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8 4-5. 독살 시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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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오기로 되어 있던 브리튼 교의 사절단이 테헤란에 도착했다.
테이서는 마차 안에서 테헤란 시가지의 풍경을 보며 빌로스 왕국의 풍습을 비웃었다.
“빌로스에선 새해 때 고드름을 단다 했던가. 실제로 보니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군.”
빌로스 백성은 추운 날에 물 한 바가지를 들고 나와 집 앞의 고드름 모형에 뿌리고 있었다.
집 앞마다 야트막한 빙판길이 생기고, 아이들은 살얼음을 밟아 부수며 빠드득거리는 감촉을 즐기는 중이었다.
문 옆에 생긴 빙판을 밟아 부수는 것 역시 풍습의 일종으로 빙판을 밟아 부수는 행위 자체가 악운을 부수는 행위라 여겨지고 있었다. 빙판에 미끄러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는 행위이기도 했다.
본인들은 충분히 즐기고 있었지만 외지인인 테이서의 입장에선 우스운 풍습일 뿐이었다.
테이서를 태운 마차는 시가지를 지나쳐 빌로스 왕궁 정문에 다다랐다.
왕궁 정문 입구 옆에 동아줄을 나선형으로 엮어 만든 고드름 모형이 있었는데 아직 분칠을 덜하여 얼룩덜룩한 모양새였다.
테이서는 빌로스 왕국의 수준을 드러내는 모습이라 여겨 속으로 한껏 비웃었다. 그러면서 품에서 약병을 꺼내 한 번 더 확인하였다.
약병 뚜껑에는 ‘진통제’란 글씨가 적힌 위장용 라벨이 붙어 있었다.
혹시나 누군가가 약병을 보고 이상하게 여기면 두통이 있어 진통제를 먹고 있다 말하기 위함이었다.
임무 전에 최종확인까지 마친 테이서는 안주머니에 대충 약병을 찔러넣었다.
그 사이 전방에선 마차가 들어올 수 있게 해자 너머로 다리가 내려오고 있었다.
마차는 다리가 완전히 내려서자마자 그 위에 올라서서 왕궁 정문으로 향했다.
그런데 마차가 정문 앞에 도달하기 직전.
고드름 모형을 매달고 있던 밧줄이 끊어지면서 고드름 모형이 마차 위에 떨어졌다.
투웅!
동아줄을 엮어 만들었다지만 장정 서너 명이 동원되어야 들 수 있는 무게인 만큼 떨어지는 충격 또한 묵직했다.
고드름 모형과 부딪친 마차가 기울면서 마차가 옆으로 기울었다.
난데없는 대형사고에 문지기를 물론 근처에 있는 귀족이며 기사,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정문 안에서 마차를 맞이할 준비를 하던 레이아가 얼른 뛰어와선 사고를 수습하려 애썼다.
“함부로 모형을 건들지마! 안에 있는 사람부터 구출해! 더프 경! 마부랑 수행원들 뒤로 물려! 야야야! 모형 건드리지 말란 말 못 들었어?”
하도 급하다보니 호칭보다 야라는 소리가 더 많이 튀어나왔다.
더프를 비롯한 로얄 기사단 단원들이 옆으로 기울어진 마차 위로 올라가 문을 열었다. 그리곤 마차에 박힌 고드름 모형이 움직이지 않게 주의를 기울이면서 테이서를 빼내었다.
다행히 고드름 모형에 직격 당하진 않았고, 마차가 기울어지면서 허리를 삐끗한 게 전부였다.
신기한 건 마차가 기울어지는 대형사고였음에도 불구하고 테이서 외엔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마차를 이끄는 두 마리의 말은 마치 다치지 않을 걸 알고라도 있었는지 날뛰지 않고 평온히 있었으며, 브리튼 교의 수행원들은 마차를 먼저 들여보내느라 도개교에 발을 들이지 않았기에 가만히 있기만 했는데도 사고를 피했다.
테이서를 구출해낸 기사들은 허리를 다쳐 몸을 가누지 못하는 테이서를 조심스럽게 땅에 뉘였다.
주변에서 하도 부산히 움직이고 있어 흙먼지가 그대로 테이서의 얼굴 위로 풀풀 날렸다.
“에취! 으윽! 에취! 으윽!”
먼지 때문에 코가 간지러워 자꾸만 재채기가 나왔는데 재채기를 할 때마다 허리에 힘이 들어가 아픔과 간지러움의 사이에서 고통 받아야 했다.
의무부에서 빠르게 들 것을 가져왔고, 레이아가 테이서에게 다가서며 사과의 말을 전했다.
“죄송해요, 테이서 사제. 몸은 어떠세요?”
테이서로선 냅다 욕지거리를 내갈기고 싶은 충동이 들었으나 실행에 옮기진 못했다.
아직은 자비를 대표하는 브리튼 교 1급 사제의 모습을 유지해야 했기에.
그래서 끊어질 듯 아픈 허리를 두고도 억지로 웃어야만 했다.
“괘, 괜찮습니다.”
“그래도 다행이네요. 실제 고드름이었으면 정말 큰일 났을 거예요. 브리튼 교의 가호가 사제를 지켜준 셈이군요.”
운이 좋다고 말하며 방긋 웃는 레이아였다.
테이서는 ‘이미 다쳤는데 운은 개뿔!’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여전히 어색하게 웃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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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찰 결과 테이서의 부상 정도는 그리 심하지 않은 걸로 판명되었다.
사흘 정도 의무부에 머무르며 약을 먹고 찜질을 받으면 일어날 수 있을 정도의 부상이었다.
다만 사절단이 머무르기로 한 시간은 사흘이었다.
의무부에서, 테이서만 누워 있는 상태로 대화를 나눌 순 없는 노릇이었다.
테이서의 상태를 보러온 사제들이 대안을 꺼내들었다.
“테이서 사제, 그 상태론 레이아 공주님과 대화를 나눌 수 없겠군요. 저희가 대신 대화를 마치고 올 테니 테이서 사제는 쉬고 계십시오.”
테이서로선 레이아와 대화를 나눠야만 독살을 시도할 수 있었다.
유일한 기회를 잃을 마당인지라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 하였다.
“자네들 생각만큼 심각하진 않으니 맡은 바 소임을 다하겠... 으흑!”
업무를 수행할 수 있다고 증명하기 위해 일어나려다 통증 때문에 다시 허리를 붙잡는 테이서였다.
사제들은 테이서를 부축하여 다시 뉘이곤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사고로 다친 것이니 이번 일로 테이서 사제의 명성이 깎이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명성 문제가 아니라......”
“아, 테이서 사제쯤 되는 분이 명성에 연연하실 리 없겠지요. 정말 책임감이 강하시군요. 하지만 이번 일은 저희를 믿고 편히 쉬셨으면 합니다.”
어떻게든 레이아와 대화할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지만 몸이 말을 안 들으니 어찌할 수가 없었다.
조직의 임무는 절대적이다.
테이서로선 이번 임무를 실행에 옳길 의무가 있었다.
임무에 실패한다면 조직에서 쓸모없는 인간으로 분류될 거고, 조직에 대해 알고 있는 만큼 기밀유지를 위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가능성이 있었다.
테이서는 진땀을 뻘뻘 흘리며 고통을 참아내고 일어났다.
그나마 진통제와 메델이 걸어준 치료마법의 효과가 남아있어 아주 못 설 정도는 아니었다.
침대에서 내려와 억지로 선 테이서는 태연함을 가장하며 간신히 말을 꺼냈다. 그리곤 책임감 강하다는 이미지를 그대로 이용했다.
“난 내 일을 남에게 맡기는 사람이 아닐세. 레이아 공주님과의 대화자리에는 내가 나갈 테니 양해해주게나.”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테이서는 뒷짐을 지고 천천히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의무부 문을 나서서 계단까지 차근차근 밟아 내려가는 데에 성공했다.
고통을 이겨내며 걷고 있는 자신의 의지에 뿌듯해 하고 있던 차에 발이 미끄러지고 말았다.
의무부 정문에 달아놓은 고드름 모형, 모형에 뿌린 물이 아래에서 떨어져 작은 빙판이 만들어져 있던 것이다.
원래 누군가가 빙판을 부수어 놓아야 하나 테이서가 사고를 당한 탓에 의무부 전원이 바빠져 미리 부숴놓는 걸 깜빡하고 말았다.
테이서는 빙판 때문에 미끄러져 요란하게 넘어졌다.
콰당!
“으어어어!”
넘어지는 소리와 함께 허리에서 강한 통증이 올라왔다.
테이서를 따라 나오던 사제들이 다급하게 메델을 불렀다.
후다닥 뛰어나온 메델이 인상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쯧쯧, 가만히 있으라면 있어야지 왜 의사 말을 안 듣는 건지 원.”
테이서는 또 다시 들 것에 의해 옮겨지며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미친 풍습 같으니! 독살 기회를 잡는 것조차 이리 힘들 줄이야.’
테이서가 들 것에 실리면서 안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약병이 떨어지고 말았다.
테이서 본인은 약병을 흘린 걸 인지하지 못한 채로 의무부 안에 실려 들어갔다.
한편 메델은 테이서를 보며 계속 혀를 차고 있었다.
의사 입장에선 고쳐주려 하는데도 고집 피우며 병을 도지게 하는 환자가 가장 성가셨다.
고쳐주려고 애쓰는데 왜 자꾸 부상을 늘리는 건가.
“쯧쯧, 덧나면 어쩌려고... 음? 이건 뭐지?”
메델의 눈에 바닥에 떨어진 약병이 들어왔다.
약병 뚜껑에는 진통제란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음? 누가 옮기다 떨어뜨렸나보군.”
하도 진통제 찾는 사람이 많아서 항상 수량이 부족했는데 누가 또 지급 받았다가 떨어뜨린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테이서에게 지급할 진통제가 없어 새로 만들어야 하나 싶었는데 잘 되었다.
메델은 고통 받고 있는 테이서를 위해 진통제 약병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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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서가 더 심한 부상을 입었다는 얘기를 전해들은 레이아는 제 일처럼 안타까워하였다.
“다치셨는데도 끝까지 맡은 일을 소화하려 하시다니 정말 책임감이 강하신 분이군요.”
“그렇기 때문에 존경 받는 분이시지요.”
“다쳤을 땐 편히 쉬는 게 자신을, 그리고 주변을 도와주는 일이죠.”
레이아의 뒤에 서있던 크라넬은 긴 숨을 내쉬었다.
레이아가 할 말은 아니었으나 차마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테이서가 쓰러졌으니 자연스럽게 그의 업무는 다른 사제들이 이어받게 되었다.
“이왕 이리 되었으니 빠르게 대화를 마치도록 하죠. 일이 끝나면 테이서 사제도 한시름 놓고 쉴 수 있으실 테니까요.”
“옳으신 말씀입니다.”
“긴 이야기가 될 테니 차라도 들면서 얘기하죠. 에아, 티테이블을 세팅해줘.”
명령을 맡은 에아가 고개를 조아리며 차를 끓이러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에아가 홍차와 꽃잎차, 과자를 담은 손수레를 밀며 들어왔다.
각자 취향에 따라 홍차나 꽃잎차를 분배 받았다. 그리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3공국 흡수 건에 대한 대화가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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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튼이 쳐진 간이 병실에 엎드려 누운 테이서는 품을 뒤지다가 당혹감에 물들었다.
‘없어! 없어졌어! 약병이 어디 갔지?’
언제 흘린 건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분명 왕궁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지니고 있었다.
사고를 당할 때 흘린 건가?
테이서는 일이 꼬여도 한참 꼬였다는 것을 직감했다.
독이 없으면 독살을 시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직 기회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이곳은 왕궁 의무부다.
약재가 많은 곳임과 동시에 해독제 연구를 위한 독약을 많이 쌓아두는 곳이기도 했다.
물론 독약은 위험한 만큼 엄중한 경비 속에서 보관되지만 그래도 시도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기회를 흘려보냈다간 조직에 의해 제거될 테니까.
일단 움직이려면 진통제가 필수였다.
마침 커튼 사이로 메델이 들어오며 특징 없는 알약 두 개와 물을 침대 옆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그리곤 테이서의 허리를 몇 번 만지면서 진단을 내렸다.
“다행히 덧나진 않았군. 진통제를 놔두고 갈 테니 먹어두게나. 이번에는 절대 움직이지 말게. 상태가 악화되면 평생 후회할 걸세.”
“네, 알겠습니다.”
테이서는 마음에도 없는 대답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메델이 커튼 바깥으로 나가자마자 테이블에 놓은 진통제를 먹었다.
진통제를 먹고 효과가 돌 때까지 가만히 누워 있었다.
그런데 1시간이 지나도록 진통제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여전히 욱신거리는 허리를 두고 테이서는 커튼 바깥으로 지나가던 의무부 의원 한 명을 불렀다.
“이보게.”
의무부 의원이 커튼을 살짝 젖히며 부름에 응했다.
“부르셨습니까?”
“진통제가 안 듣는 것 같은데 다시 가져다주지 않겠나?”
의무부 의원은 테이서가 ‘처음’ 실려 왔을 때 먹인 진통제를 떠올리며 말했다.
“진통제? 아까 드신 게 마지막이었는데... 일단 조금만 참아주시지 않겠습니까?”
테이서는 ‘방금’ 메델이 준 진통제를 떠올리며 말했다.
“그게 마지막이었나? 허리가 너무 아파서 그러니 어떻게 좀 해주게.”
“새로 제조하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빠르게 좀 부탁하네.”
“네,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