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4 3-5. 육식계 드래곤 =========================
카넨이 풀이 죽어 사과의 말을 하였다.
“죄송합니다. 마나 마스터가 되었다고 기뻐할 때가 아니었군요. 위대한 존재를 화나게 만들어버렸으니 여차하면 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후우, 이미 술상은 엎어졌는데 어쩌겠어. 대체품을 찾아야지. 오늘 내로 그 분을 만족시킬 공물을 마련해야해.”
“못 구하면 어떻게 됩니까?”
“술상 엎었다고 브레스까지 쏠 정도로 성격 나쁘신 분은 아니야. 단지 화나서 몸부림치시겠지. 물론 드래곤의 몸부림이니까 대형 눈사태로 이어지겠지만.”
몸부림이 곧 대형 눈사태라.
역시 드래곤이라 그런지 스케일부터가 다르다.
목숨을 구해준데다 우연이라지만 카넨이 마나 마스터에 오를 수 있는 계기를 주었고, 공물수레를 부순 건 이쪽이니 책임을 져야만 했다.
로엘은 습관적으로 옷깃을 세우며 발걸음을 바깥으로 돌렸다.
“공물을 마련하는 걸 돕겠습니다. 이곳에서 구할 수 있는 것 중에 공물로 바칠만한 것을 읊어주십시오.”
설인과 설녀의 손길이 닿기 힘든 곳에서 자라나지만 로엘과 카넨이라면 닿을 수 있는 것들 중에 공물로 바칠만한 게 있을지도 몰랐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시리가 목록을 읊어주기도 전에 바깥에서 거대한 날갯짓 소리가 들려왔다.
후웅! 후웅! 쿵!
마치 거대한 존재가 날아와서 마을에 착지한 듯한 소리였다.
로엘은 불길한 예감에 서둘러 눈집 바깥으로 나갔다.
불길한 예감은 정확하게 적중하였다.
푸른 비늘, 커다란 날개, 맑은 청안, 기다란 꼬리 등 집채만한 몸집의 블루 드래곤 한 마리가 마을 한복판에 착지하며 허연 숨결을 내뱉었다.
“설산의 아이들아. 준비가 다 됐다 들어 가지러 왔단다. 빙결주는 어딨니?”
거대한 몸집과 다르게 목청에선 감미로운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시리는 설마 예정보다 일찍, 베나티아가 직접 가지러 올 줄 몰라 당황하였다.
“고드름 마을의 시리가 위대한 존재께 인사드립니다. 예정은 오늘 저녁까지 아니었습니까?”
“기다리고 있으려니 감질나서 말이야. 너희들이 가지고 오다가 깨뜨리지나 않을까 싶어 직접 왔어. 후후, 정말 기대되네.”
직접 가지러 온 것만 봐도 베나티아가 빙결주를 얼마나 기대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시리의 목뒤로 인간으로 치면 진땀이라 할 수 있는 서리가 송골송골 맺혔다.
시리는 괜히 거짓말을 했다가 사태를 커지는 것보단 솔직히 말하는 게 낫다 여겨 사실대로 고했다.
“베나티아 님, 사실은......”
시리가 빙결주가 깨진 경위를 차분히 설명하였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베나티아는 의외로 화를 내는 대신 시리의 뒤에 있는 로엘과 카넨을 응시하였다.
정확히는 로엘을 응시하고 있었다.
설명을 마친 시리는 바닥에 엎드리며 사죄하려 하였다.
그러나 베나티아가 기다란 발톱을 좌우로 까딱이며 빙긋 웃었다.
“아 뭐 무릎까진 꿇을 거 없어. 빙결주를 놓친 건 아쉽지만 더 맛있어 보이는 게 있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베나티아는 손가락을 까딱여 영창 없이 마법을 시전하였다.
시전한 마법은 텔레키네시스.
고작 2써클 마법인지라 방 안의 물건을 옮기는 정도로만 쓰이는 마법인데 드래곤이 쓰니 그 위력부터가 달랐다.
그녀가 텔레키네시스로 움직이게 한 건 다름 아닌 로엘이었다.
로엘의 몸이 베나티아의 마나에 제압당한 채로 공중에 떠오르나 싶더니 베나티아가 앞발로 로엘을 움켜잡았다.
“후후후, 설인은 땡기지가 않아서 오랫동안 영 먹질 못했는데 이런 곳에 괜찮은 아이가 있을 줄은 몰랐네.”
로엘은 마나 마스터라는 게 무색해질 정도로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식가라는 게 맛있는 음식만 찾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좀 더 포괄적인 의미.
그녀는 로엘이란 미청년을 맛있게 먹어치우려는 것이었다.
로엘은 대체품을 찾으려다 자신이 대체품이 될 위기에 처하게 되어 식은땀을 흘렸다.
“위대한 존재시여. 확인 차 묻는 거지만 말씀하신 먹는다는 역시 그 먹는다겠죠?”
베나티아가 날개를 퍼덕여 공중으로 힘껏 날아오르더니 익살스럽게 로엘이 당하게 될 일을 암시했다.
“냠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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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엘이 잡혀간 건 정말 한순간의 일이었다.
시리가 두 손을 겹치며 명복을 빌 듯 말했다.
“대체품을 찾아준다더니 대체품이 되어주었군. 만난 진 얼마 안 되지만 훌륭한 사내였어.”
얼이 빠져 있던 카넨은 정신을 차리며 발끈하였다.
“로엘 전하는 아직 안 돌아가셨다고요.”
“아니 죽지야 않겠지만 아마 돌아오기 힘들지 않을까 싶은데. 베나티아 님이 먹는다고 하신 거 들었잖아.”
“먹는다는 의미가 입에 넣고 삼킨다는 의미는 아닌 것 같은데요.”
“나도 100살이나 먹었으니 너보다 잘 알면 잘 알지 모르진 않단다. 내 말은 베나티아 님의 허기를 감당할 수 있을까... 라는 거지.”
드래곤과 인간은 마나저장량만 다른 게 아니다.
굶주림을 풀기 위한 횟수를 감안하면 아무리 강한 아랫심을 가진 인간이라도 짜내고 또 짜내어져 말라비틀어질 게 분명했다.
시리는 로엘이 베나티아를 감당하지 못하는 게 당연한 일이라 여기며 다시 한 번 명복을 빌었다.
“그래도 눈에 깔리는 것보단 행복하게 죽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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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엘이 잡혀간 지 하루하고도 한나절이 지났다.
카넨은 고드름 마을에 남아 로엘의 아디만티움 검을 끌어안은 채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로엘이 유능하고 거침없다지만 상대는 드래곤이다.
이대로 놔뒀다간 정말로 말라비틀어져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었다.
“역시 안 되겠어.”
카넨은 고민 끝에 베나티아의 레어에 직접 찾아가보기로 결심하였다.
베나티아를 앞에 두고 간절히 부탁해볼 생각이었다.
그녀가 로엘을 돌려줄지 않을지 모르지만 시도하지 않는 것보단 나았다.
엘로나를 위해서, 빌로스 왕국과 킬더 왕국을 위해서 말이다.
결심을 한 카넨은 아디만티움 검과 선혈의 장미를 챙겨 눈집 바깥으로 나가려 했다.
그런데 그녀가 눈집 바깥으로 나가자 어제와 같은 날개소리가 들려왔다.
베나티아가 드래곤의 모습으로 날아드는가 싶더니 카넨의 코앞에 착지하였다.
베나티아의 등 위에는 로엘이 타있었다.
아주 멀쩡한 모습으로 말이다.
게다가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베나티아의 날갯짓이 어제보다 약간 맥없어 보였다.
로엘은 베나티아의 등 뒤에서 올라타란 손짓을 하였다.
“올라타, 카넨. 왕국으로 돌아가자.”
카넨은 일단 시키는대로 베나티아의 등에 올라탔다.
드래곤의 등에 타게 되는 진귀한 체험을 하고 있는 가운데 카넨은 영문을 알 수 없어 사정을 물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예요?”
로엘은 베나티아가 날아오르면서 생기는 바람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씨익 웃어보였다.
“미식가가 음식이 아니라 주방장을 따라가는 꼴이랄까.”
“네?”
“유희도 할 겸 날 따라온다더라고.”
“네에?”
“뒷일은 돌아가서 생각하자고. 우리가 사라졌으니 남쪽에선 난리가 났을 거야. 일이 커지기 전에 제때 도착할 수 있어야 할 텐데.”
베나티아가 로엘의 걱정 어린 목소리를 듣곤 힘차게 날개를 펄럭였다.
“허리가 쬐끔 아프긴 하지만 힘내보지. 꽉 붙들어.”
그녀의 말에서 카넨은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대충 짐작하였다.
‘하루하고 한나절... 무엇을 위한 유희인지 알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