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9 4-5. 독살 시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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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부 의원이 새로 만들어준 진통제는 효과가 매우 뛰어났다.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통증이 싹 가시는 게 느껴졌다.
약효가 도는 동안엔 얼마 정도 걸어 다닐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간은 어느덧 밤이 되어 의무부 건물 안에는 당직 의원만 남아있었다.
순찰병은 전부 건물 바깥에서 순찰을 돌고 있었다.
바깥에서 건물 안으로 들어오는 건 힘들지만 이미 건물 안에 들어와 있는 테이서는 얼마든지 의무부 안을 돌아다닐 수 있었다.
테이서는 침대에서 일어나 조심스럽게 커튼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의무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고, 불빛 한 점 없이 어두컴컴했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질 즈음에서야 움직일 수 있었다.
의무실을 문을 열고 복도를 살펴보았는데 역시나 아무도 없었다.
다만 복도 모퉁이 너머에서 불빛이 새어나오는 게 보였다.
모퉁이 너머 끝에는 자물쇠가 걸린 약재창고가 있었고, 약재창고 문 앞에 초소처럼 창문이 달린 당직실이 있었다.
불빛은 당직실에서 새어나오는 것이었다.
당직실 안에서 당직 의원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에이씨, 표지에 속았잖아. 시간 때우긴 글렀군. 이 긴 밤을 어떻게 보낸다.”
무언가에 분노한 듯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아무래도 당직실 앞을 들키지 않고 지나가는 건 힘들어보였다.
하는 수 없이 테이서는 목표를 변경했다.
의원들의 개인 연구실이라면 실험용으로 쓰려고 빼놓은 독약이 하나라도 있을지 모른다.
독약이 있기를, 그리고 그 독약이 독살에 유용한 것이길 바라며 살금살금 걸음을 옮겼다.
‘진통제 효과가 남아있는 동안 찾아내야 할 텐데.’
테이서는 의무실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메델의 연구실부터 찾아보기로 했다.
무려 국왕 주치의이니 많은 연구를 하고 있을 거고 독약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메델의 연구실 문고리를 잡아보았는데 의외로 잠겨 있지 않았다.
잠겨 있지 않은 게 아니라 자물쇠가 헐거워져 제대로 잠기지 않은 것이었다.
메델이 바꾼다고 해놓고 깜빡한 것이었는데 테이서로선 행운(?)이라 할 수 있었다.
테이서는 메델의 연구실 안으로 들어가서 최대한 눈을 크게 뜨곤 약병이 들어서 있는 선반을 뒤졌다.
테이서가 한 가지 모르고 있는 사실이 있었는데 메델은 절대 자신의 연구실에 독초를 남겨두지 않는 성격이었다.
다음 날 독초를 써야한다 하더라도 무조건 창고에 보관시켜놓고 다음 날 아침에 꺼내 쓰는 꼼꼼한 타입이었다.
그래서 선반에 남아있는 건 언제 어느 때나 쓸 수 있는 상비약뿐이었다.
테이서로선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젠장! 하나쯤은 남겨둬야 할 거 아니냐!’
메델의 연구실은 글렀다고 생각하던 차에 익숙한 약병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선반 한복판에 테이서가 잃어버렸던 약병이 놓여 있는 게 아닌가.
흘린 약병을 메델이 주워다 선반에 올려놓은 것 같았다.
테이서는 약병을 집어 들며 히죽거렸다.
‘크크, 진통제인줄 알고 여기 놔뒀나 보군. 비장용으로 붙여둔 게 정답이었어.’
독약이 있다 하더라도 독살에 유용한 타입이 아니면 곤란했었다.
그런 면에서 땅굴거미의 독이 다시 손에 들어온 건 더할 나위 없는 상황이라 할 수 있었다.
위장용 라벨이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제 의무실로 돌아간 후 이틀 안에 어떻게든 레이아와 단독으로 대화를 나눌 기회만 만들면 된다.
테이서는 숨죽여 웃으면서 의무실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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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튼 교 사제들과의 대화를 마친 레이아는 다시 침대를 뒹굴 거리고 있었다.
테이서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일처리를 너무 빨리 끝내버렸다.
원래 사흘에 걸쳐 할 일을 하루 만에 끝내버린 참이었다.
레이아가 지루해한다는 걸 들었는지 베나티아가 열려 있는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
레이아의 침실은 3층에 위치해 있었지만 베나티아에겐 집 앞 계단이나 다름없는 높이였다.
베나티아는 창틀에 발을 걸치며 뒹굴거리고 있는 레이아를 놀렸다.
“아이는 잘 시간인데 아직도 뒹굴거리고 있네.”
“자꾸 아이라고 하지마요. 저 올해 22살 됐거든요?”
“난 3001살이거든? 내 반의 반의 반의 반도 안 산 녀석이니까 아이 맞지.”
“오실 거면 문으로 들어오시지 그랬어요.”
“일일이 인사 받으면서 들어와야 하잖아. 내 나이쯤 돼봐. 인사 받는 것도 지겨워.”
“이 밤중에 어쩐 일로 오셨어요?”
베나티아가 손에 들고 있는 술병을 흔들어보였다.
기다란 뿌리 형태의 약초가 들어 있는 담금주였다.
레이아는 이전에 베나티아가 좋은 술을 얻었다며 자랑했던 걸 떠올렸다.
“고개살이 담금주네요. 또 자랑하러 오셨어요?”
고개살이라 하여 먹으면 고개를 넘기 전에 죽는다는 맹독을 가진 풀이 있었다.
고개살이로 담근 술은 독주나 마찬가지지만 그와 동시에 어떤 명주에도 뒤지지 않는 향과 맛을 지니고 있어 천상의 독주란 별명을 지니고 있기도 했다.
이전부터 드라고라의 혈청을 가지고 있던 레이아도 마실 수 있는 술이었지만 베나티아가 로엘하고만 먹을 거라고 절대 안 준다 했었다.
이제 와서 고개살이 담금주를 가져온 이유가 궁금했다.
베나티아는 레이아의 침실 안에 들어서며 의자에 앉으며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
“너나 나나 심심해 죽을 지경이잖아. 이리 와서 앉아.”
“그거 로엘하고만 마신다 했었잖아요.”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려니 좀이 쑤셔서 말이야. 게다가 메델 녀석에게서 재미있는 소식을 전해 들었거든.”
메델에게서 소식을 듣고 찾아올 만한 거라면 한 가지밖에 없었다.
레이아는 베나티아의 맞은편에 앉으며 오른팔 소매를 걷어 올렸다.
“이거 보러 오셨어요?”
드라고라의 혈청으로 맹약을 만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구경하러 온 것이었다.
베나티아는 레이아의 오른쪽 손등을 쓸어내리더니 재미있다는 듯 털털하게 웃었다.
“인간은 정말 재미있는 걸 많이 만든단 말이야. 드라고라 혈청으로 맹약을 새길 생각을 하다니 제법인데?”
“쓸 일이나 있을까 싶어요.”
“그래도 가다듬어 두면 좋지. 네게 독물 마법을 알려주고 싶은데 배워볼래?”
“제가 마법을요?”
“대신 마나를 모아서 루엔의 실험을 도와줘.”
“그거라면 베나티아 언니가 돕고 있지 않아요?”
“아니, 그게 말이야. 요즘 마나 채울 때마다 허전함이 느껴지거든. 무슨 병이 아닌가 싶어서 알아보고 오려고. 그 사이 조수를 맡아줄 사람이 필요한데 마침 네 얘기를 들었거든.”
항상 루엔과 투닥거리기는 한다만 진심으로 싸우는 건 아니었다.
속으로는 레이아도 루엔을 귀여워하는 편이었다.
루엔에게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손을 빌려줄 의향이 있었다.
게다가 베나티아가 묘한 증상을 겪고 있다.
드래곤인 그녀가 모를 정도면 심각한 증상일지도 몰랐다.
그녀가 원인을 알아볼 수 있게 도와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문제는 레이아 본인에게 마나가 없다는 점이었다.
마나에 대한 재능이 없기 때문에 가르쳐준다 해도 배울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 점은 해결가능하다는 듯 베나티아가 호쾌하게 해결책을 꺼내들었다.
바로 그녀가 가져온 고개살이 담금주가 해결책이었다.
“고개살이가 독성이 강해서 그렇지 마나섭취에는 이만한 것도 없어. 맹약이 독성을 흡수하면서 마나까지 흡수해줄 테니 실질적으론 네가 마나흡수를 하는 셈이지. 마나흡수만 하면 내가 마나의 길을 뚫어줄 테니까 마법을 배우는데 무리는 없을 거야.”
원래는 마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몸인데 드라고라의 맹약이 촉매 역할을 하여 마나를 몸속에 밀어 넣어준다는 소리였다.
루엔뿐만 아니라 베나티아를 위한 일이기도 하니 레이아로선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오늘은 술 마시지 않으려 했는데 어쩔 수 없네요.”
“자, 마시자 마셔. 잔 두 개 가져와.”
“저한테 전부 주시는 건 아니었네요.”
“당연하지. 이 귀한 걸 전부 줄 거라고 생각했어? 한 번에 많이 마시면 안 좋아. 일단 15년치만 섭취해두도록 해.”
“네네, 언니가 그렇게 말씀하시면 따라야죠 뭐.”
“내가 없는 동안 로엘이 돌아오면 내 시간만큼 같이 보낼 텐데 좀 더 기뻐하는 게 어때?”
“후후, 오랫동안 나가계시길 바라야겠네요.”
그 동안 두 사람이 얼마나 많이 친해졌는지 알 수 있는 대화였다.
두 여자는 술잔을 부딪치며 접시가 깨지지 않을 정도의 수준으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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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아침, 레이아는 숙취 한 점 없이 말끔하게 눈을 떴다.
밤에 고개살이 담금주를 마신 후, 베나티아가 마나의 길을 뚫어주어 1써클 마법사가 되었다.
베나티아는 떠나기 전에 레이아에게 마법서 한 권을 주었는데 독물 마법에 대해 설명되어 있는 마법서였다.
독물 마법의 경우 치료마법에 속하는 영역이었다.
몸 안에 저장된 독물을 원하는 형태로 구성하여 전투용으로 쓸 수 있고, 치료마법을 좀 더 폭넓게 익히면 다른 사람이 중독되었을 때 독을 빼내어 치료하곤 빼낸 독은 자신이 쓸 수 있다고 하였다.
일단 베나티아에게 기본적인 마나호흡법과 마나운용방법을 속성으로 배웠다.
앞으로 8시간마다 루엔의 실험체에 5년치 마나를 불어넣기 위함이었다.
독물 마법 수식은 독학하다가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메델에게 물어보라 하였다.
레이아는 원래 로엘이 누워 있으면 하는 자리에 마법서가 있는 걸 보곤 머리를 긁적였다.
“뭐... 심심하다고 뒹굴거리는 것보단 나으려나.”
바깥에선 아침 9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종소리가 울려퍼지자마자 칼같이 에아가 찾아왔다.
“공주님, 세안 시간입니다. 일어나셨습니까?”
“일어났어. 들어와.”
에아가 손수레를 밀며 방에 들어섰다.
손수레 위에는 데운 물을 담은 세숫대야, 수건, 세안도구 등이 있었다.
에아는 레이아가 씻기 편하도록 세안도구를 세팅하며 말했다.
“오늘 아침에 테이서 사제님이 또 걸어 나오시려다가 빙판에 미끄러지셨다네요. 어지간히 공주님과 대화를 해보고 싶었나 봐요.”
“라이너리 백작이나 그란데 백작 같은 타입인가 보네. 너무 책임감이 강해도 문제란 말이지.”
“또 다치시기 전에 한 번 찾아가주시는 게 어떨까요?”
“됐어. 브리튼 교와의 일은 이미 끝났는데 뭘. 나 오늘부터 따로 할 일이 있으니까 로엘이 쓰던 수련장 청소해놔 줘.”
“네. 아침식사 시중까지만 들고 바로 해놓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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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시어로 돌아가는 길.
테이서의 얼굴엔 근심이 가득했다.
자신만만하게 임무를 수행하고 오겠다 했는데 시도는커녕 레이아와 대화조차 제대로 못하였다.
조직에서 테이서를 어떻게 처분할지 몰라 돌아가는 길 내내 불안에 떨어야 했다.
“조직에서 날 가만히 놔둘 리가 없어. 이제 어쩌지?”
허리 통증을 잊을 정도로 두려움에 떨고 있는 테이서였다.
그런 테이서의 앞에 갑자기 솟아난 양 검은로브 사내가 나타났다.
검은로브 사내는 테이서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스산한 목소리를 내었다.
“보고해라.”
짧지만 묵직한 한 마디였다.
대답 여하에 따라 테이서의 생사가 갈릴 것이다.
독약을 먹였다고 해봤자 금방 들통날 테니 사실대로 말하고 기회를 구걸하는 수밖에 없었다.
“사실 대화조차 시도하지 못... 쿨럭!”
사실대로 고하려던 차에 테이서가 말을 잇지 못하고 피를 왈칵 토해냈다.
테이서의 몸에서 중독현상이 나타나더니 곧장 절명하고 말았다.
검은로브 사내가 반응할 틈도 없이 일어난 일이었다.
검은로브 사내는 피를 토하며 죽은 테이서를 보곤 로브 아래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땅굴거미의 독. 역으로 테이서에게 먹였군. 빌로스 왕궁의 경고인가.”
조직의 정체는 모르나 실재한다는 걸 감지하고 있다.
그러니 허튼 짓 하지마라.
...라는 경고의 의미로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테이서는 조직의 말단인지라 조직의 진짜 정체를 모르고 있었다.
이미 테이서를 심문해보고 얻을 정보가 없으니 경고의 수단으로 사용한 걸로 추정되었다.
검은로브 사내는 로엘과 로엘의 주변사람이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영역임을 깨닫고 얼른 보고하러 가야 된다 여겼다.
“로엘이 없는 틈을 노려도 안 되는 건가. 주변 인물까지 보통이 아니군. 얼른 보고해야겠어.”
이후 케시어에 도착한 브리튼 교 사절단은 마차 안에서 죽은 테이서를 발견했다. 그리곤 테이서의 몸에서 검출된 독과 그가 가지고 있던 약병의 성분이 일치함을 밝혀내어 자살이란 판정을 내렸다.
그러나 그 누구도 테이서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유를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