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될놈될-61화 (61/219)

00061 3-4. 아깝지 않다 =========================

점점 거리를 좁혀 오는 마스크헬름 기사를 두고 루엔이 주머니에서 손바닥만한 플라스크 몇 개를 꺼내 내던졌다.

“선물.”

플라스크는 마스크헬름 기사가 아닌 그의 발치에 떨어져 깨졌다.

클레이모어에 마나 블레이드가 깃든 걸 보고 직접 맞추려 해봤자 쳐낼 게 분명하기에 발치에 떨어뜨린 거였다.

와장창!

플라스크가 깨지면서 안에 있던 용액이 사방으로 튀었다.

각각의 용액은 루엔이 비상용으로 가지고 있던 것으로 연금술 4~5써클에 해당하는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각각의 용액이 효과를 발휘하면서 끈끈이 넝쿨이며 산성용액, 감각반전향수 등이 뿜어져 나왔다.

마스크헬름 기사의 반응도 만만찮았다.

클레이모어로 끈끈이 넝쿨의 대부분을 잘라내고, 산성용액은 검면을 들어 막아냈으며 감각반전향수는 숨을 참으로서 흡입하는 건 방지했다.

그래도 남은 끈끈이 넝쿨 몇 가닥이 그의 발목을 휘감았으며 산성용액을 막느라 검면으로 앞을 가린 탓에 전방을 제대로 보지 못한 탓에 크게 넘어지고 말았다.

마나 익스퍼트 정도 되면 풀 플레이트 아머 착용상태로 넘어져도 혼자 일어날 수 있겠지만, 루엔과 에아는 그 잠깐의 타임로스를 이용해 거리를 벌릴 수 있었다.

서서히 왕궁으로 내려가는 내리막길이 보이는 가운데 에아가 루엔을 감싸 안으며 급히 걸음을 멈추었다.

별안간 복면을 한 자들이 내리막길을 가로 막는 게 아닌가.

마스크헬름 기사 혼자 루엔을 쫓는 게 아니었다.

복면을 한 자 중 한 명이 검을 들이대며 에아를 위협했다.

“목이 떨어지기 싫다면 순순히 루엔 양을 내놓아라.”

보통 여인네들 같으면 서슬 퍼런 검을 보고 덜덜 떨었을 터라 에아는 당차게 받아쳐주었다.

“내놓으면 죽일 거 아는데 제가 왜 내놓겠어요?”

위협이 먹히지 않자 복면 사내의 복면이 살짝 일그러졌다.

“이년이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그것보다 당신들 목숨이나 걱정하는 게 좋을 걸요?”

에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검을 들이대고 있던 복면 사내의 머리가 크게 흔들렸다.

에아를 둘러싸고 있던 다른 복면 사내들이 동료를 쓰러뜨린 무기를 쳐다보았다.

내리막길 아래에서 손도끼 하나가 날아와 동료의 등에 박힌 것이었다.

손도끼를 던진 것은 인간이 아니었다.

녹색 피부의 오크, 블랑코가 허리춤에 매달아 놓았던 예비 손도끼를 뽑아 양손에 쥐며 으르렁거렸다.

“그르르, 긍지 한 점 없는 자들이로구나. 고꾸라지기 전에 그녀에게서 떨어져라.”

복면 사내들은 나타난 게 한낱 오크일 뿐이라는 걸 깨닫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오크가 왜 여기에? 뭐 상관없지. 미천한 돼지머리 종족아. 좋은 말할 때 꺼지 거라.”

블랑코는 그들의 도발을 한 귀로 흘려 넘기며 가차 없이 손도끼를 던졌다.

복면 사내 한 명이 날아드는 손도끼를 피해 고개를 숙였다.

알고만 있다면 피하는 건 어렵지 않기에 손도끼를 피한 후 비웃어주려 했으나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땐 이미 블랑코가 근접해온 이후였다.

손도끼를 날린 이후 그 속도를 따라 움직일 만큼 재빨랐던 것이다.

블랑코는 하나 남은 손도끼로 복면 사내의 목을 베어냈다. 그리곤 춤을 추듯 손도끼를 한 바퀴 돌리며 옆에 있던 다른 사내의 가슴에 손도끼를 찍어 내렸다.

퍼벅!

포위망의 일부를 허물어낸 블랑코는 에아와 루엔을 자신의 등 뒤에 두며 말했다.

“왕궁에 복귀하라고 전하러 왔는데 이쪽도 일이 터져 있었군.”

“왕궁에서도 무슨 일이 생겼나요?”

“설명할 시간이 없다. 길은 뚫어놓았으니 먼저 가거라.”

“블랑코는요?”

“가서 크라넬을 불러와라. 지금 왕궁에 있는 마나 익스퍼트는 그밖에 없으니까.”

포위망 건너편의 마스크헬름 기사가 마나 익스퍼트라는 건 그가 들고 있는 클레이모어만 봐도 알 일이었다.

그래서 블랑코는 그 짧은 순간에 그를 상대할 자는 크라넬 밖에 없다는 걸 깨닫고 그를 불러라 한 것이었다.

에아는 알았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며 루엔과 함께 뚫린 포위망 너머로 달렸다.

복면 사내들이 에아와 루엔을 따라가려 했으나 블랑코가 앞을 가로막았다.

블랑코는 에아의 얼굴, 그리고 온몸에 남아있던 상처들을 곱씹으며 송곳니를 드러냈다.

“가려거든 목 없는 상태로 가거라. 그 외에는 허락지 않겠다.”

복면 사내들은 조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왕궁 뒷산에도 곳곳에 초소가 있어서 에아와 루엔이 거기에 도달하면 사실상 납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몇날며칠을 기다려 초소 바깥 지대까지 나오길 기다린 건데 오크 하나 때문에 수포로 돌아가게 생겼다.

그때 마스크헬름 기사가 터벅터벅 걸어 내려오며 지시를 내렸다.

“이놈은 내가 처리하겠다. 내려가서 계집을 잡아와라.”

아무리 블랑코가 오크 특유의 타고난 근력과 감각적인 전투센스를 가지고 있다 해도 마나 익스퍼트를 상대하는 건 무리였다.

지닌 무력 차이가 센스를 무시하고도 남았기에.

복면 사내들은 마스크헬름 기사라면 금방 블랑코를 제압할 수 있을 거라 여겨 좌우로 넓게 퍼졌다.

좌우로 넓게 퍼지면 블랑코도 모두를 붙들어두기 힘들었다.

블랑코는 아까 던졌던 2개의 손도끼를 모두 회수하며 좌우로 퍼지는 복면 사내들의 숫자를 세었다.

‘지나가려는 놈들은 셋. 손도끼 3개. 하나라도 빗맞추면 안 되는군.’

전방에선 마스크헬름 기사가 잔가지를 몸으로 꺾어내며 달려들고 있었지만 블랑코는 신경도 쓰지 않고 복면 사내들을 쫓았다.

먼저 내리막길 아래로 크게 뛰며 피 묻은 손도끼 하나를 던졌다.

블랑코가 던진 손도끼는 철제 프리스비마냥 원이 되어 날아가다가 정확하게 복면 사내 중 한 명을 맞추었다.

‘앞으로 2명.’

블랑코에게 덤벼들던 마스크헬름 기사는 완전히 굴욕에 잠겼다.

한낱 오크 따위가 자신의 돌격을 무시하고 등을 돌린 채로 부하들만 보고 있으니 열 받을 수밖에 없었다.

마스크헬름 기사는 돌출된 바위 하나를 밟고 크게 뛰어 쪼개버릴 듯 강하게 클레이모어를 내리쳤다.

떨어지는 육중한 일격.

블랑코는 일어서려고 노력하지 않고 내리막길을 이용해 그대로 굴러 떨어지면서 일격을 피해냈다.

클레이모어가 밀가루 반죽에 파고든 듯 바닥에 쑤욱 박혔다.

박힌 자리 주변으로 거미줄 같은 균열이 생긴 것만 봐도 그 위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블랑코에게 있어 클레이모어는 안중에도 없었다.

에아와 루엔을 무사히 돌려보낸다.

그 한 가지 목적만을 이루기 위해 오로지 복면 사내들을 저지하는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굴러 떨어지던 블랑코는 구르는 걸 멈추는 시간도 아까워 대충 곁에 있는 나무기둥에 부딪쳐 억지로 기댄 자세를 만들었다. 그리곤 사선 방향 위쪽에서 수풀 너머로 뛰어들고 있는 복면 사내에게 남은 손도끼를 던졌다.

손도끼가 날아가더니 이내 곧 수풀 너머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아악!”

‘이제 하나.’

투척을 하느라 2번이나 멈춘 사이 마스크헬름 기사는 완전히 블랑코를 따라잡은 후였다.

마스크헬름 기사가 클레이모어를 내리 긋는데 도저히 피할 틈이 없었다.

블랑코는 머리 위로 떨어지는 검을 보며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클레이모어를 휘두르던 마스크헬름 기사는 블랑코의 행동에 마스크헬름 사이로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푸쉭!

결론부터 말하자면 클레이모어는 블랑코를 베어냈다.

허나 원래 의도했던 머리가 아니라 오른쪽 팔 한 쪽만 베어낼 수 있었다.

피하지 못할 것을 예감한 블랑코가 역으로 몸을 앞으로 내민 것이다.

팔이 떨어져나가면서 잘린 단면에서 피가 튀었지만 블랑코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래를 보았다.

어느새 블랑코를 지나친 복면 기사 한 명이 에아와 루엔의 바로 뒤까지 도달한 상태였다.

블랑코는 이를 악물며 마지막 남은 손도끼를 아래로 던졌다.

손도끼가 크게 포물선을 그리며 나무 한 그루 위를 지나쳤고, 아슬아슬하게 복면 사내의 머리에 적중했다.

마지막 복면 사내가 죽으면서 에아와 루엔을 쫓을 이는 사라졌다.

에아와 루엔을 위협할 요소는 없어졌지만 블랑코 본인의 목숨은 여전히 위태로웠다.

오크 하나 때문에 완전히 일을 망친 마스크헬름 기사가 떨어진 팔을 밟으며 갈린 목소리를 내었다.

“네놈. 처음부터 팔 하나를 버릴 셈이었구나.”

처음부터 마나 익스퍼트를 상대로 무사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최소한 한두 번은 베이리라.

어차피 베일 수밖에 없다면 머리가 아닌 팔을 주겠다.

그리 생각하고 움직였기에 망설이지 않고 팔을 내밀 수 있던 것이었다.

블랑코는 오크 전사의 긍지를 머금은 채로 무기 없이도 당당히 서있었다.

“버려도 아깝지 않다. 그리 생각해서 내줬을 뿐이다.”

“목숨까지 버린 셈이다만?”

“그 역시 아깝지 않다.”

무기는 없지만 전사인 이상 끝까지 싸우다 죽을 생각이었다.

블랑코는 남은 한 팔을 당겨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마스크헬름 기사가 재차 클레이모어를 들었을 때.

단검 하나가 날아들었다.

마스크헬름 기사는 클레이모어의 넓적한 검면을 내세워 단검을 막아냈다.

클레이모어에 맞아 튕겨나간 단검은 마법효과에 의해 사라지면서 본래 주인에게로 돌아갔다.

그와 동시에 전방, 좌우 각각의 나무 위에서 세 남자가 떨어져내려 착지하였다.

왕궁에서 남몰래 대기하고 있던 바보삼형제였다.

삼형제의 첫째가 손도끼에 마나를 부여하며 말했다.

“남의 집 뒷마당에서 날뛰다니 예의는 어따 팔아먹었느냐?”

오른쪽에선 둘째가 미스릴 레이피어에 마나를 부여하며 말했다.

“형님의 높은 곳 사랑 덕을 보기는 처음이네요.”

왼쪽에선 셋째가 회수한 단검을 거꾸로 쥐며 마나를 부여했다.

“어후, 다리 저려라. 한숨 돌리고 처리하면 안 될까요?”

로엘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남몰래 왕궁에 대기하고 있던 바보삼형제였다.

오늘도 어김없이 첫째의 고집에 따라 왕궁에서 가장 높은 본궁 지붕 위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산기슭에서 여러 개의 검이 햇빛을 반사하여 반짝거리는 게 보였다.

그래서 남들보다 훨씬 빨리 알아차리고 이리 지원을 온 것이다.

셋째는 블랑코의 팔이 잘린 걸 보고 호들갑을 떨었다.

“형님! 팔 잘렸어요!”

“셋째야, 눈치 없게 그딴 거 외치지마라. 그럴 땐 조용히 옷을 찢어주면서 내게 맡기라고 하는 거야.”

“아하, 그렇군요.”

셋째가 소매를 길게 찢어 블랑코에게 넘겨주었다.

블랑코가 작게 고개를 꾸벅여 감사를 표하곤 오른쪽 잘린 단면을 감싸 질끈 묶었다.

그 사이 첫째와 둘째는 이미 마스크헬름 기사에게 공격을 가하는 중이었다.

“흐랴압!”

첫째의 도끼가 마스크헬름 기사의 옆구리를 쓸어 올리듯 공격해 들어갔다.

마스크헬름 기사가 마나 블레이드를 이용해 도끼 채로 첫째의 손목을 날려버리려 했지만 공격해 들어오던 도끼가 경합 직전에 궤도를 바꾸어 뒤로 빠졌다.

대신 둘째의 레이피어가 마스크헬름 기사의 갑옷 틈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마스크헬름 기사는 몸을 비틀어 갑옷 틈 대신 갑옷에 레이피어가 스치게 하였다.

마나 담긴 레이피어가 풀 플레이트 갑옷의 팔뚝 부분을 스치고 지나가며 겉면을 잘라냈다.

마스크헬름 기사가 몸을 비튼 김에 한 바퀴 돌아 두 사람을 한꺼번에 베려했으나 이번에는 셋째의 단검이 적절한 궤도로 날아들어 기사가 완전히 돌지 못하고 방어하게 만들었다.

각각의 힘은 마스크헬름 기사에 비할 바 못 되나 합공이 워낙에 물 흐르듯 이어져 공격하기가 쉽지 않았다.

마스크헬름 기사가 출혈을 감수하고 싸우면 모를까 임무를 실패한 마당에 자기 몸을 희생하며 싸울 이유는 없었다.

결국 마스크헬름 기사는 퇴각을 결심하곤 뒤로 몇 걸음을 물러나며 클레이모어로 주변의 나무를 여럿 베어냈다.

아름드리나무들이 아래로 기울면서 바보삼형제와 블랑코의 위로 떨어졌다.

피하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잠깐 주춤하는 사이 마스크헬름 기사는 수풀이 무성한 지대로 들어간 후였다.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고 있으니 바보삼형제의 속도라면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셋째가 단검을 회수하며 말했다.

“형님들, 쫓아가서 생포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

“아서라. 상대는 마나 익스퍼트지 않느냐. 사생결단으로 싸워도 이길까 말까인데 생포는 무슨.”

배후가 누구인지는 말할 것도 없었고, 왕궁에선 그 배후란 작자들을 적으로 표명한 후이니 무리해서 생포할 필요는 없었다.

그보다 블랑코를 왕궁의원에게 보이는 게 먼저였다.

첫째는 블랑코를 부축하며 유감을 표했다.

“전사에게 가장 중요한 팔을 잃었군. 우리가 좀 더 일찍 왔으면 좋았을 텐데.”

“더 중요한 걸 잃지 않았으니 됐습니다.”

“뭐 본인이 그리 생각한다면 다행이군.”

블랑코로선 아쉬워하는 기색 하나 없이 피식 웃을 뿐이었다.

아니,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긴 했다.

최근 에아에게 글 읽는 법뿐만 아니라 글 쓰는 법까지 배우고 있는데 주로 쓰는 팔을 잃었으니 글 쓸 때 지장이 있을 것 같다.

“안 그래도 악필인데 더 악필이 되겠군.”

0