어디까지나 불가항력이었을 뿐이고 그날 밤의 일은 그날 밤에 묻어두기로 약속했었다.

로엘이 요구하는 것인가, 아닌 건가.

그것 때문에 고민이었다.

요구하는 거면 합당한 준비를 갖춰서 침실로 찾아가야 한다. 하지만 막상 준비해서 갔는데 아니었다면 그것도 문제다.

고민하던 카넨은 명쾌한 해답을 떠올려 냈다.

‘옷은 지금 입고 있는 여행복을 그대로 유지하고 속옷만 새 걸로 갈아입자. 그러면 되는 거였잖아.’

나름대로 준비는 갖추었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준비는 아니니까 양쪽 사태에 전부 대응할 수 있을 거다.

카넨은 자신이 생각해도 괜찮은 해답인 것 같다 여기며 복도로 나갔다.

마침 복도를 지나치던 여관 소속 하녀가 있어 손짓을 하였다.

“거기 잠깐만 이리와 봐.”

“네,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카넨이 주머니에서 금화 몇 개를 꺼내 하녀에게 쥐여 주었다.

“이걸로 새로운 속옷을 사와 줘. 면적은 좀 좁아도 상관없어.”

하녀는 무슨 뜻인지 알아채곤 싱글벙글 웃으며 금화를 받아들었다.

“네, 금방 사오겠습니다.”

심부름을 보낸 카넨은 도로 방으로 들어왔다.

이걸로 서로 난처할 일은 없을 거다.

그런데 심부름을 보낸지 1분도 되지 않았건만 문 너머에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카넨은 하녀가 따로 물을 게 있어 돌아왔나 싶어 문을 벌컥 열었다.

허나 문을 두드린 건 하녀가 아니었다.

로브를 뒤집어 쓴 자가 서있는 게 아닌가.

후드 부분을 푹 눌러써서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방문객의 심상치 않은 모습에 카넨이 경각심을 드러냈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로브를 쓴 자가 후드를 살짝 젖히면서 얼굴을 내비쳤다.

“카넨 경, 저입니다 크라넬. 작년 연회 이후에 처음 뵙는군요.”

찾아온 이는 크라넬이었다.

크라넬은 누가 볼까 싶어 문 안쪽으로 발을 들였다.

몰래 찾아온 것임을 안 카넨이 그의 움직임에 맞춰 문을 닫아주었다.

“크라넬 경? 여긴 어쩐 일이시죠?”

“로엘 전하께 얘기 못 들으셨습니까? 원래 로엘 전하와 제가 대회에 참가해서 조직의 끄나풀을 찾아낼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카넨 경이 합류했으니 한 번 모여서 행동방침을 논하자고 하시더군요.”

크라넬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로엘이 큰 침실에서 나와선 오라고 손짓하였다.

“오, 크라넬. 생각보다 일찍 왔네. 둘 다 내 침실로 들어와. 앞으로의 행동방침을 정해야지.”

침실로 오라고 했던 건 ‘그렇고 그런’ 의미가 아니라 단순히 행동방침을 정하기 위한 회의를 위한 것이었다.

카넨은 저 혼자 망상해버렸음을 깨닫곤 얼굴을 붉혔다.

로엘이 가만히 있는 카넨을 쳐다보다가 그녀를 불렀다.

“왜 그래? 얼른 들어오라니까. 무슨 문제라도 있어?”

“아, 아뇨. 아무 것도 아닙니다.”

카넨과 크라넬을 침실로 들인 로엘은 마나를 뻗어 방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엿듣는 이가 없다는 걸 확인한 후에야 대화를 시작하였다.

“이제부터 우리 3명은 마나대회에 참가해서 조직의 끄나풀을 탐색하기 시작할 거야.”

“마냥 탐색하긴 힘들 것 같은데 범위를 좁힐 순 없을까요?”

“내가 마나 마스터니까 최소한 암살자 수준이 마나 익스퍼트는 되어야겠지. 그쯤 돼야 우승을 장담할 수 있을 거고.”

“각 나라의 마나 익스퍼트는 전부 알려져 있는데다 각 나라의 기사직을 맡고 있습니다. 기사서약을 할 수 없는 자를 암살자로 보낼까요?”

“크라넬 네가 말하는 마나 익스퍼트는 인간 중에서 마나 익스퍼트인 자를 말하는 거잖아. 타 종족 중에 알려지지 않은 마나 익스퍼트가 있을 수도 있어.”

“아, 그래서 공권력을 끌어다 쓸 수 없는 거군요. 자칫 잘못하면 타종족 차별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것도 있고 기밀유지 차원에서도 소수정예가 낫지. 각자 쓰는 힘은 마나유저 상급으로 제한하도록 해. 그래야 상대가 어떻게든 이기려고 감춰둔 마나 익스퍼트 힘을 쓸 테니까.”

“타종족이고 마나 익스퍼트 힘을 쓰면 그 자가 조직의 끄나풀이란 거군요.”

“그런 셈이지.”

로엘과 크라넬은 각각 마나 마스터와 마나 익스퍼트로 알려져 있으니 분장하여 참가하기로 했다.

대신 카넨은 아직 인스턴트 익스퍼트로 알려져 있으니 그대로 나가기로 하였다.

세간에선 카넨이 일반 검을 들고 있으면 마나유저 상급 수준밖에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따로 위장할 필요가 없었다.

이로써 구체적인 행동방침이 정해졌다.

볼일을 마친 크라넬은 따로 잡아둔 숙소가 있어 떠날 채비를 하였다.

“그럼 저는 내일부터 따로 행동하도록 하겠습니다. 두 분은 같이 행동하실 겁니까?”

“아무래도 3명 중에 2명은 붙어 있는 게 좋겠지. 같은 숙소이기도 하고. 보고할 게 있으면 오늘처럼 숙소에서 전하도록 하자고.”

“네, 알겠습니다. 두 분 모두 편안한 밤 보내십시오.”

크라넬이 나가려고 문을 열었다.

그가 문을 열자 막 노크를 하려고 손을 올린 하녀가 있었다.

하녀는 당황하다가 가지고 온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사오라고 하신 물건을 가져왔습니다.”

크라넬이 후드를 푹 눌러쓰며 말없이 종이봉투를 받아 로엘에게 넘겼다. 그리곤 빠르게 하녀를 지나치며 복도 너머로 사라졌다.

하녀도 눈치껏 허리를 숙이며 물러났다.

로엘은 문을 닫으며 종이봉투 안을 살펴보았다.

“뭘 가져온 거지? 난 시킨 게 없는데.”

카넨이 자신이 시켰던 심부름을 떠올리며 뒤늦게 손을 뻗었다.

“아!”

그러나 이미 로엘의 손이 안에 있는 물건을 꺼내든 후였다.

로엘은 종이봉투 안에서 나온 야시시한 속옷을 목격하게 되었다.

위아래 모두가 속옷이라기 보단 끈에 가까운 물건들이었다.

카넨이 뒤늦게 속옷을 낚아채서 종이봉투에 우겨넣듯 집어넣었다.

부끄러운 나머지 그녀의 얼굴은 물론 귀 끝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민망한 분위기 속에서 로엘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흠흠, 그 뭐냐. 그런 건 개인취향이니까 뭐.”

“이건 말이죠. 그러니까 이건......”

로엘은 카넨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자신의 침실로 들어갔다.

그는 침실 문을 닫기 전에 한 마디 덧붙였다.

“뭐랄까. 요즘 추우니까 천이 넉넉한 걸로 입는 게 좋을 것 같아. 아니 뭐 그냥 개인적인 의견이야. 그럼 잘 자.”

거실에 홀로 남은 카넨은 종이가방을 꽈악 끌어안으며 울상을 지었다.

“그게 아니라고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