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8 3-6. 그래도 그란데 백작은 그란데 백작이다 =========================
오래 전부터 겐크 왕국은 대륙통일이라는 목표로 아슬아슬하게 묶여 있었다.
아지스는 4공작을 전혀 신뢰하지 않았다.
신뢰감을 형성하는 대신 외부에 적을 만들어 억지로 똘똘 뭉쳐놓았을 뿐이다.
혈기 넘치는 영주들을 제어하기엔 그만한 방법이 없으니까.
4공작을 신뢰하지 않으니 골렘이니 드워프 왕국이니 손을 댔던 것이다.
대륙통일이 끝난 후에도 4공작을 제어하기 위해서.
지금에 와서는 각종 계책을 부린 것이 아지스가 4공작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대외적으로 공표한 꼴이 되어버렸다.
그뿐이던가.
최근에는 왕궁의 귀족들마저도 등을 돌리게 만들어버렸다.
왕궁의 귀족들이 포기하지 않고 간언을 올렸는데도 아지스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이제 아지스의 명령을 따를 자는 남아있지 않았다.
아지스는 가만히 서있기만 하는 신하들에게 윽박을 질렀다.
“왜 가만히들 있느냐! 왕궁에 적이 들어왔는데 짐을 지키려 하지는 못할망정 어째서 가만히 있느냔 말이다!”
“전하, 이제 끝났습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로브! 로브를 쓴 그 작자를 불러와라! 다시 이놈을 매장시킬 무언가를 내게 바쳐라!”
장내에 있던 사람들 전원이 아지스가 미쳐서 있지도 않은 자를 찾는다 여겼다.
그러나 로엘만은 아지스의 말을 그냥 흘려듣지 않았다.
로엘은 사태가 여기까지 이르게 된 실마리를 잡았음을 직감하곤 아지스에게 다가섰다.
“이봐, 로브를 쓴 자라 했었지. 누군지 말해봐.”
“이겼다고 생각하느냐. 나는 아직... 크헉!”
더 이상 헛소리를 들어줄 생각은 없었기에 로엘은 바로 아지스의 무릎 옆을 걷어찬 후 머리를 잡아 바닥에 내리꽂았다.
그 동작이 어찌나 스무스한지 아지스는 본인 스스로 굴복한 양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찧게 되었다.
쿵!
로엘은 검집을 통째로 허리춤에서 떼내어 뭉툭한 검집 끝을 아지스의 쇄골에 대었다.
“아직도 꿈을 꾸고 있나 보군. 좀 더 거칠게 깨워줄까?”
여전히 정신을 못 차렸는지 아지스는 고개를 들며 욕지거리를 내뱉으려 했다.
물론 그 전에 로엘의 검집이 아지스의 쇄골을 가격했지만 말이다.
빠각!
어느 뼈든 부러지면 아픈 건 당연하지만 쇄골은 그 강도가 특히 더하다.
아디만티움 검을 붙들기 위해 만든 아디만티움 검집은 좋은 둔기가 되어주었다.
공격을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닌 만큼 검날의 깔끔한 고통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지스의 쇄골이 사정없이 부서지면서 무질서한 고통을 선사했다.
아지스는 체면도 잊고 바닥을 뒹굴었다.
평생 고통이라곤 모르던 몸에 최악의 고통이 새겨졌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끄아악! 으으으!”
로엘은 아지스의 사정 따윈 알 바 아니라는 듯 다시 검집을 들이대며 말했다.
“아직 잠이 덜 깬 것 같은데 한 번 더 해줄까?”
아지스의 고개가 벌이 날개짓하듯 좌우로 붕붕 흔들렸다.
미친놈도 아픈 건 싫은 법이다.
로엘은 이제야 상황파악을 하고 늘어진 아지스를 보며 다시 한 번 질문을 날렸다.
“로브 쓴 놈에 대해 말해봐.”
///
발로란으로 들어가는 길은 여러 군데가 있지만 군대가 이동할만한 큰 길은 서쪽 길뿐이었다.
윈터 공작은 가로수가 심어져 있는 넓은 길을 찾아 그리로 군대를 몰았다.
“발로란이 코앞이다! 좀 더 속도를 높여라!”
아지스에게서 출전명령을 받았을 때만 하더라도 심히 고민 중이었었다.
아지스를 따르느냐 마느냐.
마음을 정하지 못해 몬스터를 방어한다는 핑계를 대고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었다.
그건 그란데 백작의 서신을 받은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허나 뒤이어 로엘이 살아있다는 것과 드래곤을 몰고 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생각했다.
이제 겐크 왕국은 무너지겠구나!
그래서 그란데 백작의 서신에 적혀 있던 3공국 설립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결심을 한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먼저 발로란에 입성하여 왕궁을 장악한 이가 3공국 설립 때 발로란을 안고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윈터 공작은 기동력만을 중시하여 휘하의 기마대 300기만 이끌고 밤낮할 것 없이 남쪽으로 달려왔다.
발로란을 코앞에 둔 지금 윈터 공작은 자신이 가장 빨리 도착했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오로지 기동력만을 중시해서 최소한의 병력만 데리고 왔어. 다른 녀석들이 나보다 빨리 올 리 없지.’
발로란을 먹게 된다는 건 겐크 궁전도 손에 넣게 된다는 것.
같은 공왕이라도 그가 앉게 될 자리는 왕좌가 되리라.
윈터 공작은 왕좌에 앉은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남몰래 히죽거렸다.
발로란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들어서면서 막판 스퍼트를 올리려 했으나 언덕 하나를 넘는 순간 속도를 줄을 수밖에 없었다.
전방에 수천 명의 병사가 발로란을 향해 이동 중인 게 아닌가.
병사들이 길목에 늘어서서 이동하고 있는 탓에 기마대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윈터 공작은 병사들 사이에서 나부끼고 있는 깃발을 보았다.
깃발에는 빌로스 왕국의 문양인 독수리 문양이 그러져 있었다.
“빌로스의 병사라고? 이들이 대체 언제 여기까지 왔단 말이냐.”
빌로스, 킬더 연합군은 서부 전선이 완전히 붕괴되어 죄다 성문을 활짝 열어주었기에 거침없이 오다보니 여기에 이르게 되었다.
윈터 공작은 막혀 있는 길목을 보며 조급해 하였다.
“빨리 가야 하는데 큰일 났구나.”
“공작님, 이 무리를 이끌고 있는 자는 빌로스 왕국의 드리안 공작이라 합니다.”
“이상하군. 분명 그란데 백작은 겐크 왕국을 3등분하여 3공국으로 만든다 하였는데 어째서 빌로스 군이 여기 있단 말이냐. 설마 우리로 하여금 소수의 인원만 움직이게 하려고 판을 깔아둔 건가!”
빌로스 왕국이 처음부터 겐크 왕국을 독차지할 생각이었다면 모든 게 들어맞는다.
발로란을 점령한다 하더라도 북, 동, 남의 3공작이 지원군을 보내면 되러 고립될 수도 있다.
그걸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아군인 척 끌어들여 소수의 인원으로 급히 오도록 만든 것이다.
소수의 인원만 끌고 온 3공작을 제압하면 그야 말로 완벽하게 겐크 왕국을 제압한 셈이 되니까.
윈터 공작은 완전히 함정에 빠졌다 여겨 식은땀을 흘렸다.
“이런 식으로 3공작을 완전히 농락하다니... 그란데 백작. 무시무시한 자로다.”
“어떻게 할까요? 전방의 드리안 공작은 이미 우리의 도착을 알아차렸습니다.”
“크윽, 후회해봤자 어쩔 수 없다. 모든 건 경솔하게 움직인 내 탓이니라.”
“그러면......”
“적어도 3공국 설립만은 뒤집지 않을 터. 빌로스의 속국으로서 공국 설립이겠지만 받아들이는 수밖에.”
전방에선 드리안 공작이 말을 몰고 행렬 후미로 오고 있었다.
드리안 공작은 윈터 공작의 모습을 확인하곤 경계하는 태세를 갖추며 말을 꺼냈다.
“얼어붙은 땅의 수호자여. 오랜만에 얼굴을 맞대는구려.”
“오랜만이오, 과수원의 파수꾼. 이런 곳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소.”
“나 역시 마찬가지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소. 몬스터 방비를 핑계로 북쪽에서 나오지 않기로 했던 그대가 이곳에 온 이유가 뭐요? 대답 여부에 따라 창끝의 방향을 달리할 것이오.”
아직 그란데 백작이 겐크 3공작에게 서신을 보냈다는 걸 모르는 드리안 공작이었다.
그래서 전투도 마다하지 않으려고 검을 뽑아 마나 블레이드를 생성했다.
드리안 공작의 전의는 윈터 공작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
‘무시무시한 전의로군. 역시 우리가 저항하면 죽일 심산이었어.’
윈터 공작은 허튼 생각하지 않고 빌로스 왕국이 강한데다 책략 또한 뛰어나다 여겨 얌전히 투항하였다.
“오해하지 마시오. 이미 겐크 왕국은 무너졌고 나를 비롯한 3공작은 빌로스 왕국의 뜻에 따를 것이오. 정의를 잃은 왕가를 위해 싸울 생각은 없으니 검을 내려주길 바라오.”
윈터 공작이 의외로 쉽게 투항해오자 드리안 공작은 이리 생각하였다.
‘로엘 전하의 위엄이 겐크 3공작에게도 닿은 모양이구나. 역시 대단하신 분이로다.’
“허허허, 그런 거였구려. 전하께서 아주 기뻐하실 것이오.”
이 모든 게 로엘의 위엄이라고만 여겨 기쁘게 웃는 드리안 공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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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겐크 왕궁에선 아지스의 이야기가 끝난 참이었다.
로엘은 아지스에게서 검은로브 사내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정체 모를 사내가 마력의 결정체를 준 것도 모자라 세이렌 포섭에 도움을 주었으며, 녹색유령이란 기이한 존재를 데려왔다고 한다.
얘기를 들은 로엘은 카넨에게 고갯짓을 하였다.
“카넨, 아지스를 포박해라. 전범이니 후에 브리튼 교에 넘겨 처벌을 받게 하겠다.”
“네.”
중립지대를 건드린 것도 모자라 브리튼 교의 소환을 무시하고 군사를 일으켰으니 아마 지저감옥에 갇히게 될 것이다.
한 번 갇히면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다는 곳이니 사실상 아지스는 끝났다 볼 수 있었다.
카넨이 아지스를 포박하는 동안 겐크 왕국의 신하들은 전원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대었다.
아지스와는 뜻을 달리했다곤 하나 전범국의 신하들이다.
그들 역시 처분을 기다려야 하는 입장이었다.
로엘은 답 없는 왕을 끝까지 보필해보려고 노력했다는 걸 알기에 모질게 대하진 않았다.
“그대들은 자택으로 돌아가 근신하도록. 그대들의 처분 역시 브리튼 교에 맡기겠다.”
겐크 왕국이 로엘에게 가한 행위를 생각하면 여기서 당장 검을 빼들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을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엘은 연대책임을 묻는 대신 잘잘못을 명백하게 가리려 하였다.
겐크 왕국 신하들은 로일의 공명정대함에 감복하여 바닥에 머리를 세 번 찧었다.
대강당 안을 얼추 정리한 로엘은 검은로브 사내에 대한 단서를 잡고자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 전까지 녹생유령을 잡아뒀다던 지하수련장에 가보기로 했다.
마법진이 남아있다면 단서를 잡을 수도 있으니 베나티아를 데려가기로 했다.
“누님, 누님은 저랑 지하수련장에 갑시다. 그리고 그란데 백작은 당장 브리튼 교에 서신을 보내도록 해.”
겐크 왕국을 해체하고 공식적으로 3공국을 설립하려면 브리튼 교의 허가가 필요하다.
선언을 하려면 갈레오리 교주가 직접 와야 하기에 이쪽에서 미리 서신을 보내둬야 했다.
그란데 백작은 로엘의 명령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얼른 작성하여 케시어로 보내겠습니다.”
“아, 미리 말해두지만 난 3공국을 떠맡을 생각은 없어. 3공국은 브리튼 교보고 맡으라고 적어. 알겠어?”
“알겠습니다.”
단단히 못을 박아둔... 아니, 로엘로선 단단히 못을 박아뒀다고 생각하며 베나티아와 함께 대강당에서 나갔다.
중요한 일을 맡게 된 그란데 백작은 의미심장한 말을 중얼거렸다.
“떠맡을 생각이 없으시다 하셨지. 흐음, 무슨 뜻인지 알겠군. 걱정 마십시오, 전하. 서신에 전하의 뜻을 확실히 담아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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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엘과 베나티아는 나선형 돌계단을 밟고 내려가 겐크 왕궁 지하수련장에 도달했다.
횃불이 없어 어두운 가운데 베나티아가 손가락을 튕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