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7 3-6. 그래도 그란데 백작은 그란데 백작이다 =========================
아이만 백작이 벽에 걸린 가문의 검을 빼어들었다.
자신의 출세길을 쥐고 있는 뭉크 공작이 죽었다는 말부터 시작하여 드래곤까지.
믿을 수 없는데다 믿고 싶지도 않은 이야기뿐이었다.
아이만 백작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 여겨 다른 귀족들의 의견을 물었다.
“자네들도 한 마디씩 해보게나. 이 작자가 자신이 얼마나 미친 소리를 하고 있는지 말일세.”
귀족들이 아이만 백작의 말에 동감하며 호응을 해줄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모두가 대답을 하는 대신 창문 바깥을 보고 있었다.
믿기지 않는 것을 보고 있는 양 입을 쩌억 벌린 채로.
아이만 백작도 그들의 시선을 따라 눈동자를 움직였다. 그리곤 그 역시 창문 바깥에 있는 한 존재를 보게 되었다.
말로만 듣던 드래곤이... 푸른 비늘을 가진 블루 드래곤이 샛노란 눈동자를 창문 가까이 대어 방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블루 드래곤 위에 타있던 로엘이 발로 창문을 차서 열어내며 말했다.
“길 좀 물어보려는데 여기서 겐크 왕국 수도로 가려면 어느 방향으로 가야 되지?”
마치 마차 타고 가다가 현지인에게 길 물어보는 모양새였다.
아이만 백작은 들고 있던 검을 떨어뜨리며 슬며시 반대쪽 창문 너머를 가리켰다.
“이쪽 방향으로 쭈욱 가시면 됩니다.”
로엘은 베나티아의 뿔을 손바닥으로 찰싹찰싹 두드리며 말했다.
“거봐요, 누님. 제가 저쪽이라고 했잖습니까.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갈 뻔했네.”
“너 지금 나 때린 거 맞지? 확 뽀사버린다. 어디 하늘같은 누님을 때려?”
“이게 어떻게 때린 겁니까. 쓰다듬은 거지.”
“할 거면 인간 모습일 때나 해라. 뭐... 꽤 쓸 만한 쓰담쓰담이었으니까.”
“예예, 어련하시겠습니까. 출발하시죠. 아, 뭔가 바빴던 것 같은데 방해해서 미안. 하던 일들 마저 하도록 해.”
용건은 끝났다는 듯 웃으면서 손을 흔드는 로엘이었다.
베나티아가 날아오르면서 열린 창문을 통해 강한 바람이 들어왔다.
그 탓에 방 안의 물건이 마구 흩날리면서 엉망이 되었다.
로엘을 태운 베나티아가 동쪽 숲 너머로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진 후에도 방 안의 귀족들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얼어붙어 있던 아이만 백작은 벼락이라도 맞은 양 몸을 부르르 떨며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드, 드래곤이다! 로엘 국왕이 드래곤을 몰고 왔다!”
이제야 말을 믿어주는 것을 본 기사가 다시 용건을 꺼내들었다.
“이제 믿어주시겠습니까? 그러니 얼른 수도로......”
“수도는 개뿔! 이 나라를 망했어! 수도에 드래곤이 뜰 텐데 왕궁이고 뭐고 남아있을 턱이 있느냐!”
겐크 왕국이 망하는 건 시간 문제였다.
아이만 백작을 비롯한 귀족들은 진격이고 뭐고 자기 살 길을 찾기 위해 영지로 돌아가기 바빴다.
이러한 상황이 겐크 왕국 서부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
먼저 파견되어 킬더 왕국 동쪽 국경에 도착한 드리안 공작은 킬더 왕국군과 합류하였다.
겐크 왕국이 선전포고를 한 이상 킬더 왕국도 가만히 있을 순 없었기에 선발대를 뽑아 겐크 왕국으로 진격시키기로 했다.
그래서 인터 공작과 드리안 공작을 포함한 3천 명의 선발대가 겐크 왕국 국경을 넘게 되었다.
킬더 왕국에서 겐크 왕국으로 넘어가기 위한 주요 길목 중 한 곳인 벨루루미 협곡.
인터 공작과 드리안 공작은 협곡을 앞에 두고 작전회의에 나섰다.
킬더 왕국의 2대 공작 중 한 명이자 쉰을 넘긴 여귀족.
인터 공작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이 협곡은 의외로 중앙 부분은 넓어요. 전방을 방패병으로 들어가고 기사들을 중간에 섞도록 하죠.”
“그게 낫겠군. 성벽은 중앙 부분에 건설된 모양이지?”
“중앙 부분을 제외하곤 지반이 약해서 어쩔 수 없이 넓은 부분에 짓게 된 케이스죠. 성벽에 도착함과 동시에 기사들을 양옆으로 퍼트려서 한순간에 전방 압박을 해야 해요.”
“타이밍이 중요하겠군. 매복 가능성은?”
“아까 정찰대를 보냈어요. 절벽 위로 올라가는 길이 많아서 확인하기 쉽죠. 적도 그걸 안다면 매복으로 병력을 분산시키는 짓은 하지 않을 거예요.”
정찰 결과 매복은 없는 걸로 판정되었다.
인터 공작과 드리안 공작은 예정대로 방패병을 먼저 들여보내고 그 뒤에 기사들을 배치하였다.
물론 두 사람은 방패병과 기사 사이에서 말을 몰고 언제든지 선두로 치고 나갈 수 있게 대기했다.
협곡 안으로 들어가 성벽이 육안으로 확인될 즈음.
성벽 위에 있던 겐크 왕국 병사들이 부산하게 움직였다.
인터 공작과 드리안 공작 입장에선 바쁘게 방어태세를 취하는 것처럼 보였다.
“군기가 바짝 잡혀있군.”
“뚫는 게 쉽지 않겠어요.”
그리 말하며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그런데 이게 웬걸.
아직 연합군은 넓은 지대로 나오지도 못했는데 성문이 열리면서 성벽을 지키는 지휘관이 백기를 들고 나왔다.
“항복! 항복입니다!”
인터 공작과 드리안 공작은 뭐가 뭔지 알 수 없어 말을 몰아 항복하러 나온 겐크 왕국 지휘관에게 다가갔다.
“어째서 항복한 것이냐?”
“이미 겐크 왕국은 망했습니다. 빌로스의 로엘 국왕께서 블루 드래곤을 타고 나타나 순식간에 뭉크 공작을 사살하고 수도로 날아갔습니다. 드래곤까지 다루는 나라를 어찌 이깁니까. 그래서 항복한 것입니다.”
두 공작은 이미 뭉크 공작이 죽었다는 것과 로엘이 드래곤을 타고 나타났다는 말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실제로 겐크 왕국 서부 성벽의 지휘관이 스스로 문을 열었으니 사실이라고 봐야했다.
드리안 공작은 생사가 불분명했던 로엘이 살아있다는 걸 알게 되자마자 고개를 하늘로 들었다. 그리곤 눈을 감으며 손가락으로 미간을 만지작거렸다.
눈물이 새어나오려 하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
“그랬군. 살아계셨구나. 돌아가실 리 없다 생각은 했지만... 큭.”
드리안 공작은 코를 먹으며 소매로 눈가를 훔친 후 눈에 힘을 주었다.
로엘이 살아있다!
게다가 드래곤까지 부리게 되었다!
인간이 어떻게 위대한 존재를 부릴 수 있냐고?
감히 평가할 수조차 없는 분이신데 드래곤쯤 부려도 놀랄 게 무에 있겠는가!
드리안 공작은 항복한 지휘관을 향해 말했다.
“전하께서 겐크 왕국 수도로 가셨다 했나?”
“네, 각 지방의 귀족들에게 드래곤의 위엄을 선보이며 수도로 가는 길을 물었다 합니다.”
“인터 공작. 이대로 겐크 왕국 수도로 직행하도록 하지.”
“드리안 공작, 그 말은......”
“평화를 사랑하시는 분이지만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가지 않을 생각이신 거지. 얼른 가서 힘이 되어드려야 하네. 겐크 왕국 정벌 시작일세.”
///
겐크 왕국의 수도 발로란.
겐크 왕궁에선 아지스가 길길이 날뛰고 있었다.
“뭉크 공작이 사망? 서부 전선이 자멸했다고? 나보고 지금 그 말을 믿으라는 것이냐!”
소식을 전해온 한 병사가 벌벌 떨며 입을 열었다.
“서부 전선에서 탈주한 자들이 한 말이니 틀림없습니다.”
“탈주? 군법을 어긴 자들이 퍼트린 말을 지금 사실이랍시고 내게 고하는 건가!”
“하지만 이미 아이만 백작을 비롯하여......”
“듣기 싫다! 모우 전차부대를 준비시켜라! 짐이 직접 서부 전선으로 향하겠다!”
한 병사가 서부 전선 붕괴를 알리러 온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건만 또 다른 병사가 왕궁 대강당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전하! 큰일입니다!”
“어찌하여 네놈들은 큰일! 큰일! 가져올 게 큰일밖에 없더냐!”
“네?”
“가져왔으면 말을 해라!”
“아, 네! 지금 북, 동, 남의 3공작들이 병사를 이끌고 발로란으로 오고 있습니다!”
“윈터, 이스트, 제농 공작이?”
“브리튼 교의 파문을 빌미 삼아 정의를 실현한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브리튼 교가 아지스를 파문한 것까지는 예상한 일이다.
파문을 당한다는 건 영주들에게 반기를 일으킬 명분을 쥐여 주는 것.
명예란 곧 정의를 대변하는 말이며 충은 정의 안에 들어가는 하위항목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아지스는 겐크의 4공작이 자신을 따를 거라 생각했다.
그깟 브리튼 교의 파문보다 대륙통일을 우선시 할 거라 여겼다.
그들을 휘어잡을 정도의 위엄은 유지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반기를 드는 건가.
아지스는 모든 게 어긋나고 있음을 느꼈다.
그의 주름진 얼굴이 악귀의 가면마냥 일그러졌다.
“왜 사사건건 일이 틀어지는 것이냐. 로엘, 로엘 그 자식과 마주친 이후부터 꼬이기 시작했어. 역병 같은 놈! 어째서 내 계획을 자꾸만 방해 하냔 말이다!”
“다 자업자득 아니겠어?”
“뭐? 누가 감히 그딴 망발... 허억!”
분개하고 있던 아지스는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며 헛숨을 들이켰다.
언제부터 열려있었는지 대강당 창문이 열려 있었고, 세찬 바람과 함께 로엘이 창문틀을 밟아 안쪽으로 들어왔다.
창문 바깥에선 소문의 블루 드래곤이 냉기 어린 숨결을 내뿜다가 인간으로 변신하여 로엘을 따라 들어왔다. 그란데 백작과 카넨은 각자 마나 블레이드를 만들어내며 왕궁 병사들이 허튼 짓 못하게 위협하였다.
로엘이 대강당 안에 들어서자 겐크 왕국 귀족들이 어버버거리며 좌우로 물러났다.
그가 살아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실제로 살아있는 모습을 보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더하여 정말로 드래곤까지 대동하여 나타났으니 어찌 아니 놀랄 수 있겠는가.
한순간 놀란 아지스지만 이미 분노로 눈이 먼 그에게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정신머리는 남아있지 않았다.
아지스는 궁녀들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검! 내 검을 가지고 와라! 당장 이 생령을 베어내 버리겠다! 네놈은 죽었단 말이다! 죽어서까지 이 나를 방해할 셈인가!”
“쯧쯧, 완전히 미쳐가는군. 안 된다는 걸 알았을 때 포기했어야지.”
“닥쳐라! 나는 왕중왕이다! 5왕국 중 최강의 나라를 이끄는 왕중왕!”
“대륙통일이라는 게 썩 좋은 것도 아니구만 뭘 그리 애를 쓰고 하려는지 원.”
“네놈 때문이다. 전부 네놈 때문이야!”
양심을 염가 판매라도 한 것인지 자꾸만 로엘 탓을 해대는 아지스였다.
검을 가져오라 했지만 아무도 그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술에 취한 자처럼 휘청거린 탓에 아지스의 옷차림은 흐트러진지 오래였으며 그의 신하들은 몰락한 자를 보는 양 안쓰러운 눈빛을 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