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될놈될-87화 (87/219)

00087 4-5. 독살 시도 =========================

4-5. 독살 시도

테헤란에 남은 레이아는 감기가 나았지만 한동안 일선에서 물러나 있어야 했다.

쉬게 하라는 로엘의 명령이 있었기에 회의에만 참가하려하면 라이너리 백작이 극구 막아섰다.

본의 아니게 휴가를 가지게 되었지만 휴가 같지 않은 휴가였다.

레이아는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며 무료함을 피력했다.

“크라넬.”

“네.”

“이거 휴가로 치면 안 되는 거 맞지?”

“글쎄요.”

“휴가로 치면 안 되는 거야. 원래 휴가 동안엔 로엘이랑 같이 있으려 했다고.”

“저한테 말씀하셔봤자......”

레이아는 혼자 이건 휴가가 아니라고 되뇌다가 벌떡 일어났다.

“아, 좀이 쑤셔서 죽겠네. 일이라도 하던가 해야지.”

“오늘 치 업무는 이미 라이너리 백작님이 다 처리하셨을 겁니다. 오늘 아침에 좋은 술이 들어왔는데 베나티아님과 한 잔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어제도 술 진탕 마셨잖아. 오늘 또 마셨다간 퉁퉁이가 될지도 몰라.”

“그럼 다시 뒹굴거리시는 수밖에 없군요.”

“하아, 지금쯤 루엔은 마도섬에서 로엘이랑 재밌게 놀고 있겠지.”

부러움에 한숨만 푹푹 내쉬는 레이아였다.

레이아의 무료함을 알아주었는지 생각지도 못한 일거리가 찾아들었다.

똑독

“레이아 공주님, 에아입니다.”

“들어와.”

에아가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다소곳하게 예를 올리며 가져온 소식을 전했다.

“공주님, 브리튼 교에서 3공국 건 때문에 의논할 것이 있다며 사람을 파견한다 합니다.”

현재 로엘의 전권을 위임 받은 건 레이아이니 사실상 레이아가 빌로스 왕국의 대표인 셈이었다.

외부세력의 대표를 맞이하는 일은 대표의 일이라 라이너리 백작도 막지 못할 일감이었다.

레이아는 무료하던 차에 잘됐다 여겨 화색을 띠었다.

“자세한 사항은?”

“지금 라이너리 백작님께서 공문을 가져올까 말까 고민하시던데 뭐라고 전할까요?”

“당장 가져오라고 해!”

///

케시어에서 나온 마차 한 대가 성기사단의 호위를 받으며 빌로스 북쪽 국경을 넘어섰다.

마차에는 브리튼 교의 1급 사제 테이서가 타고 있었다.

그는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 여겨지며 브리튼 교 내에서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마차 안에 혼자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은 선망 받는 1급 사제의 모습과 동떨어져 있었다.

테이서는 입꼬리를 말아 올린 채로 손에 쥔 유리병을 내려다보았다.

“이걸로 레이아 공주를 독살하란 말이지.”

테이서는 조직의 일원으로서 브리튼 교에 심어진 자였다.

겉으로는 선망 받는 1급 사제이지만 그 정체는 언제든지 조직의 명을 받아 공작에 나설 공작원이었다.

얼마 전에 검은로브 사내가 찾아와선 테이서에게 유리병을 주었다.

전달 받은 임무는 레이아를 독살하라는 것.

브리튼 교의 사절단을 가장하여 레이아와 접촉한 후 독을 타서 그녀를 죽인다.

독살에 쓸 독은 땅굴전갈의 독으로 일주일의 잠복기를 가진 후에 효과가 나타나는 독이었다.

땅굴전갈의 독은 현재까지 따로 해독제가 없으며 온몸에 퍼진 이후에 급작스럽게 효과가 발휘하기 때문에 손쓸 틈 없이 죽어버린다.

게다가 무색무취이며 순식간에 물에 녹아들기 때문에 차를 마시며 슬쩍 넣든, 술을 마시며 슬쩍 넣든 찰나의 순간만 주어지면 독을 탈 수 있었다.

테이서는 조심스럽게 유리병을 도로 품 안에 넣었다.

“요즘 빌로스 왕국이 너무 순조롭게 나가고 있긴 하지. 대륙전쟁을 일으키는 대신 빌로스 왕국을 무너뜨리는 걸로 바뀐 거군.”

조직의 원래 목적은 가이아 대륙에 치열한 전쟁을 발발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는 일마다 로엘이 훼방을 놓았고, 훼방을 놓은 것도 모자라 일을 벌이는 족족 세력이 커지고 있느니 조직으로선 로엘이 거슬릴만도 했다.

일단 레이아에게 땅굴전갈의 독을 먹인 후 복귀하는 게 중요했다.

테이서가 브리튼 교에 복귀하면 레이아가 죽을 것이다.

로엘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사람인 레이아가 죽으면 로엘의 분노가 하늘을 찌를 게 분명했다.

당연히 범인을 찾으려고 할 것이고 중독시기를 판명하여 테이서를 용의자로 지목하게 될 것이다.

물론 테이서는 발뺌할 생각이었다.

브리튼 교에서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는 테이서이기에 브리튼 교도 어떻게든 테이서를 변호하려 할 것이고, 분노에 눈이 먼 로엘이 테이서를 넘기라고 할수록 브리튼 교와의 사이가 나빠질 것이다.

제아무리 로엘이라도 브리튼 교를 적으로 돌리고 무사할 리 없다.

대립하다가 파문이라도 당해주면 조직으로선 최고의 시나리오였다.

브리튼 교의 군비축소위원회를 건드렸다가 파문당한 아지스가 당한 꼴을 생각하면 로엘도 아지스 꼴이 될 게 분명했다.

테이서가 마차 안에서 숨죽여 웃는 사이 그를 태운 마차는 테헤란을 향해 나아갔다.

///

빌로스 왕국에서는 봄이 오기 직전에 집집마다 지푸라기를 고드름 모양으로 엮어 분칠을 한 다음 대문 옆에 걸어놓는다. 그리곤 3월 중순이 될 때까지 아침마다 고드름에 물을 뿌리는 관습이 있었다.

물을 머금은 고드름 모형에선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게 되고, 고드름이 대신 울었으니 한 해 동안 집안에 눈물 날 일은 없겠구나 라고 생각하며 봄을 맞이하게 되는 빌로스 왕국만의 관습이었다.

헌데 정작 빌로스 왕궁에서는 아직 정문에 내걸 물건을 준비하지 못한 상태였다.

왕궁에서 내거는 고드름은 모형이 아니라 진짜 고드름을 걸었다.

오르망요 산의 깊은 동굴에서 맺히는 거대 고드름을 채집하여 보관 마법을 건 후 빌로스 왕궁까지 운반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운반된 거대 고드름은 왕궁 정문 옆에 걸어놓는다.

크기가 큰 만큼 녹는데 한참 걸리기 때문에 거대 고드름이 모두 녹을 때 즈음엔 봄이 와있었다.

왕국의 한 해 운세를 점치는 역할도 겸하는지라 거대 고드름 운반은 항상 신중하게 운반되었었다.

그런데 하필 거대 고드름이 맺히지 않아 곤란한 처지에 놓였다.

현지의 업자들이 봐둔 고드름이 있긴 했는데 웬 오우거 한 마리가 동굴 주변에서 하도 날뛰어서 그 충격으로 거대 고드름이 반 토막 나버렸다고 한다.

애써 다른 동굴을 뒤져 대체품을 찾아냈지만 예정보다 일주일 늦게 되었다.

라이너리 백작은 괜한 소문이 퍼지지 않게 미리 손을 쓰느라 바쁘기 짝이 없었다.

백성들은 세세한 정책 같은 것보다 미신이나 운세에 민감하다.

그래서 평소보다 훨씬 더 주의를 기울여 대처해야 했다.

“이상한 소문 퍼지지 않게 각 게시판마다 공문을 붙이고 공문을 읽어줄 사람을 붙여!”

“라이너리 백작님! 더프 단장이 혹한기 훈련 때문에 고드름 운반 호위를 하러 가기 힘들다 합니다.”

“에잇! 어차피 만년 마나유저 상급이면서 훈련은 무슨! 이쪽이 더 급하니까 얼른 고드름 호위를 하러 가라고 해! 아니지, 더프를 불러! 내가 직접 담판을 짓겠다!”

모두가 바쁜 가운데 레이아가 은근슬쩍 정문 쪽으로 걸어 나왔다.

동그란 털실이 달린 모자를 쓰고 벙어리장갑에 붉은 이중 코트를 입고 있어 앳됨과 요염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레이아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왕궁 정문을 둘러보며 능청스레 라이너리 백작에게 말을 걸었다.

“바쁜 것 같은데 도와줄까?”

라이너리 백작도 체면이라는 게 있었다.

여태껏 계속 쉬라고 말해왔는데 이제 와서 도와달라고 하는 건 라이너리 백작의 체면이 용납지 않았다.

“아뇨, 괜찮습니다. 공주님은 걱정 마시고 편히 쉬십시오.”

“그럼 내일 도착하는 브리튼 교 사절단만이라도 내가 전담할게. 거기까지 신경 쓰면 라이너리 백작이 쓰러질 테니까.”

체면을 살려주면서도 부담을 줄여주려는 배려였다.

레이아가 이렇게까지 배려해주는데 거부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군요. 제가 좀 더 유능했다면 좋았으련만.”

“사고까진 어쩔 수 없잖아. 게다가 여기서 더 쉬었다간 정말 휴가로 취급될 것 같거든.”

“네? 처음부터 못 다한 휴가를 보내시던 것 아니었습니까?”

“로엘이랑 보내지 못했으니까 휴가 아니야. 휴가로 처리했다간 가만두지 않을 거야.”

반드시 로엘과 단둘이 휴가를 보내고 말겠다는 으르렁거림 앞에 라이너리 백작은 식은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아, 네. 그렇습니다. 그렇고말고요. 공주님이 편하실 때 다시 휴가를 잡으셔도 됩니다.”

왕궁 내부의 일정을 관리하는 라이너리 백작의 확답을 얻고 나서야 방긋 웃는 레이아였다.

레이아가 왕궁 정문에 나와 있는 사이 하얀 의복을 입은 자가 레이아를 찾아왔다.

왕궁 안에서 하얀 의복을 입는 자들은 왕궁의원들밖에 없었다.

왕궁의원은 예를 갖추며 용건을 전했다.

“공주님, 의무부로 와주셨으면 합니다.”

“의무부는 왜? 감기는 다 나았다고.”

“그게 아니라 메델 의원께서 공주님께 드릴 것이 있다 하십니다.”

“메델 의원이?”

///

약품 냄새로 가득 차 있는 왕궁 의무부.

메델은 약재용 도마 위에 올려져 있는 가루를 보물이라도 되는 양 한데 모았다.

가루 한 줌이라도 놓칠까 싶어 숨을 내쉬는 것조차 조심하였다.

잠시 후, 메델의 연구실 문이 열리면서 레이아가 들어왔다.

“메델, 날 불렀다고 들었어.”

메델은 혹시나 문이 열리면서 바람이 들어올까 싶어 온몸으로 가루를 감쌌다.

다행히 바람이 들어오지 않는 걸 확인한 후에야 몸을 일으켰다.

“어서 오십시오, 레이아 공주님.”

“나한테 줄 게 있다며?”

“그렇습니다. 그 왜 예전에 임모벨 영지로 갈 때 공주님께 드라고라의 혈청을 빌렸잖습니까.”

“아, 그랬었지. 그때 왜 뭣 때문에 빌린 거야?”

로엘과 카넨이 수련여행을 갔을 때, 메델이 카넨에게 잘못된 약을 줬다고 해독해야 한다며 드라고라의 혈청을 빌려갔었다.

당시에 메델이 하도 급박하게 찾아왔기에 바로 내주었었는데 아직까지 해독해야 할 약이 무엇인지 못 들은 상태였다.

메델은 자신이 도착했을 때 카넨의 상태가 정상적이었던 걸 떠올리며 어렵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실수로 발열이 심하게 일어나는 약을 카넨 경에게 줬었습니다.”

“발열? 그런 약은 왜 만든 거야?”

“원래 약을 만들 땐 A효과를 낼 줄 알았는데 B효과의 약이 만들어지는 경우가 더 많답니다. 뭐... 카넨 경에게 준 약도 그런 경위로 만들어진 약이었죠.”

“아무튼 그때 일은 잘 해결됐다고 했었지. 그때 빌린 드라고라의 혈청을 돌려주려고 부른 거였어?”

“그게 말입니다. 제가 임모벨 영지로 급하게 가다가 낙마한 탓에 드라고라의 혈청을 깔고 앉아 버렸습니다. 그 충격 때문인지 혈청에 금이 갔더군요.”

귀한 물건을 부쉈기 때문에 메델이 송구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레이아로선 한참 전에 고르디에서 크라넬이 안전상의 문제로 쥐여 줬던 물건인지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사람 살리려다 실수한 건데 뭐 어때. 어차피 형태가 있는 건 언젠가 부서지기 마련이니까 신경 쓰지마.”

“그럴 수야 없지요. 고민한 끝에 아예 드라고라의 혈청을 가루로 만들어서 인장 형태로 부여하는 방법을 고안해냈습니다.”

“그건 또 뭐야?”

“마탑의 맥셀 님이 자주 사용하시는 방법인데 그걸 좀 응용해보았지요. 손등을 내밀어보십시오.”

레이아는 메델의 말대로 오른손을 내밀었다.

메델이 드라고라의 혈청 가루에 마나를 부여한 후 맹약의 마법을 영창하였다.

그러자 드라고라의 혈청 가루가 공중에 뜨더니 한 줄기로 뭉쳐서 레이아의 오른손에 고대문자 형식의 문신으로 자리 잡았다.

메델은 한 쪽 무릎을 꿇으며 설명했다.

“오르비르 산에서 아디만티움을 제련하고 남은 가루를 보내와서 그걸 섞어 맹약으로 만들었습니다. 드라고라의 혈청이 가진 해독능력에 아디만티움의 흡수능력까지 더해서 공주님이 독을 먹게 될 경우 문양이 독을 흡수하게 됩니다. 흡수한 독은 공주님 마음대로 꺼내 사용하실 수 있게 하였습니다.”

싸움과는 거리가 먼 레이아인지라 얼마나 유용한 건지 알 수 없었기에 감흥 없이 대답하였다.

“쓸 일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날 위해 수고해준 거니까 고맙게 받을게.”

“제 실수를 만회하기 위한 것이니 받아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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