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0 4-3. 히든 레코드 =========================
4-3. 히든 레코드
루엔의 공방에 남은 베나티아는 루엔이 부탁한 일을 하고 있었다.
루엔이 만든 어떤 구체에 마나를 부여하는 일이었다.
8시간마다 5년치 마나를 불어 넣으라 해서 8시간마다 5년치 마나를 불어넣고 있었다.
베나티아는 구체에 마나를 불어넣은 후 자신의 마나를 보충하며 중얼거렸다.
“대단한 꼬맹이라니까. 스스로 마력의 결정 생산법을 만들어 내다니.”
최초의 연금술사 산티누가 만든 마력의 결정.
그걸 누구에게 배우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만드는 법을 알아낸 루엔이었다.
게다가 루엔의 공방 한구석에는 천으로 덮인 큼지막한 물체가 있었다.
베나티아는 천을 살짝 들추며 안에 있는 물체를 확인했다.
몇 번을 봤지만 이 인간형 물체를 설계도 없이 만들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이건 아무리 봐도 ‘그건’데 말이지. 본인이 초코쿠키 제조기라니까 그리 믿어주고는 있다만......”
베나티아로선 어차피 루엔이 무엇을 만들든 별로 상관없었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루엔이 무언가를 만들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을 뿐.
수고했다며 쫄래쫄래 쫓아와 초코쿠키를 내미는 것을 볼 때마다 도와주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기에.
천하의 베나티아도 귀여운 것을 귀여운 것으로 느끼는 감각 정도는 남아있다.
베나티아는 마나호흡을 끝내면서 약간 허전한 느낌을 받았다.
“요즘 따라 마나호흡 할 때마다 조금씩 덜 차는 느낌을 받는단 말이지. 뭐 별로 상관없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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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린트가 말한 이틀은 바다몬스터의 습격도 염두에 둔 시간이었다.
원래는 하루 정도 걸리는 거리엔데 최소 서너 번은 바다몬스터가 습격해오지 않을까 하여 이틀 정도 잡은 것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로엘을 태운 배는 하루 만에 마도섬에 도착하였다.
바다몬스터의 습격이 없었던 건가?
그것도 아니다.
마도섬까지 오면서 무려 10차례의 습격이 있었다.
허나 10차례 모두 선박의 속도를 늦추지 못했다.
습격하자마자 로엘이 베어버렸기에.
게다가 순풍이 더욱 거세게 불어줘서 더 빨리 도착할 수도 있었다.
루엔이 바다몬스터 시체에서 채집하고 싶은 게 있다 해서 채집할 때까지 기다려줬는데 그거만 아니었다면 더욱 빨리 도착했을 거다.
로엘은 난간에 기대어 먼 곳에 위치한 마도섬을 바라보았다.
“저게 마탑이구나.”
마도섬의 크기는 그리 크지 않았다.
기껏해야 왕국 수도 근방의 마을 수준 정도랄까.
대신 마도섬 중앙에 세워진 탑의 크기는 무시할만한 게 못 되었다.
마도섬 중앙에 높은 탑이 하나 세워져 있었는데 그 높이가 하늘에 닿을 정도였다.
루엔이 폴짝폴짝 뛰어와선 로엘의 다리에 매달리며 마탑의 높이를 언급했다.
“전부 100층이야.”
“정말 100층 맞아? 원래는 99층인데 뻥치는 게 아니고?”
“100층 맞아. 내가 99층. 할아버지 100층.”
“루엔이 마탑에서 두 번째로 실력 좋은가 보네.”
“실력이랑 상관없어. 꼭대기층 빼고는 자기 마음대로 써.”
“난 실력 순대로 높은 층을 쓰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예전에는 그랬어. 근데 일일이 이사하기 귀찮아서 폐지했어.”
옛날에는 마법사들이 향상심을 가질 수 있도록 실력 순으로 층을 배치하기로 했는데 최근 들어 바꾸었다 한다.
아래층 사람의 실력이 부쩍 상승하거나, 윗층 사람의 실력이 갑자기 떨어지면 그때마다 이사를 해야만 했다.
인력낭비, 시간낭비, 루엔 용어로 귀찮귀찮까지 하여 그냥 없애버렸다고 한다.
난간에 기대어 바닷바람에 머릿결을 맡긴 채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간이수조에 담겨 있던 셸리는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그녀의 지느러미로는 배 위에서 걸어 다닐 수 없기에 간이수조를 만들어 바닷물을 채워 넣어 그 안에서 지내도록 하였다.
셸리는 성대를 한껏 활용하여 로엘을 불렀다.
“로엘!”
배가 떠나가라 소리를 지른 탓에 배 위에 있는 모든 이가 귀를 붙잡으며 고개를 부르르 떨었다.
로엘은 셸리에게 다가가서 머리를 쥐어박았다.
콩!
“귀머거리 아니니까 살살 불러. 민폐잖아.”
“힝, 저 말고 자꾸 저 꼬맹이만 상대하고 있잖아요.”
“꼬맹이가 아니고 루엔이야.”
“꼬맹이가 꼬맹이죠. 나보고는 더 커서 오라 했으면서 사실은 아예 빈약한 타입이 좋았던 거에요?”
그냥 빈약도 아니라 아예 빈약이라 했다.
루엔이 무표정한 모습으로 다가와선 로엘을 옆으로 밀었다. 그리곤 안주머니에서, 정확히는 그녀의 보관 아티팩트에서 작은 약병 하나를 꺼냈다.
에메랄드로 만들어진 약병 안에는 오일이 담겨 있었다.
셸리는 단박에 오일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아! 레그 오일!”
인어의 지느러미에 바르면 인간의 다리로 바꾸어주는 아티팩트였다.
구 겐크 왕국에서 셸리를 꼬득일 때 썼었던 물건이기도 했다.
구 겐크 왕국이 섭외한 마법사가 장난 삼아 만들었다고 전해지는데 그 마법사가 루엔이었던 거다.
루엔은 셸리의 손이 닿을락 말락 할 거리에서 레그 오일을 흔들었다.
“줄까?”
“네!”
“아예 빈약?”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언니!”
“내가 더 나이 적어.”
“그러면 루엔 님?”
“언니는 어디 갔어?”
“역시 언니라고 부를까요?”
“안 줄까?”
“역시 언니라고 부르겠습니다! 루엔 언니!”
“잘 안 들려.”
“루엔 언니!”
주변에 자기보다 나이 많은 사람만 있기 때문에 언니라 불려 본 적이 없는 루엔이었다.
언니라 불리는 감각이 마음에 들었는지 셸리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며 언니 호칭을 반복하게 만들었다.
로엘은 수조에서 팔을 허우적거리는 셸리와 무심한 표정으로 그녀를 조련(?)시키고 있는 루엔을 보며 생각했다.
‘얘도 은근히 지기 싫어한단 말이지.’
루엔은 초코쿠키를 위로 던져 셸리가 뛰어 올라 받아먹을 수준이 되자 레그 오일을 넘겨주었다.
갑판이 시끌벅적한 사이 배는 마도섬의 항구에 다다랐다.
///
마도섬에 도착하자 맥셀이 로엘 일행을 반겨주었다.
정확히는 루엔을 반겼다.
루엔이 배에서 내리자마자 득달 같이 달려오더니 루엔의 볼에 자신의 볼을 비볐다.
“귀여운 우리 손녀, 그동안 잘 지냈니? 할아버지 안 보고 싶었니? 어휴, 귀여운 우리 손녀~.”
“할아버지 수염. 복슬복슬.”
손녀바보답게 남들 시선 신경 쓰지 않고 듬뿍 애정표현을 하는 맥셀이었다.
게다가 맥셀뿐만 아니라 마탑의 다른 마법사들도 루엔을 둘러싸고 머리를 쓰다듬느라 바빴다.
“허허허, 루엔 요 녀석. 마음대로 가출해서 걱정했잖느냐.”
“예전보다 살이 붙은 것 같은데? 빌로스 왕국에서 잘 지내고 있나보구나.”
“종종 할애비들 얼굴 보러 오거라. 네가 없으니 심심하구나.”
루엔이 마탑에서 사랑 받는 존재라는 걸 알 수 있는 광경이었다.
정작 루엔 본인은 덥석덥석 머리를 헝클어뜨리는 손길이 귀찮은 모양이었지만 말이다.
맥셀은 루엔을 한껏 귀여워해준 후에야 로엘에게 눈길을 돌렸다.
맥셀과 로엘은 손을 내밀어 묵직한 악수를 나누었다.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군.”
“영감님도 여전히 건강하시군요.”
“노인은 건강한 게 자식을 도와주는 거라지 않나. 특별히 신경 써서 지내고 있지. 다들 따라오게나.”
로엘 일행은 맥셀을 따라 마탑으로 향했다.
마도섬에는 마탑의 마법사만 있는 게 있는 게 아니었다.
마탑 주변에는 섬 주민들이 살고 있었는데 어업을 하거나 마탑에서 나오는 물건을 대륙으로 날라다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는 편이었다.
대부분이 어업에 종사하고 있어 집집마다 각종 해산물을 다듬는 중이었다.
루엔이 본스마에서 해산물을 보고 신기해하지 않을 만도 했다.
섬에 외지인이 찾아오는 경우는 드문지 섬 주민들이 로엘 일행을 신기한 듯 쳐다보았다.
맥셀과 로엘은 크게 신경 쓰지 않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자네와 만난 이후에 반영구 회로에 대해 알아보았네. 제법 여러 가지를 알아냈는데 바로 듣겠는가?”
“들어야겠죠. 그 전에 먼저 들어주셔야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로엘은 마도섬에 오면서 겪은 일과 해저섬에 생긴 문제에 대해 말해주었다.
로엘의 이야기를 들은 맥셀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해저섬이 머맨에게... 그거 좋지 않군.”
“마도섬과 머맨도 사이가 안 좋은 편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옛날엔 그랬다더군. 블라스크가 용왕이 되기 전에 괜히 마탑에 시비 걸었다가 해적단 5무리가 박살났었지. 하지만 리바이어던을 모으고 있다는 게 마음에 걸리는군.”
거대 상어의 모습을 한 바다몬스터 리바이어던.
리바이어던의 파도생성능력은 바다 속에서 발휘된다.
맥셀은 불 속성마법 전문 마법사이기에 바다 속의 적에게 타격을 입히기 힘들었다.
“자네가 블라스크를 돕고자 한다면 연금술사들에게 필요한 장비를 만들라고 시키겠네. 이전에 만들어 둔 게 있을 테니 조금만 손보면 물속에서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장비가 만들어질 걸세.”
“그거 다행이군요.”
전장이 바다 속인만큼 마탑의 마법사들이 직접 가세하는 건 힘들겠지만 유용한 장비를 내주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대화를 나누며 걷다보니 어느새 마탑 아래에 도달하게 되었다.
바로 밑에서 올려다본 마탑은 멀리서 봤을 때보다 훨씬 더 위압감 넘쳤다.
고개를 한껏 치켜 올려도 끝이 보이지 않는 높이와 층마다 일정한 간격으로 뚫려 있는 아치형 구멍, 구멍 사이로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는 네모난 상자들과 마법진을 새겼다 지웠다 반복한 흔적이 남아있는 넓은광장까지.
이제야 마법사들의 탑에 도달했다는 게 실감되었다.
맥셀은 뚫려 있는 구멍 중 한 곳에 들어가며 로엘을 불렀다.
“로엘 자네만 따라오게나. 나머지 사람들은 광장 너머에 있는 아티팩트 도매상에게 가도록 하게. 언질을 해두었으니 머무를 건물을 내어줄 걸세.”
다수의 외지인이 찾아오는 경우는 거의 없는 터라 따로 숙박 시설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섬 주민 중 그나마 넓은 부지를 소유한 도매상에게 손님을 대접하라 일러둔 것이었다.
대신 로엘만은 루엔의 공방이 있으니 그녀와 함께 공방에서 머무르기로 했다.
루엔은 마법사들과 재회 인사를 나누고 있었기에 맥셀은 로엘만 데리고 마탑 안으로 들어갔다.
마탑 1층은 중앙에 원형 홀이 있었고, 홀 주변으로 통로가 뻗어 있는 형태였는데 통로마다 고깔모자를 쓴 이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수련마법사로서 아직 마법의 기초만 배우고 있어서 1층에서 수업 및 잡무를 겸하고 있는 것이었다.
속성마법, 변신마법, 치료마법, 연금술 중 전공을 선택해 120학점을 채우고 1써클 이상의 마나회로를 새기면 1층에서 벗어날 수 있다. 1층에서 수련딱지를 떼면 2층~100층에 위치한 마법사들 중 한 명을 택해 제자로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마법사가 되겠다는 사람이 많은 편이 아니고 1층을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4~5년이 걸리기 때문에 날이 갈수록 신입 마법사의 숫자가 줄어들고 있다 한다.
그래서 마탑도 고령화 현상을 겪고 있었다.
맥셀은 원형 홀을 지나 거대한 벽에 달린 세 개의 줄 중 한 곳 앞에 섰다.
세 개의 줄에는 돌로 만들어진 상자가 매달려 있었는데 마탑 위아래로 이동하고 있었다.
“마탑이 자랑하는 이동상자일세. 이걸 타고 위로 가도록 하지.”
“계단으로 이동하는 게 아니었군요.”
“허허, 이 나이에 계단으로 100층까지 올라갔다간 무릎이 남아나지 않을 걸세.”
맥셀이 줄 앞에 새겨진 마법진에 서자 이동상자가 아래로 내려왔다.
1층에 도착한 이동상자의 문이 자동으로 열리면서 맥셀이 안으로 들어갔다. 로엘도 그를 따라 이동상자 안에 들어가자 문이 닫히면서 위로 올라가는 느낌이 들었다.
로엘은 이동상자에 뚫린 작은 구멍을 통해 바깥을 보았다.
위로 올라갈수록 지상의 풍경이 작아졌다.
아득히 높은 곳까지 올라가던 중 이동상자가 멈추었다.
이동상자의 문이 열리면서 ‘99층’이란 문구가 새겨진 벽이 보였다.
100층으로 가는 줄 알았는데 99층에서 멈춰 섰다.
99층이라면 루엔이 쓰던 층 아니었나.
맥셀이 의아해 하는 로엘의 표정을 읽곤 먼저 내리면서 손짓을 하였다.
“반영구 회로를 얘기하기 전에 자네에게 해둬야 할 이야기가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