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8 4-2. 파도 위의 검무 =========================
4-2. 파도 위의 검무
귀족회담도 끝났겠다 로엘 일행은 테헤란으로 돌아가는 게 아닌 빌로스 왕국 동남쪽으로 향했다.
동남쪽에서 배를 타고 가이아 대륙 남쪽 해역을 지나 마탑이 있는 마도섬에 갈 예정이었다.
빌로스 동남쪽의 항구도시인 본스마.
새우가 특산물인 도시답게 도시 곳곳에 갈릭새우, 새우버터구이가 냄새가 식욕을 돋우고 있었다.
본스마 앞바다에서 잡히는 새우의 종류만 하더라도 굉장히 많아서 일반적으로 많이 잡히는 검은 새우부터 부채새우, 왕새우, 꼬마새우 등 갖가지 새우를 이용한 요리가 발전한 곳이기도 했다.
새우의 경우 운반할 때 상하기 쉬운 재료라 빌로스 왕궁에도 아주 가끔씩만 올라오는 재료였다.
내륙에선 먹기 힘든 새우를 본스마에서는 내륙 가격의 10분의 1로 먹을 수 있었다.
로엘과 메이아는 차창 너머로 보이는 수산시장의 풍경에 시선을 빼앗겼다.
“메이아, 저걸 봐. 바구니 안에 새우가 살아있어.”
“정말이지 새우천지네요. 본스마에는 사람 반 새우 반이라더니 진짜였어요.”
“루엔, 너도 봐봐. 새우다 새우. 새우 봤새우?”
활기찬 수산시장의 분위기에 탑승하며 아재개그를 날려보았지만 루엔은 시큰둥할 뿐이었다.
조그마한 것에도 신기해하는 그녀가 어째 수산시장에는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로엘은 종달새 모이 쪼듯 루엔의 작은 어깨를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루엔? 저기 보라니까. 새우야 새우. 새우가 있새우.”
루엔이 눈을 가늘게 뜨며 로엘을 노려보았다.
눈동자에 연민의 감정이 담겨 있었다.
“로엘 찬양가 때문에 아직도 멍한 거려나.”
“나참 무안하게시리. 하도 반응이 없어서 해본 거야. 루엔은 새우 안 신기해?”
“별로. 마도섬에서도 해산물은 많이 잡혔어.”
“아차, 섬 출신한테 바다 본 적 있냐고 물어본 격이었네. 그나저나 고향에 돌아가는 건데 설레지 않아?”
“전혀. 섬에 할아버지만 득실득실. 매일매일 오지 말라는데도 찾아와서 귀찮아.”
귀찮다고 말하는 것치곤 자꾸만 엉덩이를 들썩거리고 있었다.
루엔이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냈던 자들이 있고, 태어나면서 보아온 풍경이 있고, 루엔의 원래 공방이 있는 곳이니 기대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로엘은 루엔을 동행시키길 잘했다 여겼다.
///
항구에 도착하니 익숙한 얼굴이 기다리고 있었다.
설탕대란 때 로엘에게 삼색비약을 바쳤던 라벤더 상단 소속의 상인 블린트였다.
클라임 후작이 로엘이 타고 갈 배를 수배해주었었는데 라벤더 상단에 의뢰를 넣은 모양이었다.
블린트는 설탕대란 때보다 훨씬 안색이 좋아진 모습으로 로엘을 맞이했다.
“미천한 백성이 하늘같은 전하를 뵙사옵니다.”
“오랜만이군, 블린트. 안색이 많이 좋아졌는 걸?”
“모두 전하의 은총 아니겠습니까.”
“요즘 그리폰을 너무 많이 타서 멀미날 지경이야. 적당히 태우고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줘.”
“아, 예. 배는 중형선을 준비해뒀고 저를 비롯해 베테랑 선원들이 탈겁니다. 전하와 여성분들을 위한 선실은 따로 꾸며두었고, 그란데 백작님과 기사 분들을 위해 넓은 선실을 개별실로 개조했습니다. 기사 분들은 조금 좁더라도 불편을 감수해주십시오.”
그란데 백작과 기사들은 불편은커녕 블린트의 노고를 고맙게 여겼다.
“같이 써도 불편함은 없을 텐데 괜한 수고를 끼쳤군.”
“괜찮습니다. 클라임 후작님이 말씀하시길 반드시 그란데 백작님 방은 따로 마련해두라고 하시더군요.”
“으으, 후작님이 무슨 의도로 그런 말씀을 하신 건진 모르겠지만 좋은 의도로는 안 느껴지는군.”
“아하하, 배에 오르시기 전에 식사부터 하시지요. 본스마 최고의 요리들을 마련해두었습니다.”
블린트가 가까운 고급 식당으로 로엘 일행을 데려가주었다.
본스마 최고의 요리라는 말이 허언은 아니었는지 최고의 요리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새우를 이용한 요리뿐만 아니라 바다에서 나는 신선한 해산물을 듬뿍 이용한 상차림이었다.
그 중에서도 일품인 건 치즈와 야채조각을 듬뿍 얹어 구워낸 왕새우 오븐구이였다.
다른 사람들이 새우를 껍질 채로 우적우적 먹고 있는 가운데 그란데 백작은 같이 나온 조개 스프에 눈독을 들였다.
붉은고추를 썰어 넣어 칼칼함이 일품인 조개스프를 먹더니 로엘에게도 권하였다.
“전하, 조개 스프 드셔보시지요. 술을 부르는 맛입니다.”
“정말 그렇군. 한 잔할까?”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블린트가 빠르게 다가와 두 사람을 말렸다.
“죄송합니다만 술은 삼가주십시오.”
“배 멀미 때문에 그래?”
“아뇨, 바다몬스터 때문입니다.”
“바다몬스터?”
“최근 이상하게 동쪽 해역에 바다몬스터가 늘어났습니다. 동쪽으로 가는 뱃길의 대부분이 바다몬스터 때문에 막혔죠. 이번에는 한 번도 난파사고가 없는 뱃길로 가겠지만 혹시 모르니 항상 준비하고 있어주십시오.”
바다몬스터는 육지몬스터보다 몇 배는 더 까다롭다.
바다라는 넓이에 걸맞게 무지막지한 몸집의 몬스터가 많았으며 지형의 특성상 사람은 배를 기반으로 싸워야 하기 때문에 배가 부서지면 그대로 삼켜지는 경우가 많았다.
로엘과 그란데 백작은 수중전에 익숙한 편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마나 마스터와 마나 익스퍼트이니 기사들보단 훨씬 듬직한 존재라 할 수 있었다.
로엘로선 의문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바다몬스터는 용왕의 권능 때문에 인간을 습격하지 않는 거 아니었나?”
중립지대 중 한 곳인 해저섬.
해저섬을 다스리는 용왕은 대대로 블루오션이라는 보석을 이마에 박게 된다.
블루오션을 지닌 용왕은 바다의 모든 몬스터를 부릴 수 있으며 지치지 않는 체력을 지니게 된다고 한다.
이번 용왕은 200년 전에 즉위한 블라스크란 자로 평화를 사랑하는 자였다.
이전 용왕들은 뱃길을 열어주는 대신 인간에게 수많은 재물을 요구해왔지만 블라스크는 대가 없이 뱃길을 열어주었다. 게다가 권능을 한껏 이용하여 바다몬스터에게 인간을 습격하지마란 명령까지 내려주었다.
덕분에 200년 간 평온했던 뱃길이었으나 최근 들어 다시 바다몬스터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는 거다.
“제물이라도 달라는 건가.”
“모르겠습니다. 제물이 필요하면 무언가 달라고 요구해 와야 정상인데 연락 한 통 없더군요.”
“용왕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보군. 그렇다곤 해도 우리가 바다 속 사정까지 일일이 알 순 없어. 바다몬스터가 나타나면 제거하고 지나가는 수밖에.”
블린트는 로엘과 그란데 백작이 검을 쥐게 하는 것이 미안한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편히 모시고 가도 모자랄 입장인데 이리 청을 드리게 되어 정말 죄송합니다.”
로엘과 그란데 백작은 술 생각을 싹 접고 자신만만하게 검갑을 퉁겼다.
“사과할 거 없어. 이럴 때 쓰라도 있는 힘이니까.”
“전하의 등은 제가 지키겠습니다.”
“나 신경 쓰다가 바다 속으로 끌려들어가지나 말라고.”
“하하, 전하 대신 끌려들어가는 거라면 얼마든지 환영입니다.”
두 사람은 한껏 웃으며 식사를 마쳤고, 소화를 할 겸 잠시 휴식을 취한 후에야 배에 올라탔다.
///
이전 생애에서 배를 안 타본 건 아니지만 먼 바다로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로엘의 항해를 축복하듯 순풍이 불어왔고 상인이자 베테랑 뱃사람이기도 한 블린트가 선장을 맡았다.
로엘은 조종키를 잡고 있는 블린트 옆으로 가서 말을 걸었다.
“우린 항해에 대해선 초보나 마찬가지니까 어려워 말고 지시사항이 있으면 바로바로 말해줘.”
배 위에 존재하는 직위는 선장과 선원뿐이다. 그래야만 모두가 산다.
...라는 말이 있듯 배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려면 선장의 판단을 우선시해야 한다.
블린트가 로엘의 위치를 감안하여 정확한 판단을 하지 못할까봐 미리 말해두는 것이었다.
특히나 이번처럼 배가 난파당하면 죄다 물고기밥이 되는 위험한 항로에선 더더욱 선장의 말에 따르는 게 중요했다.
블린트는 로엘의 믿음에 보답하기 위해 집중력을 날카롭게 세웠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외칠 것이니 그때까지는 편히 계십시오.”
블린트를 비롯하여 선원들, 기사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기합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선장실에서 나온 로엘은 그늘에 앉아있는 루엔과 메이아를 발견했다.
루엔은 유리병을 꺼내 뚜껑을 열더니 손바닥에 톡톡 두드려 안에 있는 액체를 빼내 얼굴과 팔에 바르고 있었다.
“그건 뭐야?”
“내가 개발한 자외선 차단제. 안 바르면 살 타버려.”
“귀찮아서 그런 건 안 할 줄 알았는데 의외네.”
루엔이 검지를 들더니 좌우로 두 번 까딱였다.
“괴수가 그랬어. 피부는 소중한 것.”
“아, 그러고 보니 레이아는 피부미용이라면 끔뻑 죽는 타입이었지. 입욕제도 특별히 주문한 것만 썼었고.”
“내가 개발해준 입욕제 잘 쓰고 있으려나.”
루엔의 옆에 앉아 있던 메이아가 에아에게서 전해들은 대량거품 입욕제를 떠올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루엔 님 돌아가시면 또 레이아 님이랑 싸우시겠네.’
말리는 건 또 메이아 몫인지라 벌써부터 한숨이 새어나왔다.
로엘은 메이아를 쳐다보다가 그녀의 피부상태를 확인했다.
“너도 발라두는 게 어때?”
“저요? 에이, 전 됐어요.”
“됐기는. 내 전담일 때보다 더 안 좋아졌잖아. 팔 내봐.”
루엔에게서 자외선 차단제를 빌린 로엘이 메이아의 팔을 붙잡고 그녀의 팔에 듬뿍 발라주었다.
로엘의 묵직한 손길 속에서 메이아가 고개를 약간 숙였다.
붉어진 얼굴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에.
로엘은 손바닥에 자외선 차단제를 발라 메이아의 얼굴에 가져다 대었다.
얼굴을 직접 만지려는 손길에 메이아가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
“자, 잠시만요. 제가 직접 바를게요.”
“빼지 말고 가만히 있어봐. 오빠동생 사이나 다름없는데 부끄러워할 게 뭐있어. 어휴, 피부가 많이 상했네. 만져보니까 확 느껴져. 루엔, 너랑 레이아랑 메이아를 얼마나 고생시키고 있는 거야?”
루엔이 손을 번쩍 들며 당당하게 대답했다.
“미안.”
“너무 당당하게 사과하니까 뭐라 하지도 못하겠네.”
로엘이 메이아의 얼굴에서 손을 때자마자 루엔이 웃옷 안주머니에서 수첩 한 장을 꺼냈다.
“로엘. 신발 내밀어봐.”
신발을 내미니 루엔이 수첩에서 종이 두 장을 뜯어내 각각 로엘의 양쪽 신발에 붙였다.
종이에는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는데 종이가 녹으면서 신발에 마법진이 새겨졌다.
“수상보행마법이야. 물 위에서 걸을 수 있어.”
아까 식사하면서 로엘과 블린트의 대화를 들었는지 미리 수상보행마법진을 만들어둔 모양이었다.
루엔이 가진 간이마법진부여 부적 덕분에 종이를 붙인 것만으로도 마법진이 새겨진 것이었다.
만약을 대비해 로엘만은 수상보행을 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인데 사용할 상황은 의외로 금방 찾아왔다.
선장실에서 블린트가 전방을 보며 외치길.
“크라켄이다! 전원 난간에 붙어라! 놈의 다리가 갑판 위에 올라오게 해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